청년스폐셜 정리

질문자1: 저는 친구들이랑 얘기하면서 저의 패턴을 발견하게 된 게 있는데, 제가 기분이 나빠서 얘기를 하는데 그걸 공부를 근거로 얘기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어떤 친구가 화내는 게 불편한데, 그걸 부처님이 그렇게 하면 괴롭다고 했어이런 식으로 하니까 친구는 왜 그래야 하는지, 제가 명분을 가지고 얘기하는 걸 아니까 그쪽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저도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 닫힌 방법이라는 그런 느낌만 있어요. 어떤 마음으로 대화를 하는 게 열려 있는 거고, 다른 방법인지가 궁금해요.

정화스님: 우선 유재석씨가 진행하는 ‘뉴퀴즈 온 더 블럭’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걸 보고 있는데, 은평구인가 불광동 쪽에서 어떤 초등학교 여학생에게 물어본 게 있는데, 충고하고 잔소리하고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보니까. 4~5학년 여학생이 그때 이런 말을 해요. “잔소리 기분 나빠요!” “충고는요?” “진짜 기분 나빠요.”(일동 웃음) 거기서 (질문자가) 지금 그런 걸 하는 거예요. 진짜 기분 나쁜 것을 하기 때문에 명분은 있지만, 함께 공감하는 장 자체를 닫는 거예요. 너무 훈계하려고 하지 말고, 그런 상태는 그냥 안아주고 이해하고, 내가 이해 안 되면, 저 사람이 살아온 삶 자체를 존중해주는 태도가 필요해요. 나중에 그 사람이 물어봤을 때,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거기다 대놓고 이런 것이 더 옳은 것 같으니까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이런 것이야”라고 하면,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잔소리보다 더 기분 안 좋은 충고가 되기 시작하고, 가장 빨리 친구로부터 멀어지는 길입니다. 친구와 헤어지는 1번지가 ‘충고’예요.

질문자1: 저는 누구를 감싸주거나 토닥이는 게 그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있거든요.

정화 스님: 그런 걸 많이 받는 사람들이 어려운 일에서 훨씬 자기가 힘을 내서 살 수 있어요. 토닥이고 “좋아해”, “사랑해”라는 말을 많이 듣는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서 헤쳐 나아갈 수 있는 힘을 훨씬 더 많이 축적해요. 그래서 가능하면 안아주고, 토닥여주고 하는 것을 많이 하는 게 좋아요. 충고하는 것보다는.^^

people-2608145_1920

질문자2: 저는 평소에 이타심이란 게 정말 가능한가?’ 이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누군가를 도와주거나 할 때도, 이걸 도와주는 게 내가 좋아서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이 흘러가요. 그래서 친구들과 서로 피드백을 해주는 사이에서도, 이게 정말 이 친구를 위한 길이다생각을 하고 얘기하는 게 스스로 너무 오만한 것 같아요. 내가 불편해서 얘기하는 건데, 이타심이란 게 정말 가능한가요?

정화 스님: 뒤 질문에 먼저 답하면, 불편한 내 심정만 이야기해야 해요. 상대는 “네가 왜 이걸 몰라”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조차 실제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말 안 해도 알아주는 것이 가까운 사람들의 일이라고 하는데, 한 번 여러분들 어릴 때 생각해봐요. 부모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 없잖아요. 10대 청소년이 실제로 아무도 부모 형제한테 본인 상담 잘 안 해요. 왜냐하면, 자기를 몰라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친구가 자기를 더 잘 알아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근데 실제 친구도 잘 몰라요. 불편한 감정이 들 때, 약간 (목소리) 톤이 좀 다운되면, 자기 심정을 네 탓이 아닌 쪽으로 “나는 이런 것을 받으면, 이런 상태가 된다”라고 알려주는 것이 중요해요.

두 번째는 ‘이타적 행위가 가능한가’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생물이 살아가는 방법으로써는 이기심이 기본이에요. 근데 수십억 년을 살아오다 보니까 생물 스스로가 이타적 생각이 동반되지 않는 ‘이기’로만은 살 수 없다고 하는 것이 DNA속에 숨어져 있어요. 인간은 그와 같은 내용을 자각한 생물이 되는 것이고, 다른 것은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것을 하는 것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실제로는 자기중심의 삶이지만, 그 삶 속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가 많이 열려 있어야 자기 자신도 살 수 있고, 그 통로를 통해서 다른 사람과 의존하는 관계를 만들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타’의 가장 기본 틀은, 바라지 않는 거예요. 바라지 않으니까 내가 너무 힘들게 해서는 안 돼요. 힘이 딱 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한 것에 대해서 스스로 자책을 하거나 또 다른 사람을 탓할 수가 쉬워요. 그러니까 힘이 들면 아주 특별한 위급상황이 아니면, 내 힘이 지칠 때까지 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emotions-4654122_1920

질문자3: 정치나 사회문제, 이런 것들에 좀 더 열리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내일모레 서른을 앞둔 청년인데요,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 제 주변 친구들도 많이들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이게 ‘왜 그럴까?’ 싶어서 친구들과 얘기를 해보는데, 일단은 저희 또래 애들한테는 정치적인 사건이 몸에 실제로 영향을 준 적이 없어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얘기가 나왔어요. 저희 윗세대분들은 신체적으로 왔던 사건들이 있으니까 확실히 뉴스나 이런 거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게 저희랑 달랐어요. 저희는 조국 사태 이런 게 일어나도 감정이 동하거나 그렇진 않거든요. 그래서 그때 시위를 열심히 나가시는 사오십대 분들 보면서 굉장히 놀랍고 신기했어요. 공부를 해오면서 공부하는 것들이 사회나 사람들과 더 연결되었으면 하는데, 제가 그렇게 정치적인 것들에 관심이 없어서요.

정화 스님: 정치적 행위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근데 그 행위를 힘을 내서 표현하지 않는 것을 정치인들은 진짜 원해요. 그런데 예를 들면 우리는 ‘보수다 진보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실제 보수와 진보가 만들어진 심리적 과정을 보면, 뭔가에 의해서 문화적 배경으로 만들어지잖아요. 한번 이렇게 만들어지면 그것이 옳고 그르기 이전에 내가 외부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돼버려요. 그래서 그냥 거의 정치권이 원하는 투표를 하게 되어 있어요. 어찌 보면 우리는 그것을 비트는 생각을 하는 연습을 잘 안 해왔어요. 청년세대들은 그것을 비트는 연습을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표출되는 방법으로 무언가 이야기가 돼야 해요. 그 이야기가 임계점을 넘지 않으면 절대 그분들이 법을 일반 대중들을 위해서 잘 안 만들어 줘요.

예를 들면 국회의원들이 법을 만들 때 대부분의 경제적이라든가 힘을 가진 사람들한테는 유리한 법을 만들어주고 서민한테는 유리한 법을 빨리 안 만들어요. 무슨 대기업, 정치가가 반드시 국회의원한테 로비해서 그러는 게 아니고 그곳의 구성 자체가 주로 잘 살고 힘 있는 20% 이상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아무런 로비를 안 해도 법을 만들다 보면, 팔이 안으로 굽듯이 자기들한테 유리한 법이 만들어져요. 근데 그냥 만들면 조금 민망하니까 예를 들면 전경련 같은 데서 “그런 법을 만들면 우리 기업 다 죽습니다”라고 말을 하면 재벌 신문들이 또 막 확대해서 말해주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이걸 명분 삼아, 본래 그런 법을 만들고 싶었는데, 그걸 그냥 만들지 않고 그걸 명분 삼고 만드는 거예요. 그럼 저절로 자기들이 유리한 법을 만들게 돼 있어요.

바꿔 말하면 전경련 같은 단체가 하는 말의 강도만큼 80%의 일반 사람들이 강도 높게 자기를 표출하는 방향이 없으면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자기들의 삶과 위반된 투표를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거예요. 누가 나오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예를 들면 어떤 진보적 시각을 가진 분이 조선일보에 들어가서 조선일보 글 쓰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잖아요? 근데 거기 들어가면 언론고시라고 해서 굉장히 머리도 좋고 공부도 (도덕적인 거 떠나서) 잘하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근데 이제 10년 20년 오래 계시는 분들이 최종적으로 이 기사를 낼 것이냐 말 것이냐 결정할 거 아니에요. 신입이 예를 들면 한겨레 같은 시각으로 기사를 써서 올린다, 그러면 과장님은 통과해도 부장님이 “무슨 글이 이래.”하면 최종적으로 채택이 안 돼요. 이 과정을 몇 년만 딱 지나고 나면 저절로 조선일보 시각으로만 글을 쓰게 돼 있어요. 근데 거기는 그야말로 재벌 신문들이에요. 자기들한테 불리한 기사가 거기서 나올 일이 잘 없는 것이죠.

protest-464616_1920

그런데 이들이 근본적으로 자기들하고 다른 기사를 쓸 때는 이제 국민, 상당히 많은 국민들이 “아니다”라고 말을 외칠 때 ‘이것조차 우리가 따라가지 않으면 우리 신문사가 망한다’고 하는 판단이 있을 때만 논조가 바뀝니다. 예를 들면 5공 때 조선일보는 전두환 대통령을 찬양하는 기사가 80%이상 입니다. 그리고 비판하는 기사가 거의 없었어요. 반대로 노무현 대통령은 완전 반대예요. 근데 조선일보가 사설에다가 전두환 대통령이 막 뭘 하고 뭘 하고 할 때 글을 쓴 게 있어요. ‘tv는 뭘 하는가’, 이렇게 글을 썼어요. 국민들의 저항이 너무 커지니까 오늘부터라도 기사 내용을 바꾸지 않으면 자기네들조차도 존립할 수 없단 걸 알 때 비로소 기사 자체가 바뀌어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청년들이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라고 하는 건 그냥 그 정치인들이 원하는 소리예요. 그러면 자기들끼리 좋은 법을 만드는 것이죠. 그래서 가능하면 청년들이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자기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 숫자가 점점 많아져서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필요한 거고.

또 ‘나는 정말 그리 관심 없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자책할 이유는 전혀 없어요. 그런 것을 하는 사람들도 하나의 삶이지만 다른 식으로 자기 삶을 사는 것도 하나의 삶이니까요. 이 두 삶의 우열을 전혀 논할 수 없어요. 내가 봐서 ‘나는 이런 것에 너무 안 맞는 거 같아’ (실제로는 맞을 수도 있지만) 라면 이렇지 못한 자기에 대해서 자책할 이유는 전혀 없어요.

너무 특정하게 청년은 이래야 한다고 하는 것 자체는, 마치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될 것 같은 착각이 우선 돼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될 수는 없어요. 각자의 삶을 존중하면서 살되 이런 것이 해보고 싶으면 하고 전혀 아니면 안 해도 괜찮아요. 뭐 거기에 대해서 크게 잘했다 잘못했다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오류라고 생각해요. 그렇습니다.

댓글

ava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