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결(강감찬 글쓰기학교)

1. 전제를 바꿔야만 읽을 수 있는 책

지난 10월 감이당에서 불교 강의를 들었다. 서양철학과 과학에 한계를 느끼던 내게 불교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마침 강감찬 글쓰기 3학기 책 목록에 『낭송 금강경』이 있었고, 불교에 대해 더 알고 싶어 3학기 글쓰기 책으로 금강경을 선택했다. 그런데 불경은 생각보다 잘 읽히지 않았다. 불경 속의 사유가 내게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불경은 살면서 형성된 내 모든 전제와 전혀 다른 전제를 가졌고, 그 위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이 불경의 사유 안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

가령, 나에게 있어 즐거움이란 ‘내 감정을 유쾌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음악을 듣거나, 여행을 가거나, 사람들을 만난다. 그런데 보살에게 즐거움이란 ‘모든 감각기관과 이로부터 생겨나는 감각들을 비어 있는 마을처럼 바라보는 즐거움’, ‘깨달음에 이르길 서원하지만 때에 맞지 않으면 해탈하지 않는 즐거움’, ‘착한 벗을 가까이하는 즐거움이며, 나쁜 벗은 보호해 주고픈 즐거움’과 같은 것이었다. 고행이나 희생, 인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것을 두고 즐거움이라고 하니,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같았다. 또 이런 사유가 내겐 너무 거창하고 부담스러웠다. 글쓰기 멘토 선생님께 이런 내 소감을 말하니,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 비현실적이고 거창하다고 생각해? 지금 너의 기준을 고수한 체, 그 틀로 보살을 판단하고 있잖아. 그건 졸렬한 태도야!”

불경을 읽으면 거창하다고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이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샘이 한 방 더 날리셨다.

  “그리고, 보살이 되는 게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보살 되는 것보다 유튜브 스타 되는 게 더 어려울 수도 있어~”

보살과 유튜브 스타를 비교하다니, 그것도 어려움의 정도를 역전 시켜서!!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 충격 덕분에 내 생각의 틀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왜 보살과 같은 경지에 절대 이를 수 없을 것이라고 미리 금을 그어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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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 구석에는 보살이 ‘돼버리는’ 불상사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삿된 마음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명예는 아니지만 나중에 고시에 붙어 학교 게시판에 이름 올리는 상상을 했고, 엄청난 부는 아니지만 언젠가 저렴한 외제차라도 하나 장만하면 좋겠다고 바랐다. 무엇보다도 만약 보살이 ‘돼버리면’, 자존심, 욕심 등을 다 초월해버리니, 속세에선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두려움과 더불어, 보살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 이유를 살펴보았다. 나는 ‘인간은 동물이다. 욕구를 느끼고 이에 반응하며, 생존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진화 생물학적 관점을 전제로 삼고 있었다. 이 전제로 보살의 삶을 바라보면 고행으로밖에 보지 못한다. 하지만 유마거사는 이것이 분명 ‘즐거움’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 전제가 아닌, 불경의 전제로 불경을 다시 읽어나갔다. 그렇다고 불경의 뜻이 훤히 이해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기적은 일어났다. 바로 일상에서 내 전제를 바꾸는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2. 원수가 친구가 되는 기적

나에겐 원수가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동생’이라고 부른다. 동생이 미운 이유는 부모님의 지원을 당연하게 여겨서였다. 부모님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수능 끝나고 할 일도 없으면서, 집안일에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모습이 눈엣가시처럼 걸렸고, 심지어 자기가 먹은 밥그릇도 안 치울 때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자기가 안 하면 몸 아픈 엄마가 하거나, 직장 일과 가사를 병행하는 아버지가 하거나, 아니면 오빠인 내가 하게 된다는 것을 뻔히 알 텐데, 어째서 남에게 미루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에 대해 지적하고 따지면, 자기는 오빠랑 달라서 꼭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변명하거나, 다음부터 한다고 하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또 열 받아 싸우기를 반복해왔다.

그런데, 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싸움의 윤회에 변화가 찾아왔다. 이 상황에 불경 읽기를 통해 익힌 ‘전제를 바꾸기’를 적용해 본 것이다. 우선 지금까지 내가 동생에 대해 갖고 있었던 전제들을 샅샅이 뒤졌다. 가장 밑바닥에는 ‘나는 너보다 잘났고, 너는 내 말을 따라야 한다.’가 있었다. 사실, 동생을 증오한 가장 큰 이유는, 내 말을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내게 고개 숙이지 않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집안일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이 상해 화를 낸 것이었다. ‘나와 동생은 평등하다. 그러니 동생이 나를 무시할 수도 있다.’로 전제가 바뀌니, 동생이 내 말을 무시해도 그리 밉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살의 즐거움까지 적용해 보았다. ‘동생이 먹은 그릇을 내가 치워주는 즐거움’을. 그런 후에 생각해보니, 오빠지만 동생을 위해 해준 것이 딱히 없었다. 그렇다면 동생을 위해 설거지를 해줄 수 있으니 기쁜 일이었다. 물론 이런 기적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지금껏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동생을 대한 것이 놀라웠다. 동생에 대한 자존심이 없어지니, 동생을 보면 미묘하게 느껴지던 원인 모를 불편함도 사라졌다. 그렇고 나니, 마치 새 친구를 사귈 때처럼 동생과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먼저 다가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동생에게 ‘애교’를 부리며 등 안마를 부탁했다. 동생은 이런 나의 태도 변화를 처음엔 어색해했지만, 내가 계속 장난도 치고 농담도 하니까 금세 같이 웃으며 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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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동생이 나에게 직접 해를 끼친 것은 없었다. 단지, 내가 바란 ‘이상적인’ 동생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무시하고 미워했다. 나는 내 동생이 가족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고, 부모 힘든 것도 헤아려 자기가 먼저 집안일도 거드는 사람이기를 바랐다. 물론 그렇다면 더 좋겠지만,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무시한 것은 분명 잘못이었다. 심지어 나도 그 나이 때 그렇게 못했으면서 말이다.

3. 인연장으로 가득 찬 공의 세계

이렇게 동생과의 관계에 『낭송 금강경』의 가르침을 적용하면서, 어렵게만 느껴졌던 무아, 무상, 연기, 공이 친근해졌다.

동생이 태어나는 순간, 나는 ‘오빠’라는 아상(我相)을 만들었다. 내가 생각한 오빠의 이미지는 동생을 잘 돌봐주는 것이었고, 그러려면 나는 오빠로서 동생보다 뛰어나야 했다. 또 동생은 그런 오빠를 잘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권위적 오빠’의 정체성은 실체일까? 아니다, 내가 생각을 바꾸는 순간 이런 ‘나’는 없었다. 무아, ‘나’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 내가 권위적으로 동생을 대했을 때, 동생은 한없이 차갑고 반항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자존심을 버리고 친구가 되기를 청하자, 동생은 내게 미소를 지었다. 무상, 대상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렇듯 내가 다른 태도로 동생에게 다가가니, 동생도 나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연기, 이런 내가 있어 이런 동생이 있고, 저런 내가 있어 저런 동생이 있다.

때문에, 금강경은 세상이 고정된 실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관계와 인연(因緣)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실체와 실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오빠 조한결’이라는 실체는 없다. 나와 동생 사이의 관계가 존재하고, 그 관계로서 실체인 나와 동생은 의미를 갖게 된다. 실체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관계는 실체를 통해 드러나는 것. 이것이 내가 이해한 ‘공’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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