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4. 귀주… 어서와, 유배는 처음이지? - 괴상하고 쌩뚱맞고 지각불가능한

문리스(남산강학원)

의식주 혁명 - 호변(虎變), 표변(豹變), 혁면(革面)

용장은 오늘날의 귀양시(貴陽市) 기준으로 보면 북쪽 방면에 위치한, 수문현(修文)현 지역입니다. 당시 여정을 일별해 보면 양명은 귀주성의 동남 방면에서 귀주성을 들어가 몇 곳의 지역 현청들을 지나, 당시로선 서북 방면에 위치한 수문현 용장역에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사진 참조) 양명이 거치며 들어가고 또 거치며 돌아 나온 귀주성의 곳곳엔 오늘날에도 묘족과 동족 등 중국 소수민족들의 거주지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중국은 중국이지만, 만나는 이들마다 복장이며 생활 방식이 한족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새소리.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구요. 양명은 그들의 말이 새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지대는 높아 해발 1,300미터쯤 되는 고지대이고, 지역이 온통 산악 지역이라 중원에서 느끼던 광야의 시원함 같은 느낌은 전혀 없는 곳입니다. 엎어놓은 컵케잌들이 잔뜩 펼쳐진 장면을 떠올려보시면 됩니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 근대인들처럼 ‘풍경’으로 바라보려 해선 안 됩니다. 저도 지금 귀주성에 가면 열차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그런 장면에 감탄하고 즐거워(?)합니다. 그 자체로 절경이죠. 하지만 500년 전 생활인의 감정으로 보면, 이게 현실입니다. 지금이야 귀양시 한복판에 밤새 네온사인이 꺼지지 않는 수십 층짜리 건물들이 빼곡하고, 귀주성(현 귀양성) 곳곳을 고속 철도가 산과 산 사이를 뚫고 연결시킵니다만, 그래도 귀주(귀양)는 지대 자체가 높고 지형 또한 습곡 단층 지형이어서 아직도 오지가 많은 땅입니다.

기후는 고온 다습합니다. 그 바람에 전염병이 잘 돌고 독충과 독사 등이 많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죠. 조금 과장해서 보자면 양명에게 이 땅은 일종의 외국과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요? 그만큼 시청각 및 각종 감각들이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들을 온통 수정해야 했던, 그래서 긴장할 수밖에 없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의 선물세트 같은 그런 곳. 중원으로부터의 추방, 유폐, 구속.

그럼에도! 저는 양명의 용장(귀주성)행은 추방이 아닌 도주, 구속이 아닌 자유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랬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를 가능케한 것이 바로 양명이란 인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양명이란 인물로 하여금 그러한 도주와 자유의 한 세계를 맘껏 펼쳐볼 수 있게 해준 배경으로서의 용장(귀주성)이 있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배경은 배경이지만 특급 까메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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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귀주 또한 양명이 아니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귀주에는 시내 곳곳에 화려한 네온빌딩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지만, 전 지역에 가로놓인 크고 작은 산들 때문에 개발이 불가능한 산악 지역이기도 합니다. 산업 시설을 갖출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중국 전체에서 가장 낮은 소득 지역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오지이고 외지인 것입니다. 오늘날 귀양 땅은 천혜의 자연 환경이 거의 유일한 소득원이 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독보적인 문화 관광 상품(!)으로서의 왕양명이 있습니다. 귀주와 인연이 있는 전국적 문화 영웅은 왕양명이 유일한 것입니다. 하여 수문현 지역과 귀양 곳곳은 양명의 문화 권역입니다.

양명의 훌륭한 인격 및 유학자 스승으로서의 삶은 용장으로의 유배 생활이 없었어도 가능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명학은 용장이어서, 양명이 유배객으로 용장 생활을 겪음으로써 양명의 학문이 비로소 지금의 이 양명학이 되었다는 사실 또한 틀린 말이 아니며, 이것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지점입니다. 무엇보다 이 둘은 모순되지도 않습니다. 귀주가 있었기에 양명학이 탄생(!)되었지만, 양명이 있음으로서 귀주 또한 귀주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양명의 귀주 생활은 이제까지의 자신과 결별하는 문제와 상관되어 있습니다. 이를 간단히 의식주 문제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주거 문제. 당시 중앙 정계의 입장에서 보자면 변방중의 변방에 불과한 귀주성 용장엔 역승 따위를 위한 관사가 따로 없었습니다. 양명은 일단 자신의 주거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용장 사람들은 혈거(穴居) 생활을 하고 있어서, 양명도 용장 북쪽 용강산(龍岡山)에 동굴 하나를 차지(!)하게 됩니다. 양명소동천(陽明小洞天). 스스로 당호도 짓고(양명동 귀주 소재 동굴형 펜션) 주민 등록도 한 셈입니다.(이후 이 주위와 인근 지역에는 ‘양명의 양명에 의한 그리고 양명을 위한’ 각종 공간들이 신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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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동 귀주 소재 동굴형 펜션

먹는 문제는 더욱 시급했습니다. 그런데 양명을 수행하기 위해 따라 갔던 세 명의 하인들은 귀주의 풍토와 날씨 등에 병이 납니다. 지역 전체가 카르스트 지형의 습곡 단층인 귀주에서는 물 역시 몸에 탈이 나는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사실 중국처럼 큰 나라에서 먼 지역으로 유배를 보낸다는 것은 여러 풍토병에 노출시키는 것이고, 그 자체를 하나의 형벌로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21세기의 우리 현대인들은 먹고 자는 문제를 그다지 생존의 영역에서 어려운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근대 이전에는 삶과 죽음의 문제가 생각보다 매우 밀접했고, 죽음은 삶과 나란히 있었습니다.

연보와 행장에 따르면, 양명은 향수병과 풍토병 등으로 지치고 쓰러지는 하인들을 위해 스스로 나무를 하고 밥을 지었으며 심지어 시를 지어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양명의 이런 모습은 정말 많은 것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사대부 유학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뜨려주기 때문인데, 그러면서 양명은 조금씩 조금씩, 저는 이 지점에서 한 번 더 놀라게 되는데요, 양명은 자신이 속하게 된 변방의 보잘 것 없는 소수민족 코뮤니티와 ‘관계’를 만들어갑니다. 양명의 슬기로운 유배 생활!

<주역> 49번째에 택화혁(澤火革)이라고, 근본적인 변혁 혹은 혁명을 가리키는 혁명(革)의 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여섯 번째 효(상육)에는 군자는 표변(豹變)하고 소인은 혁면(革面)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군자는 표범이 털갈이를 하듯 일신하여 변모하고 소인은 겉모습(보이는 면)만 바꾸는 변화를 한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군자의 표변을 소인의 혁면에 대비해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혁괘의 제오효(구오)에는 호랑이의 변모가 나옵니다. 대인호변(大人虎變) 미점유부(未占有孚). 대인은 호랑이가 털갈이를 하듯 변한다, 점을 치지 않아도 믿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표범보다는 당연히 호랑이가 더 좋은(!), 더 좋다는 건 변화에 있어 더욱 근본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간단히 도식화하면 호변(대인) > 표범(군자) > 소인(혁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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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변과 표변과 혁면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TV나 영화 등에서 보는 호랑이와 표범의 차이처럼 알 수 있을까요. 아마도 삶에서 이들을 놓고 호변과 표변 혹은 혁면을 외적으로 구별할 수는 없을 겁니다. 실제로는 소인의 혁면이 가장 그럴듯한 근본적 변혁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향원(鄉愿)과 광자(狂者)처럼 말입니다.

향원은 세상과 두루두루 잘 화합하여 딱히 지적하려해도 지적할 게 없는 사람입니다. 하여 얼핏 보면 성인과 흡사(似)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세상에 아첨하는 인물들일 뿐입니다. 비슷하지만 가짜(사이비)입니다. 이에 반해 광자는 가짜 같지만 진짜입니다. 왜냐하면 광자는 비록 성인의 도에 합치하지는 못하지만, 그래서 때론 울퉁불퉁 삐쭉삐쭉 모난 것처럼 세상과 충돌하는 것 같지만, 그 근본에 있어서는 성인의 도에 대해 스스로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호변이든, 표변이든, 혁면이든 아니 대인인가, 군자인가, 소인인가 하는 것은 외적인 표징이 아닐 것입니다. 본인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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