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심(강감찬 글쓰기학교)

‘잠 못 드는 이에게 밤은 한없이 길며/지친 이에게 길은 멀고도 멀다/바른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이에게/생사의 길은 어둡고 아득하여라’

(『낭송 금강경 외』법구경편, 신근영 풀어읽음, 북드라망, 165쪽)

이 짧은 시에 철학이라고 할 만 것이 없이 살아온 내 모습이 보인다. 삶의 고비마다 터득한 지혜라는 것이 성실하게, 착하게, 가족을 위해, 아니면 누군가의 좋은 말을 이정표 삼아 따라 해보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반복하면서 기둥에 묶인 개가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같은 실수를 숱하게 저지르며 한치 앞도 나아가지 못하는 삶이었다.

무엇보다 그 모든 탓을 외부에 돌리며 내가 얼마나 애쓰고 노력하며 사는지에 대한 변명으로 면죄부를 받으려고 했다.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으로 타인으로부터 이해받을 수는 있어도 나 스스로의 불만족과 멈추지 않는 의구심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만족을 주입하며 체념하는 것도 미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붓다께서는 눈 먼 거북이가 백년에 한번 바닷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다가 물위를 표류하는 구멍 뚫린 나무와 만날 수는 있어도, 어리석은 범부가 잠깐이나마 사람의 몸을 받아 이생에 태어난 것은 그것보다 어렵다는 비유를 하신다. 지금 이 생이 다시 오지 않을 특별한 순간이며, 어쩌면 긴 윤회의 기다림 끝에 간절히 기다렸던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찰나(刹那)의 변화에 늘 깨어있으라.

“형상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의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야 하느니라. 왜 그렇겠느냐. 일체 의 진리라는 법은 꿈, 환영, 물거품, 그림자 같으며 이슬 같고 또한 번개 같으니, 반드시 이와 같이 보아야 하느니라.” (앞의 책 222쪽)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로병사의 고(苦)가 시작된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욕망은 증식되고 잠깐의 즐거움 뒤엔 길고 깊은 괴로움이 따라 온다. 물질, 느낌, 생각, 의지, 마음이 무상함을 바르게 관찰하면 떠날 마음이 생기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번뇌에서 해탈하게 된다. 만물은 집착할 실체가 없는 공(空)이며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나(我)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고를 멸하는 방법이다.

독립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상호의존해서 발생하고 소멸한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는 것이니 연기(緣起)된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존재의 자리는 비어있지만 오히려 인연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것, 공은 오히려 엄청난 파동으로 꽉 차 있으며 흔들리지 않는 잠재상태라고 할 수 있다. ‘진흙에 때 묻지 않는 연꽃처럼’ 세속의 욕망이라는 번뇌에 붙 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금강경을 수십 번 반복해 보고서야 조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돼서 나의 머리 탓도 해보았지만, 그 원인은 본능적으로 ‘나’를 모든 것의 중심에 두는, 아상(我相)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문제였다. 금강경이라는 번개를 맞고 끊어져야 하는 것은 나와 대상 사이의 집착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어야 했다. 인연 속에서 존재하는 나’만 있을 뿐, 그러므로 무아(無我), 무상(無想)은 덧없음 허무와 같은 뜻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생즉멸(生卽滅)하므로 찰나(刹那)의 변화에 늘 깨어있으라는 것이다.

불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평범한 일상에 깃들어 있는 인연들이 소중하게 느껴졌고, 내가 만드는 인연이 연기되어 흘러감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많은 순간 무엇이 선한 행동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좋은 일이 누군가에게 아픔이 되지 않길 바라게 되었으며, 가끔 어렵고 불편한 일이 생겨도 내가 할 수 있어서 내게 온 인연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 일에서 ‘배운 것이 있으면 되었다’고 생각하니 괴로운 마음도 덜어졌다.

게으름 피지 말고 정진하여라

한번 깨우친 마음이 항(恒)심을 유지해주면 좋으련만, 이 마음이라는 것이 가벼워서 잡기가 어렵고, 한 생각에 붙들리면 망상으로 치닫기도 한다. 어리석고 무지하고 탐욕스러워 싸움터에서 수많은 적을 상대하는 것보다도 어렵다.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승리자는 붓다처럼 선험적으로 타고난 비범한 분들이라야 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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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붓다께서 세상에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 “게으름 피우지 마라. 나는 오직 게으름 피우지 않음으로서만 홀로 바른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방일치 말고 정진하여라.” 예상치 못한 인간적인 면모에 친근감마저 든다. 종잡을 수없이 어렵던 금강경을 읽으며 깨달음의 비법을 전수받으려고 했는데 이미 아는 답인 것도 같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방법을 말씀하신다.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 된다고. 죽을 때라도 철들면 좋은 일 아니겠냐고. 머리나 몸에 붙은 불을 끄듯이 부지런히 수행해야 한다고.

나도 이제 천리마가 하루에 가는 길을 조랑말의 걸음으로 열흘이 걸리더라도, 타고난 천재는 한 번에 해내는 일을, 어렵고 힘들게 열 번, 백 번을 해야 하더라도 그 길을 가고 싶어졌다. 더 이상 빠른 도착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것은 다 이별하기 마련이다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한 여름에도 한기에 떨었던 시간이 있었다. 행복하고 고마운 날들이 한순간에 모두 과거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다시는 같은 시공간에 있을 수 없다는 절망과 단절의 충격이 생각보다 컸다. 비어 있는 그 존재의 자리는 죽음 이후에도 천지에 꽉 차 있는 느낌이었다. 그가 간 곳이 어디인지 몰라서 더 슬펐다.

혜능 대사가 돌아가시기 전 문인들을 불러 작별을 고할 때, 오직 한명의 스님만 울지 않았다. 혜능 대사가 이를 보고 “신회는 나이가 어리지만, 좋고 나쁜 일에 평등함을 얻어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를 못하구나.”(앞의 책, 142쪽) 하였다. 삶과 죽음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살아도 죽은 것처럼 살며 같은 모습으로 윤회를 반복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죽음으로 속세에서의 할 일을 마치고 마침내 무거운 짐을 벗고 해탈한 이도 있으니 죽음이 꼭 슬퍼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슬픔이라는 것도 남은 이의 욕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친구와 뒤늦은 작별의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예외 없이 멸(滅)의 순간은 온다. ‘죽음’ 글자 앞에 서 보니, 물질에 대한 집착도 미움과 질투 다툼도 다 부질없어 보인다. ‘죽음’이 나와 내 주변에만 예외일 수 없고 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한순간도 허투루 보낼 수 없게 되었다. 나에게 내일이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원래부터 내 것이란 것이 있을까? 죽을 때 내 것이라고 집착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의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으며, 모든 티끌마다 또한 그러하네. 헤아릴 수 없이 먼 시간도 곧 한 생각이며, 한 생각이 곧 헤아릴 수 없이 먼 시간이니”(앞의 책, 223쪽) 나 또한 이 우주 속에 하나의 티끌에 지나지 않지만, 내가 만드는 인연이 또 우주로 이어진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갑자기 아무것이 되는 순간인 것 같다.

이제 붓다의 가르침을 봇짐에 담고 길을 나선다. 정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와 깨달음이 있는 ‘지금 이곳’이 열반이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면서 우주의 티끌로 돌아갈 때 까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정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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