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연(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조선 중기, ‘삼가례三加禮’라는 의식이 있었다. 일종의 성인식이다. 축문을 읽으며 관을 씌워 주고, 제사를 올려 복을 이루게 하고, 이름을 새로 지어 주었다고 한다. 조선선비들에게 이름이 여러 개였다는 이야기는 일전에도 한 적이 있는데, 이때 그 중 하나의 이름을 새로 얻는 것이다.

이 성인식이 끝나면, 아명兒名을 버리고 다른 이름인 ‘자字’로 살아간다. 삼가례를 치를 때는 관자冠者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친구 중에서 덕망 높은 분을 빈賓으로 모셔서 절차를 진행한다. 집안끼리 관계도 있고, 꽤나 신뢰가 있는 사람이 빈賓이 되었던 듯하다.

중관仲觀이 성인식을 치렀을 때 계우季雨의 아버지가 빈賓으로 초대되었다. 그 정도로 두 집안은 각별한 사이었다. 그런데 중관仲觀이 돌연! 계우季雨와 절교(!)를 선언한 것이다. 집안끼리의 오랜 인연을 무시하고, 심지어 아버지와 형이 죽어 천의고아가 된 계우季雨와 절교한 것. 이때 연암이 중관仲觀에게 편지를 보낸다.

  내 듣건대 그대가 계우季雨와 절교했다고 하니 이 무슨 일이지요? 계유가 어질다면 절교해서는 안 되는 거고, 만약 불초하다면 그대가 바로잡아 주지 못하고 마침내 대대로 맺어 온 집안의 친분을 저버리는 것이니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어진 이와 절교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요 불초한 사람을 바로잡아 주지 않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니, 그 시비곡직을 가리려 들진대 고을과 이웃의 부형들의 여론을 기다려야 할 것이 아니겠소. 상서로운 일을 저버리고 어진 일을 포기한 것은 그 책임이 그대에게 있다고 나는 생각하오.

(박지원 지음, 「중관仲觀에게 보냄」,『연암집(중)』, 돌베개, 392쪽)

연암의 논리는 매우 간단하다. 친구가 어질면 계속 친구를 하는 것이 당연 좋은 것이고, 친구가 어질지 못하다면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어짊(仁)을 행하는 것이다. 벗과 관계를 끊는다는 건 어떤 경우든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무능력을 증명하는 일인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어질다라는 말이다. 이 말 때문에 이렇게 간단한 연암의 논리가 아~주 복잡하게 느껴진다. ‘인仁’을 기준으로 믿고 벗하고, ‘인仁’을 기준으로 친구를 바로잡아주기도 하는데, 도대체 이란 뭐란 말인가?

내가 생각하는 은 ‘나에게 좋은 것(善)을 행하는 것이다.’ 즉, 매순간 나의 선善을 발휘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보자면, 스스로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것,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덜 힘들었으면 좋겠는 것, 맛있는 건 나눠먹는 게 좋은 것, 뭐 이런 것들이 나에게 마땅한 일로 여겨진다. 사회의 도덕적 문제를 떠나서 나는 누구나 이런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선의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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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친구의 선의가 ‘선善 혹은 인仁’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답답하고 서운하다. 사이가 밀접해질수록, 동선이 겹칠수록 이런 마음이 더 올라온다. 이 마음을 느낄 때마다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다. 또, 친구는 스스로 저 행동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지, 그 부분을 의심하게 된다. 내 세계의 ‘선善’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 각자의 ‘선善’이 다르다고, 각자 스스로의 선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참 어이가 없다. 그냥 나의 ‘선善’을 강요하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또 그래선 안 될 것 같다. 사람사이에 강요라니! 이건 말도 안 돼!

그래서였을까? 연암의 말 중 나에게 걸렸던 것은 바로잡아준다는 표현이다. 친구사이에서 이 말이 너무 오만하게 들린다. ‘어질다仁’는 것은 ‘선善’처럼 각자 자신의 어짊이 있는데! 각자의 상황과 맥락 위에서 가장 어질다고 생각되는 것을 행하고 있을 텐데! 중관仲觀는 중유대로, 계우季雨는 계유 나름의 어짊을 행하며 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각자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개성을 존중하듯, 존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내 ‘선善’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가? 각자의 ‘선善’을 존중해야하는 건 아닌가? 이 물음은 도덕적으로 잘라낼 게 아니었다. 우리는 물론 각자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 세계가 분리된 단독의 세계는 아니다.

‘바로잡아준다’는 것은 내가 고쳐주겠다는 오만한 마음이 아니었다. 친구에게 개입하고 싶다는 의지였다. 연암은 그 지점을 나무라고 있다. 이 마음을 내지 않는 건, 벗으로써 도리를 다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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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인함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친구가 내가 생각하는 인함으로 살고 있지 않다면, 관계를 끊을 것이 아니라 ‘바로잡아야’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나의 ‘인仁’이 바로잡힐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내 세계의 좋음을 어필해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에는 전제가 있다. 서로 ‘벗’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 위에서 이런 시도가 가능한 것이다.

나는 나의 선을 선이라고 무한어필해보지도 못했고, 친구의 선의를 ‘선善’이라고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어필할 힘도 부족하고, 받아들일 아량도 부족하다. 어떤 방향으로든 길을 내야한다.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 위에서는 ‘강요’가 아니라 ‘어필’이 된다(고 믿는다). 매력적으로 어필해보기 혹은 받아들이기. 이 둘이 아니면 나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길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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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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쩡하오
Guest
쩡하오

“서로 ‘벗’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 위에서 이런 시도가 가능한 것이다.”
이 한 문장이 크게 울리네요.
함께 하고 싶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민들이란 생각도 듭니다.

그나저나 연암으로 글쓰기 진짜 머슀네요~!
크으으~~~!!
^^

재훈
Guest
재훈

공감되는 글, 제게 필요한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