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영 (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연암이 현감생활을 한지 어연 10년, 환갑이 다 된 연암을 기다리는 건 퇴직도 아니요, 승진도 아닌 비방이었다. 연암이 고을을 너무도 잘 다스린 나머지, 그걸 질투한 옆 마을 사또가 ‘연암이 되놈의 옷을 입고 백성을 대한다’고 소문을 낸 것이다. 연암은 청나라 옷을 입지도 않았고 원나라 풍습으로 물들여지기 이전의 옛 옷을 입었을 뿐인데 말이다.

소문은 금세 서울까지 퍼졌고, 이 기세를 타 연암에게 글 피드백을 받다가 사이가 틀어져버린 유한준은 나온 지 20년이나 지난 열하일기를 ‘오랑캐의 칭호를 쓴 원고’라고 비방을 퍼부었다. 정조가 당대 문체가 문란하다며 ‘열하일기’를 배후로 지목하며 문체반정을 일으킨지도 10년이 되었으니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었다. 심지어 문체반정 당시에 정조는 연암이 반성문을 쓰면 천거하겠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쳤고, 벌이 아니라 은총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이 뒷북은 날개달린 듯 조선에서 핫이슈가 되었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분위기였던 조선에서 이 두 소문은 연암의 안위를 꽤 위험하게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비방을 받는 것도 충분히 괴로운데, 자신이 하지 않은 일들에 허위와 과장이 붙어 비방을 받는 일은 얼마나 속이 터지고 억울할까. 그런데 이 시끌시끌한 소문과 비방에 연암은 꽤 초연하다. 처음 자신의 복장에 대한 소문이 퍼졌을 때는 그저 웃어 버리고 말일이라며, 남들에게 이러니 저러니 변명하지 말라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당부하는 연암. 열하일기로 또 한 바탕 비방이 커질 때도 이렇다 할 해명 하나 없이 묵묵부답이다. 연암이 이토록 입을 다물고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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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가지 단서가 있다. 연암은 자신의 처남이자, 지기였던 이중존에게 이 소문의 연유에 대해 편지 답장으로 이야기한다. 그 속에서 연암은 ‘오랑캐의 칭호를 쓴 원고’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연호’를 가리키는 거라면 말이 안되고 ‘지명’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토지문서조차도 당대의 연호를 써야 성립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춘추』를 대의 삼아 비방하는 자들이 살 수 있는 조선 땅은 남아나지 않는다. 거기다 ‘열하’라는 지명을 쓴 것이 문제라면, 중국의 역사서에 지워야 할 지명이 수두룩 빽빽하다. 연암이 입을 다문 이유는 단지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격을 막을 필요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연암은 이렇게 헛발질하는 사람들이 안쓰러웠는지 자신을 책하려면 이정도는 되야 하지 않겠냐고 모범책망안까지 제시해준다.

그대는 나를 대신하여 지금 『춘추』를 배우는 이들에게 말 좀 해 주지 않겠소? 왜 나를 이렇게 책하지 않느냐고 말이오.

“그대가 전번에 유람한 곳은 바로 삼대 이래의 성스럽고 영명하신 제왕들과 한(漢)·당(唐)·송(宋)·명(明)이 영토로 삼은 땅이오. 지금 비록 불행하여 되놈들이 차지하기는 했지만, 그 성과 궁실과 인민들은 물론 그대로 남아 있고, 정덕(正德)·이용(利用)·후생(厚生)의 도구들도 물론 그대로 있고, 최(崔)·노(盧)·왕(王)·사(謝)의 명문씨족들도 물론 그대로 있고, 곽·낙·민·건의 학문도 물론 사라지지 않았소. …(중략)…

그렇다면 그대는 왜, 예로부터 본래 지녀 온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 중국의 존숭할만한 관례와 업적을 모조리 터득해 가지고, 돌아와서는 책자로 모조리 저술하여 온 나라에 쓰이게 하지 않소?…(중략)…”

이런다면 듣는 사람이 어찌 등골이 써늘하고 입이 벌어지며 부끄럼을 못 견디어 죽고 싶지 않겠소?

( 박지원, 『연암집』(상), 「이중존에게 답함 3」, 돌베개, 282~283쪽)

연암은 단지 남을 욕하기 위해서 하는 비방은 상대를 당황스럽게만 할 뿐, 정말 쓰잘데기가 없다는 것을 묵묵부답으로 몸소 보여줬던 게 아닐까. 그래서 연암은 『춘추』를 배우는 이가 겉으로 드러난 말만 기준으로 삼아 비방하지 말고, 적어도 춘추에 담긴 의미는 알고 말하라고 오히려 침묵을 지켰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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