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니체] 청년과 에로스 - 3)

근영(남산강학원)

학교, 거세를 위한 거대한 공장 - 길들이다, 병들게 하다.

우리는 믿는다. 학교를 통과하면, 그 공부를 해내면 좀 더 나은 인간이 될 거라고. 그래서 그 지루하디 지루한 학교 공부를 참고 견딘다. 좀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될 거라는 기대와 함께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묻지 않았다. 좀 더 나아지게 되는 그것이 무엇인지, 대체 무엇에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인지. 우리는 그 ‘무엇’이 무엇인지는 접어놓은 채, 앞을 향해 냅다 달리기만 한 것이다.

니체는 우리를 멈춰 세운다. 멈춰 세우고, 우리가 빈칸으로 남겨 놓은 그 ‘무엇’의 정체를 보게 한다. 그것이 ‘노동’,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돈’이라는 것을. 정말이지 학교는 우리를 좀 더 낫게, 좀 더 능력 있게 만들어 준다. 단, 자기 존재가 아닌, 돈에! 근대 학교는 노동에 대한 능력이 존재의 탁월함을 보장한다는 듯 군다. 스펙의 증대가 곧 인간의 개선이라는 듯 말이다.

하지만 근대 학교의 개선 과정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점점 더 엇비슷해진다. 들쭉날쭉한 개별 존재의 유일무이성을 무시하고, 모두를 평균성의 틀 속에 우겨넣기. 이것은 맞지도 않는 신발에 발을 구겨 넣는 꼴이다. 신는 사람도, 신게 하는 사람도 괴롭기는 매한가지다. 그럼에도 근대의 교육제도는 이것을 인간의 개선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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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개선(!) 과정은 존재적 독특성을 지우고 구별 불가능한 존재들을 길러낸다. 말이 좋아 ‘길러냄’이지 그 길러냄이란 곧 ‘길들이기’다. 당근과 채찍을 동원해 주인의 말을 잘 듣도록 동물을 길들이기. 그렇게 길들여진 야생동물들은 농사일에, 공사판에, 전쟁터에 쓸모 있는 짐승이 된다. 우리 역시 그렇게 길들여진다. 존재적 독특성을 잃어버린 채, 공장에서, 회사에서, 국가에서 유용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과연 더 나아진 거라고, 능력이 커진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짐승을 길들이는 것을 ‘개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귀에는 거의 우스갯소리처럼 들린다. 동물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곳에서 야수들이 과연 ‘개선’되는지 의심할 것이다. 야수들은 그곳에서 약화되고 무해하게 만들어진다. 공포감에 짓눌리고 고통, 상처와 기아에 시달리면서 병약한 야수가 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중, 「인류를 ‘개선하는 자들’」, 박찬국 역, 아카넷, 79쪽)

그렇다. 우리는 학교를 통해 ‘개선’된다. 해서 우리는 존재의 고양을 위한 시간 따위는 사치로 치부하고, 대신 더 많은 스펙을 위한 자기 계발에 열을 올린다. 때로는 사회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지만, 우리는 불평불만을 그저 불평불만으로 끝낼 줄 안다. 사는 게 숨이 턱턱 막혀도 나 하나 싸운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는 체념의 능력을 발휘하며, 우리 존재를 노동에, 자본에, 사회에 기꺼이 내어준다. 그렇게 우리는 “약화되고 무해”한 존재가 된다.

물론 이런 개선작업에는 약간(?)의 부작용이 있다. “공포감에 짓눌리고, 고통, 상처와 기아에 시달리며 병약해진다”는 것. 하지만 어쩌랴, 인간이 개선되려면 그로 인한 불안과 분노, 그리고 허무에 시달리는 것 정도는 견뎌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우리는 말하는 거 아니겠는가. 좋은 대학, 좋은 직업만 가지면, 장한 놈, 기특한 놈이라고. 그 장한 놈, 기특한 놈의 속이 어떻게 썩어 문드러졌는지는 상관없이 말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 잔혹한 길들이기를 계속하게 될까. 길들여진 야생동물…동물원 우리 안을 뱅뱅 돌기만 하는 늑대들,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동물원 철장에 제 몸을 부딪치며 자해하는 곰들, 동물원 사파리에서 권태롭게 누워있는 사자들, 수족관이나 쇼장에서 제 수명의 반도 살지 못하고 죽어 버리는 돌고래들, 혹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무기력하게 손님을 실어 나르는 코끼리들…한없이 쪼그라든 생명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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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교육, 이 사이비 교양 교육 속에서 근대인들의 삶은 시든다. 존재적 독특성을 실현코자 하는 우리의 근본적 욕망은 잠들고, 탁월함을 향한 길은 왜곡된다. 요컨대, 힘에의 의지는 약화되고 병들어 버린다! 해서 우리는 배우면 배울수록 자기 존재에 무능력해진다. 삶에 무기력해진다. 거세를 당한 동물처럼, 자기 존재에 대한 창조적 힘을 잃어버린다.

그곳에 남는 것은 한없는 자괴감과 허탈감, 감당할 수 없는 분노와 쾌락 속을 떠도는 삶뿐이다.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라는 질문이 엄습하곤 하지만, 우리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듯 그 질문을 덮어 버린다. 자기 삶을 창조하는 힘을 거세당한 우리는 삶의 다른 길을 열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을 해치는 그 일들을 열성적으로 다시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병든 생명이 아닐까. 근대 교육, 그것은 생명을 병들게 하는 과정이다. 거세를 위한 거대한 공장이다!

거세 장치로서 ‘학문’

  독일의 ‘상급 학교들’이 사실상 행하고 있는 것은 잔인한 길들이기로서, 그것들은 최대한 짧은 시간에 수많은 젊은이들을 국가가 이용할 수 있고 착취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중, 「독일인들에게 부족한 것」, 박찬국 역, 아카넷, 92쪽)

니체가 본 19세기 말 독일의 교육 기관, 특히 고등 교육의 실상. 그것은 “잔인한 길들이기”, “착취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두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있다.

착취할 수 있는 인간, 그것은 간단히 말해 노예다. 그리고 노예에게 생명력이란 걸 그치는 것일 뿐이다. 아니, 넘치는 생명력은 노예에게는 악덕이다. 노예의 덕은 숙달된 손과 발, 혹은 숙달된 지식체계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생각 없이 일을 하는 능력이다. 이런 노예 상태를 얼씨구나 좋다고 받아들일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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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근본 욕망, 그것은 힘에의 의지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런데 근대는 교묘한 기만책으로 스스로 노예가 되는 길을 욕망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학교라는 제도로.

그렇다면 근대 교육은 대체 어떤 수단을 가지고 이와 같은 가치의 전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강압적인 폭력을 동원해서? 아니면 어떤 이데올로기 같은 것을 주입해서? 아니다. 그 정도로라도 솔직하면 근대다운 기만성이 아니다. 근대가 자신들을 위장하고 노예들을 길러내는 수단은 ‘학문’이다. 학문이라니 뭔가 생뚱맞게 들리지만, 니체는 그 ‘학문’이라는 것이야말로 근대의 기만성이 꽃 피는 곳임을 본다.

학문, science란 근대의 문을 연 새로운 앎의 방식이다. 그러니까 학문은 탐구의 구체적 내용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를테면 객관성이라든지 합리성이 그 방법들이다. 해서 어떤 내용을 다루건 그것이 학문의 방법을 따르고 있으면, 그것은 하나의 학문이 된다. 가령 자연과학뿐 아니라, 사회학이나 인문학도 학문의 방법론을 쓰게 되면 사회과학, 인문과학이 되는 것이다. 하여 학문은 ‘무엇’을 배우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배우는지의 문제다.

니체가 주목하는 지점은 바로 그 ‘어떻게’다. 학교를 통과하며 무엇을 배웠는지는 몽땅 다 까먹어도, 그 ‘어떻게’만은 우리에게 남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지불식간에 우리 몸에 새겨지게 되고, 우리는 그 방법을 삶에 그대로 적용하게 된다. 해서 학문의 방법이 곧 삶에 대한 태도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문이 내세우는 그 방법들은 우리 몸에 어떤 것을 새기는 것일까. 객관성,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사상의 자유라는 명분으로, 혹은 내면적 존재라는 전제로 학문이 만드는 삶의 태도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 니체가 찾은 답, 그것은 자기 삶을 노예로 대하는 태도, 자기 존재를 약자로 만들어가는 길이었다. 한마디로 학문, 그것은 거세를 위한 핵심 장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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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이러한 작동방식은 3부에서 좀 더 세세하게 살펴보겠다. 여기서는 한 가지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기나긴 학교생활을 거치면서 누구나 한 번쯤 가져봤던 그 질문. 왜 일상에는 하등 쓸모도 없는 이런 과목들을 배우는가.

거기에는 우리의 착각이 있다. 학교가 그 내용들을 가르치려 했던 것이라는. 하지만 그것은 그저 구실에 불과할 뿐. 우리가 내용들에 온통 집중하는 동안 실제로는 우리의 몸과 마음 깊은 곳에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들이 새겨지고 있던 것이다. 아무런 저항감도 없이, 무의식중에 새겨지는 삶의 길. 우리는 그렇게 약자가 되는 법을 배워왔다. 그 쓸데없어 보이는 과목들이 가진 진짜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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