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연(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어렸을 적부터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을 아주 좋아했었다. 봉제공장 30년 경력의 미싱전문가, 어느 시장의 어묵의 달인, 옻독에 꿈쩍도 하지 않는 옻칠의 달인, 택배박스 쌓기의 달인 등등. 크던 작던 한 분야에서 뚝심 있게 몇 십 년을 일하고, 그렇게 자신들만의 노하우를 쌓아가는 그들의 삶이 너무나 멋져보였다. 그렇게 생긴 굳은살이 얼마나 내공 있어 보이던지! 이때부터 내 꿈은 오랜 시간을 통과하여, 자신의 일에 능통한 “장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꿈을 안고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고, 나의 분야에서 이런 삶을 살아내려 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던 어느 날, ‘이것만 하다가 죽으면 어떡하지?’라는 이상한 두려움이 찾아왔다. 평생 이거 하나 밖에 할 수 없을까봐 겁이 나기도 하고,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이렇게 살다 가기엔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따금 이런 생각이 들다가도 ‘하나라도 잘하는 게 어디야? 이거 하나 잘 하기도 힘든데…’라며 생각을 제자리로 돌려오곤 했다.

  아무리 작은 기예라 할지라도 다른 것을 잊어버리고 매달려야만 이루어지는 법인데 하물며 큰 도道에 있어서랴.

(박지원 지음, 「형언도필첩서」,『연암집(하)』, 돌베개, 81쪽)

이 대목을 읽다가 “장인”에 대한 로망이 떠올랐던 것이다. 맞다, ‘생활의 달인’ 속 장인들이 정말 이러했다. 자신의 일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것을 잊고 몰두했다. 그렇게 그들은 ‘달인’이라 불릴 만큼의 경지에 올랐다.

‘생활의 달인’들이 근기根氣로 무언가를 이뤄냈다면, 연암의 이야기 속에는 근기에 살짝의 똘끼(?)가 더해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글씨장인 최흥효崔興孝, 그림장인 이징李澄, 소리장인 학산수鶴山守. 이 세 사람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글씨장인 최흥효崔興孝는 과거시험을 보러갔다가 시험지에 자신이 써내려간 글자 중 한 글자가 왕희지의 필체와 비슷하여, 시험을 포기하고 그 종이를 품에 간직한 채 돌아왔다. 과거진출보다 잘 쓰여 진 이 글자 하나가 더 소중했던 거다.

그림장인 이징李澄이 어릴 때, 다락에 숨어 몇날며칠 그림을 그리다가 마침내 발견되었다. 부친이 노해 호되게 혼을 냈는데, 이징은 회초리를 맞으며 흘린 눈물을 모아 또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쯤 되니 사알…짝 무서워진다. 집중이 아니라 집착 수준이 아닌가!

소리장인 학산수鶴山守는 산 속에서 수련을 하였다. 한 가락을 부를 때마다 나막신에 모래를 던지고, 나막신에 모래가 가득 차야지만 돌아왔다고 한다. 학산수는 도적을 만나 결국 죽음에 이르렀는데, 도적들도 그의 노래에 감격했을 정도라고 한다. 자신의 생사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소리 수련에만 몰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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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사람은 자신의 이해득실, 치욕, 생사를 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한 사람들이다. 글씨를, 그림을, 소리를 매일매일 수련한다.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다른 것에 마음을 내어주지 않으며! 연암은 말한다. “아! 이것이 바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것이로구나.”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더라도 이렇게 산다면 여한이 없다. 연암은 이러한 밀도 있는 삶을 긍정한다.

하지만 단순히 밀도 높은 삶을 살라는 건 아니다. 글씨장인, 그림장인, 소리장인 이 세 사람처럼 사생死生과 영욕榮辱의 분별을 잊어버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다시 말해 어떤 하나에 미쳐 살고, 몰두해서 사는 삶만을 바라보라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중요한 전제는 “내적인 면에 오로지 마음을 쓰는 것”, 그리고 “육예(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속에서 노니는 것”이다. 지금 몰두해있는 이것이 나의 내적수양과 함께 가는지, 육예六藝를 통해 배운 것에서 어긋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며 가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질주, 전문가들의 사회는 연암이 긍정하는 밀도 있는 삶과 그 결을 달리한다. 여기에는 내적수양도 자기점검도 없다. ‘장인’을 꿈꾸며 일을 하다가 문득, ‘이것만 하다가 죽으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 나를 찾아왔을 때, 그때가 내가 내적수양을 놓친 때였다. 그 순간 멈춰 서서 점검하면 된다.

그리고 연암은 나아가 그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을 수 있는 경지’를 향해 나아가라고 말한다. 내가 신발을 신고 걷고 있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신발과 하나가 된다면, 물고기가 큰 바다 속에서 유영하듯 큰 도道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다고. 그 때에는 ‘작은 기예’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기예’를 통해 더 넓은 도道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아니, 그 세상은 이미 큰 도道의 세상인 것이다. 이 자유로운 삶의 경지가 연암이 보여주고 싶었던 참眞장인의 세계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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