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4. 귀주… 어서와, 유배는 처음이지? - 괴상하고 쌩뚱맞고 지각불가능한

문리스(남산강학원)

깨달음 vs 꽤 다름 - 어느 위대한 깨달음에 관한 단상

용장대오(龍場大悟)라는 말이 있습니다. 왕양명이 용장 땅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용장은 양명학의 출발점입니다. 좀 오버해서 양명학의 성지(聖地)라고 해도 좋습니다. 실제로 귀주나 여요(양명 고향) 등을 갈 때 제 마음이 그랬습니다. 귀주 수문현의 양명 흔적들(완역와, 양명동, 하루헌 등)을 찾아갔을 때 말입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어딘가에 오백년 전 양명 선생이 서있었다는 생각. 양명 선생이 보고 만지고 냄새 맡았을 용장의 하늘과 바람과 나뭇잎들을 지금 내가 만지고 냄새 맡고 있다는 흥분. 팬심 작렬. 샤오싱의 양명 묘지와 여요의 양명 고택에서도 그랬습니다. 양명이 최후 출정을 나서기 전 걸었을, 고제자 전덕홍, 왕기 등과 마지막 문답을 나누었던 벽하지(碧霞池) 일대를 걸으면서 오백년 전에도 있었을 그 무엇인가와 섞이고 싶다는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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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 선생이 보고 만지고 냄새 맡았을 용장의 하늘과 바람과 나뭇잎들을 지금 내가 만지고 냄새 맡고 있다는 흥분. 팬심 작렬.

용장 생활이 양명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사건인 것은, 양명 문도가 아니더라도 대체로 인정하는 통설입니다. 하지만 용장의 중요성은 단지 그 깨달음이라는 사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대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많은 연보와 행장, 기타 양명 관련 전언들은 용장에서의 깨달음이 어느 날 밤 석관(石棺)에서 갑자기 이뤄졌다고 진술됩니다. 돌연한 깨달음, 이랄까요. 깨달음이 도둑처럼 온 겁니다. 여러 곳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사실일 듯합니다.

그런데 이 날은 정확히 언제일까요? 몇 월 며칠 아니 무슨 달 무슨 날이었을까요. 연보 등을 통해 확인되는 양명의 용장 생활은 정덕 3년(1507) 봄부터 정덕 5년(1509) 봄까지 만 2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2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유형 1. 이러이러했던 사람 A가 ‘어느날 갑자기’ 저러저러한 사람 B가 되었다. 보통은 이런 공식입니다. 멋진 이미지인데, 어쩌면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양명은 어느 날 갑자기 석관 앞에서 깨달은 게 아닐 거란 뜻입니다. 요컨대 용장에서의 두 해 전체가 양명의 그 어느 날인 것입니다.

용장에 이르기까지 양명은 1년여의 유배행 이동 모험(?)을 거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미 과거로부터 큰 단절이 있습니다. 한족 사대부 가문의 장자이자 회시 합격자로서의 영예 혹은 가문의식, 정치 중심지 북경에서의 관료 생활, 자부심과 공명심과 사명감, 시와 문장 등을 좀 쓸 줄 아는 지식인들과의 교유 및 영향력 등등. 아마도 이런 것들로부터 한순간에 밀려난 자신의 처지를 때로는 비통해하고, 원망도 생기고, 자책도 해보고, 분노하기도 하고, 자조도 합니다.

그리고 용장에서의 모든 것은, 양명으로선, 어제까지의 모든 것의 ‘바깥'(他; 외부)이었습니다. 용장 생활 자체가 타자였던 것입니다. 타자란 절대적 외부입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이유(합리)가 부정된다고 상상해 보면 됩니다. 이 말은 결국 모든 것 하나하나가 새로운 이유를 가져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이 말이 바로 용장에서 피어오른 양명학의 핵심 테제 ‘마음이 곧 이치'(心卽理)라는 말의 다른 버전인 셈이네요. 말하고 보니 이렇게도 연결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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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크게 보면 사람 A로 태어나 사람 B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또 이것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 A(1)이었다가, A(2)였다가, A(3), A(4), A(5)….., A(n-1), A(n), A(n+1)……이라고. 이때 A(1)과 A(2)는 결국 같은 사람 A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 각각은 다른 존재인 (1)과 (2)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A라고 보는 입장은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A라는 동일자를 보는 입장일 테고, (1)과 (2)…로 보는 것은 그 동일자적 환원을 빗겨가는 차이로서만 존재성을 가늠할 수 있다는 입장일 것입니다.

앞에서 대인의 혁명은 ‘호변’이라고 했습니다. 한 번도 깨달아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 말하기 참으로 어려운 대목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깨닫는다는 말은 대인의 호변 정도에나 어울리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대인은 한 번 호변했다고 마치 호랑이 털가죽 덮어쓴 것처럼 그렇게 호변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매순간 호변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A(1)과 A(2), A(2)와 A(3)… 그 사이 사이가 매번 ‘어느 날 갑자기’ 깨닫는 그 결정적 변곡점들인 것입니다.

말이 자꾸 산으로 가는 것 같은데,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렇습니다. 용장에서의 큰 깨달음이라는 사건은 어느 날 어떤 시각의 특정한 이벤트로서의 어떤 사건이 아니라는 것. 깨달음은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오는 게 아니라는 것. 아니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온다고 할 때에도 그 어느 날 갑자기 오는 도둑은 이미 도둑을 충분히 유혹할 만큼 매혹적인 보물과 분리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 요컨대 거의 완전에 가까운 타자인 용장이, 이제까지의 거의 모든 것을 버린(버릴 수밖에 없었던) 양명과 마주칩니다. 그 순간 이미 양명은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타자와의 만남이 이미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 순간 그 순간 모든 순간들이 타자와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순간, 사이, 혹은 어느 날 갑자기. 이런 말들은 모두 타자와의 마주침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예컨대 양명 이전에도 용장을 다녀간(대부분 유배자로) 중앙 관료들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용장은 깨달음의 조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에게는 용장이 타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돌아가야 할 중심(고향 혹은 중앙정부)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용장에서의 모든 것, 이를테면 묘족 등과의 만남은 그저 미개하고 천한 것들을 참아내야 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용장의 날씨와 각종 동식물들이 그냥 신기하고 이국적인 경험일 뿐입니다. 한 마디로 ‘이 나’와 만나 섞일 이유가 없는 괴물들이었을 뿐입니다. ‘이 나’의 어떤 것도 부정하지 않아도 되는 마주침, ‘이 나’의 합리(이해)로 이해하는 선에서 만들어내는 관계. 그들이 양명과 다른 점입니다.

용장에서 양명은 이제까지의 자신을 넘어갑니다. A였다가 B가 된 셈입니다. 하지만 그 ‘어느 날’ 때문에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용장이라는 타자와 마주치는 2년여의 삶이 양명에게는 모두 그 어느 날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양명은 매순간 양명(a), 양명(b), 양명(c), 양명(d)… 들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11세 때에 자신의 시작(詩作)재능을 테스트해보겠다는 어른들의 사사로운 마음을 시를 지어 통렬히 풍자(!)했던 아이, 12세 때에 자신의 과외 선생에게 독서하는 사인(士人)의 최고 목표는 성인(聖人)이 되는 것에 있다며 뜻을 세우던 아이, 19세 때엔 당시로선 성인되는 공부의 첫 단계이자 기본 과정으로 여겨졌던 주희의 격물치지 공부법을 직접 해내겠다며 일주일간 대나무를 노려보던 돌격대장 같은 청년 왕양명 등등. 이런 왕양명’들’을 하나의 ‘왕양명’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용장대오 이후의 왕양명만 마치 A가 B가 된 것처럼 여기는 것이나, 용장에서의 어느 하루를 A와 B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보는 것에 관해 재고해볼 점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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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의 최후 종지는 양지를 다한다는 뜻의 ‘치양지(致良知)’입니다. 이때 양지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는 것이어서 성인과 범인이 다르지 않고, 옛날 사람과 오늘날 사람이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더구나 양지는, 맹자에서 말하듯,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고(良能) 헤아리지 않고도 알 수 있는(良知)것입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양지의 치(致)란 이러한 양지를 모쪼록 남김없이 발휘한다는 말입니다. 성인의 양지와도 다르지 않고, 옛사람에 비교해 모자라지도 않으니 그저 저마다 자신의 양지를 ‘치’하면 된다는 겁니다.⁴⁾

그렇다면 양지를 치한다는 건, 매번의 ‘치-함’이 이제까지의 나와 달라질 수밖에 없는 치-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나의 치양지함이 어제와 같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A(1), A(2), A(3)…… A(n)이란 말입니다. 매번의 치양지는 그렇게 나를 이제까지의 나와 다른 나로, 하지만 매번의 내 양지를 다한다는 점에서 매순간 최고+최대의 치양지한 나로 살아가게 하는 원리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치양지는 나날이 확대되어가는 이미지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치양지는 결국 나의 양지를 발휘하는 것이므로, 이런 표현이 적당할지는 모르겠지만, ‘본래의 나'(그런 게 있다면)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회복한다는 말은 방금 전의 확대되어 가는 치양지의 이미지와는 달리, 구심적으로 되돌아오는 듯한 느낌도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이 두 방향의 이미지를 동시 긍정 혹은 동시 부정하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쪽을 긍정한다는 것은 다른 한쪽에 대한 긍정을 전제하는 데 있고, 한쪽의 부정은 다른 한쪽 역시 부정될 수 있을 때라야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 그것은 ‘꽤 다름’에 기꺼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어느 날 갑자기 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날 갑자기는 늘 우리 곁에 있으며 우리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깨달음은 꽤 다른 타자와도 기꺼이 마주칠 수 있는 매번의 도약 위에서 어느 날 갑자기 도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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