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하 (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죽음’이 애통한 것이 아니라면 연암은 왜 ‘애哀’사를 썼을까요? 연암은 「이몽직애사」 뒤에 「제이몽직애사후題李夢直哀辭後」를 덧붙여 그 글을 쓰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제문(題文)은 3년 전으로 돌아가서, 세상을 떠난 친구 한 명을 떠올리며 시작합니다. 나는 내 친구 이사춘이 죽은 뒤부터는 사람들과 다시 교제하고 싶지 않아 경하건 조위건 (경조사를) 모두 폐해 버렸다.”

자는 사춘, 이름은 희천. 연암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젊은 날 연암은 희천의 아버지(단릉 이윤영)에게서 주역을 배웠습니다. 단릉은 연암을 알아보고 맏아들 희천에게 연암을 좇아 놀게 했습니다. 그 후 십여 년 뒤, 희천의 나이 서른 넷, 갑작스럽게 죽음이 닥쳐옵니다. 참형이었습니다.

때는 영조 47년, 청나라에서 건너온 『강감회찬』이라는 책이 문제였습니다. 책에 태조의 출신에 대한 모독(오기(誤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정사(正史)로 읽히는 역사책이 아님에도 문제가 된 것은 (공로를 욕심낸) 박필순이 영조에게 강한 문제제기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조는 책을 모두 불태우게 하고, 읽은 자들, 책을 판 책쾌들까지 모두 색출하라고 명합니다. 많은 이들이 유배되고, 벌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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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천도 같은 내용의 오기를 하고 있는 『명기집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읽은 적이 없다고는 했지만, 유독 그와 그에게 책을 판 책쾌에게만 형벌이 가혹했습니다. 사형, 그중에서도 참수는 신체를 훼손하는 형벌입니다. 머리털 한 올까지 부모님이 주신 것으로 소중히 해야 하는 양반에게 신체를 훼손하는 형벌은 그와 연결된 모든 존재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의 머리는 책쾌의 머리와 함께 삼일을 강변에 걸려있었고 그의 처자식은 관노비가 되었습니다.

그의 집안이 노론 명문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영조가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오히려 희천의 집안을 정치적으로 견제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 이유를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우리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마침 나의 옛집이 낙서의 집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동자 때부터 그는 나의 집에 손님들이 날마다 가득하고 나도 당세에 뜻이 있었음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 나이 40이 채 못 되어 이미 나의 머리가 허옇게 되었다며, 그는 자못 감개한 심정을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병들고 지쳐서 기백이 꺾이고, 세상에 아무런 뜻이 없어 지난날의 모습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다.”

(박지원 지음, 「소완정의 하야방우기에 화답하다」, 『연암집(중)』, 돌베개,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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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천이 그렇게 죽고 연암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모든 인연에 적멸감을 느꼈고, 감히 ‘세상’에 뜻을 품겠다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주변의 경조사를 모두 끊고, 친한 친구들이 유배를 가도 편지 하나 부치지 않으며, 잘 먹지도 씻지도 않고 홀로 지내던 더운 여름이 있었습니다. 그 여름에 (연암의 제자이자 벗) 이서구는 연암을 찾아와 백탑 근처에서 함께 어울리던 시절을 떠올리며 자못 감개한 심정을 드러냅니다.

그가 돌아간 뒤 연암은 이제 ‘세상에 아무런 뜻이 없다’는 말로 답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세상’이라는 것 앞에서 방황했습니다. 길 위에서 양반이 아닌 이들의 이야기를 쓰던 십대, 과거 공부를 하면서도 시험장에서는 그림을 그려놓고 나오던 이십대, 문장으로 임금의 눈에까지 들었지만 자기를 합격시켜 득을 보려는 시험관들 때문에 시험지를 내지 않던 삼십대. 그리고 서른다섯.

희천의 죽음으로 연암은 자신이 본능적으로 미워한 그것의 실체를 봅니다. 이제 이 ‘세상’이 말하는 길을 더 갈 수 없다는 것을 연암은 봅니다. 그 길은 옆 사람이 죽어나더라도 나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곳에 친구는 있을 수 없고, 힘을 얻기 위해서 서로를 밀쳐내는 싸움은 필연적입니다. 연암은 이후 과거를 아주 그만둡니다. (다음에 왕이 된) 정조의 부름에도 적당히, 응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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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직이 나를 종유한 것은 비록 사춘의 경우처럼 정이 깊고 교분이 두텁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달 밝은 저녁과 함박눈 내린 밤이면, 문득 술을 많이 가지고 와서 거문고를 퉁기고 그림을 평론하며 흠뻑 취하곤 했었다. 나는 고요히 지내면서 이런 생활에 익숙해 있었는데, 혹은 달빛 아래 거닐며 서글퍼하다 보면 몽직이 하마 이르렀고, 눈을 보면 문득 몽직을 생각하는데, 문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하면 과연 몽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만이다.”

(박지원 지음, 「이몽직에 대한 애사」, 『연암집(중)』, 돌베개, 252쪽)

희천의 죽음과 몽직의 죽음이 아스라하게 겹쳐집니다. 그날 이후 희천을 만날 수 없는 것처럼, 문득 술을 많이 가지고 와서 거문고를 퉁기고, 달빛 아래를 서글피 걷다 보면 마주치고, 눈이 오는 날 떠올리면 문을 두드리는 몽직을 이제는 만나지 못합니다. 벗과의 만남은 이전과 다른 세상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벗과의 이별도, 이전과 같을 수 없는 세상을 살게 합니다. 우리에게 이별은 그래서 애통합니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 이렇게 씁니다. 아버지는 친구들을 오래도록 잊지 않으셨다.” 그렇습니다. 연암은 친구들을 오래도록 잊지 않았습니다. 아니,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그렇게’ 살 수 없었을 것이니까요. 지금 나의 삶은 친구들이 만들어준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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