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연(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아주 총망 받던 아이가 있었다. 외모도 훤칠하고, 성격이며 언행은 말 할 것도 없었으며, 재주도 많았다. 그랬던 아이가, 나이 스물 둘에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미어졌을까. 한창 세상에 나아갈 나이에 이 아들은 세상을 등지게 된 것이다. 손자를 작은 아들 삼아 키우던 조부모는 아이의 부모가 걱정되어 소리 내어 맘껏 울지도 못했다. 행여 자신의 아들이 자식 잃은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까봐. 두 살 베기 동생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지만, 제 어미의 슬픔을 알고 울어대니, 이 어미는 감히 죽지도 못하고 속으로 울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에게도 몇몇 친구들의 죽음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엘리베이터 사고로 세상을 떠난 장난꾸러기 친구, 백혈병으로 떠난 아빠친구의 딸. 폐가 굳어지는 병으로 초등학교를 가기 힘들 거라던 친구. 그리고 그 친구에게 끝내 찾아온 17살의 죽음. 이 시절에 느꼈던 슬픔은 ‘두 살 베기 동생’의 슬픔과 다르지 않았다. 제 어미의 슬픔에 울어대는 것처럼 그저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을 따라 ‘슬픔’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죽음의 슬픔’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는 다른 죽음이 찾아왔다.

2017년, 대학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부고를 받고, 친구들 모두 당혹스러웠다. 누가 장난으로 이런 문자를 보내진 않았을 테니까. 치료는 받고 있지만, 당뇨병처럼 계속 관리하면 되는 병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그 정도로 생각하고 지내 왔었다. 게다가 며칠 전까지도 만날 약속을 잡고 있었으니 당혹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믿고 싶지 않았다. 친구의 죽음도, 우리의 무관심도. 죽음을 맞이할 정도였다니, 우리가, 아니 내가 이렇게 친구에게 관심이 없었다니. 이걸 혼자 겪게 했다니….

친구부모님께서는 장례를 치르면서 정신이 없으셨던 와중에도 우리에게 친구의 병에 대해, 그동안 친구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다. 발인까지 함께 하는 동안에는, 친구의 언니와 친구 이야기를 하며 많이 울고, 많이 웃었다.

이 시간을 보내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산책을 하면서 봄 햇살이 비칠 때, 이 빛을 누리지 못하고 떠난 친구가 문득 생각나기도 하고, 또 미안하기도 했다. 나만 이 시간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아서. 또 종종 함께 먹고 놀던 추억이 떠올라 눈물 짓기도 했었다.

장례식에서부터 이 즈음까지, 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슬픔은 이 친구에 대한 슬픔인지, 아님 친구를 잃은 나에 대한 슬픔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제 함께 할 수 없다는 이기심에 대한 슬픔인지, 무관심했던 나에 대한 원망의 슬픔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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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문을 열었던 스무 살에 세상을 떠난 아이, 유경집. 그리고 그 아이를 잃은 가족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 이에 연암은 애도의 마음을 담아 애사(哀辭)를 덧붙인다. 그리고 묻는다. 죽음의 슬픔을 모르는 죽은 사람의 슬픔과 또 그 슬픔을 모르는 산 사람의 슬픔 중 어느 것이 더 슬픈 것인가를.

연암은 유경집의 죽음에 대해서만큼은 단호하게 “산 사람이 슬프다”고 한다. 총망 받던 아이 유경집의 이른 죽음은 마치 ‘가장 친하고 다정한 이가 문득 나를 등지고 떠나는 것’과 같다고. 그 마음은 원망스럽고 한스러워 고통이 뼈를 찌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헌데, 마지막 한 문단이 내 마음을 잡는다.

  아아, 비록 그렇지만 산 사람은 제 슬픔에 슬퍼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 슬퍼하는지 슬퍼하지 않는지를 모른다. 그렇다면 평일에 나처럼 그를 아끼던 자가 어찌 애사를 지어, 한편으로는 산 사람의 슬픔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죽은 사람이 제 슬픔에 슬퍼하지 못하는 것을 애도하지 않겠는가.

(박지원 지음, 「유경집에 대한 애사」,『연암집(중)』, 돌베개, 255쪽)

연암의 말처럼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의 슬픔을 알 수 없다. “제 슬픔에 슬퍼하는 것”일 뿐이다. 살아있는 자의 자기투사다. 적어도 우리는 내가 느끼는 슬픔이 어디에서 오는 슬픔인지 알아야 한다. 나의 이기심인지, 신에 대한 애통함인지, 죽은 이가 더 이상 이생의 호사를 누릴 수 없다는 안타까움인지, 고통을 함께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인지를.

연암은 애사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산 사람은 제 슬픔에 슬퍼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연암이 그들의 슬픔을 재단하거나 평가하진 않는다. 오히려 산 사람의 슬픔에도 깊이 공감한다. 다만, 죽은 사람이 제 슬픔을 슬퍼하지 못한다는 그 사실에 애도할 이가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하여 연암은 산 사람의 슬픔을 위로하고, 죽은 사람이 제 슬픔을 슬퍼하지 못하는 것에도 애도를 표하고자 하는 것이다. 연암의 애사가 독특성을 갖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신의 슬픔만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슬픔을 애절하게 그려낸다. 물론 글쓴이인 연암과의 관계 속에서 되살려낸다. 이 점이 참 놀랍다. 애사에도, 묘비명에도, 제문에도, 죽은 이와의 애통하고 가슴 저린 이야기가 참으로 담박하게, 투명한 물처럼 흘러가고 있다. 자신의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지만, 충분히 그 슬픔을 함께하는 연암. 그는 그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죽은 이와 산 사람에게 바친다. 이것이 연암의 애사(哀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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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코끼리
Guest
예민한코끼리

주변 사람들의 죽음, 그리고 그에 대한 슬픔을 연암은 이런 시선으로 봤군요.
글에도 써 주신 것처럼 참 독특하면서도, 말 그대로 정말 슬프네요.
어떤 감정이 올라오면 그 감정 안에서 허우적 대느라
그 감정이 어느 갈피에서 나온 것인지를 헤아려 볼 생각조차 못하는 거 같아요.
특히 슬픔은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슬픔 속에도 공부가 있고 배움이 있다는 걸 깨닫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