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영 (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연암의 집안은 청빈했고 재물에 욕심이 없었다. 연암의 할아버지는 당세에 이름난 고관이었지만, 관직생활을 하면서 재산 한 푼도 늘리지 않았다. 덕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남긴 재산이라곤 열 냥도 채 안되었고, 이 청빈한 집안 내력은 연암까지 쭉 내려왔다. 당연히 집안 살림은 언제나 빠듯했다. 하지만 연암의 식구들 중 누구도 그 생활이 모자라다거나 부족하다며 결핍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뼛속까지 청빈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탱해준, 연암의 맏형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암의 맏형수, 공인 이씨는 열여섯에 시집왔다. 가난한 시댁 때문에 공인의 고생은 참 말도 못한다. 공인은 병이 떠날 새가 없을 정도로 본래 몸이 약했는데, 집안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없는 살림에 제사 챙기느라 애가 타고 뼛골이 빠졌다. 아들 셋을 낳았건만, 다 어려서 생을 마감했다. 그 마음 추스르기도 힘들 것 같은데, 공인은 연달아 이어지는 제사와 잔치, 열 식구 먹여 살리는 것까지 거뜬히 해낸다. 연암은 이십년 가까이 집안 살림하느라 늘 마음을 바삐 쓰는 형수를 보며 ‘마음이 위축되고 기가 꺾이어 마음 먹은 뜻을 한 번도 펴본 적이 없었다’(334쪽)고 회상한다.

이상한 건, 이토록 고단한 인생이면 원망이나 푸념이 절로 나올 것 같은데 공인에게는 그런 기색이 하나도 안 보인다는 점이다. 오히려 명문가의 체면이 손실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길 정도로 집안에 대한 책임감이 엄청나다. 그저 사대부 며느리로써 당연한 일이었던 걸까. 만약 그런 의무감이었다면, 지쳐서 그 약한 몸으로는 도저히 못 버텼을 것이다. 공인이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었던 건 그 누구보다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주위 사람들이 있었기 떄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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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의 아내는 공인이 결핵으로 기침을 하며 힘들어 할 때마다 진정이 될 때까지 온화한 얼굴로 곁을 지켰다. 연암도 형수가 가난으로 우울함을 풀지 못할 땐, 온화한 얼굴과 좋은 말로 그 마음을 위로하고, ‘매양 무얼 얻으면 그것이 비록 아주 하찮은 것일지리도 당신 방으로 가져가지 않고 반드시 형수께 공손히 바쳤다.’(『나의 아버지, 박지원』, 31쪽)고 한다. 거기다 형수가 병으로 몸져 누워있을 때, 연암은 공인의 속을 시원히 내려주는 공약 하나를 내건다.

일찍이 공인을 마주하며 말하기를,

“우리 형님이 이제 늙었으니 당연히 이 아우와 함께 은거해야 합니다. 담장에는 빙 둘러 뽕나무 천 그루를 심고, 문 앞에는 배나무 천 그루를 접붙이고 시내의 위와 아래로는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 천 그루를 심고, …(중략)… 울타리 사이에는 세 마리의 소를 매어 놓고서, 아내는 길쌈하고 형수님은 다만 여종을 시켜 들기름을 짜게 재촉해서, 밤에 이 시동생이 옛사람의 글을 읽도록 도와주십시오.”

했다. 공인은 이때 병이 심했으나,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머리를 손으로 떠받치고 한 번 웃으며 말하기를,

“이는 바로 나의 오랜 뜻이었소!”

하였다.

( 박지원, 『연암집』(상), 「맏형수 공인 이씨 묘지명」, 돌베개,  336쪽)

뽕나무, 배나무 등등 과일 나무를 1000그루씩 심고, 냇가에는 치어를 풀고, 소를 세 마리나 키우자는 말로 연암은 형수가 더는 집안 살림으로 고생하지도 마음 졸이지도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전한다. 그 말을 들은 형수, 마음이 환해지고 몸도 벌떡 일으킨다. 하지만 형수의 그 오랜 뜻은 살아서는 끝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연암이 연암골에 터를 잡기도 전에, 공인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연암은 고인이 된 형수를 집의 북쪽 동산 해좌의 묘역에서 장사지냄으로서 형수의 생전 뜻을 이뤄 드리고자 한다.

쌀 한톨, 돈 한푼 더 생기게 해주지도 못하는 위로의 말과 공약이 공인의 고달픈 삶을 물질적으로는 풍족하게 바꿔주진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형수의 마음을 헤아리는 연암부부 덕에 공인은 삶을 원망하는 지옥 속에서 살아가지 않았다. 그 사실이 물질적으로 풍족하면서도, 옆에 있는 사람 마음 하나 헤아리기 어려워 지옥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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