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하 (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연암의 많은 묘지명 중 「족손 증 홍문관 정자 박군 묘지명」은 그다지 눈에 안 띄는 작품일 수 있다. 제목도 제목이거니와(너무 길지 않은가..), 다른 묘지명들에서 볼 수 있는 망자에 대한 연암의 깊은 정이라든가, 연암과 망자 사이의 독특하고 친밀한 관계라든가 하는 것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글은 묘지명의 또 다른 부류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이 쓰이게 된 것은 망자의 아버지가 한 부탁 때문이었다. 연암과 같은 반남 박씨 집안사람이었던 박상덕은 이른 나이(29살)에 죽은 아들이 일찍이 연암의 글을 좋아했다며 숙부님이 지은 묘지명을 얻음으로써 죽은 자를 불후하게 하고, 그뿐 아니라 산 자도 가끔 읽어보고 그의 용모와 목소리를 상상함으로써 무궁한 그리움을 메워 볼까 합니다.”라고 묘지명을 부탁한다. 죽은 아들을 기억할 수 있는 글을 써달라고 한 것이다.

누군가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얼굴을 자세히 묘사하고, 그가 좋아했던 것들을 나열하고, 그의 행적을 기록하면 될까? 이상하게도 연암의 글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망자의 얼굴은 짐작할 수도 없고, 그가 어떤 사람이고 무얼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글을 읽은 이들은 망자 ‘박수수’를 어렴풋이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보니 망자는 재주가 그렇게 아름다운데도 오히려 집안에서라도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두텁게 가리고 숨기느라 겨를이 없었는데, 하물며 딴 사람에게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비록 과거에 우연찮게 급제하기는 했지만 담박하여 흥미 없어 했으며 수시로 먼 데를 바라보며 사모하기를 마치 학이 새장 안에 있는 것 같이 하였다. 그러나 답답한 심정을 이야기할 상대가 없으니 홀로 술로써 속을 풀었다.

(박지원, 「족손 증 홍문관 정자 박군 묘지명」,『연암집(상)』, 돌베개, 326쪽)

박수수가 거처하는 방에는 하루 묵는 주막집같이 먼지가 쌓여있고, 두 권의 책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유람객 많고 도처에 노래와 춤이 그득한 평양에 살면서 날마다 정문을 공부했고, 관아에 있을 때는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홀홀하여 아무도 그가 있는 줄 몰랐다고 한다. 또 일찍이 연암의 글을 좋아했다는 말, 과거에 급제하긴 했지만 흥미가 없었고, 새장 안에 갇힌 학 같은 모습이었다는 말, 답답함을 풀 데가 없어 홀로 술을 마셨고, 그렇게 많이 마시다가 황달에 걸려 죽었다는 말에서, 읽는 이들은 박수수에 대한 느낌과 인상을 얻게 된다.

이렇게 누군가에 대해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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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잘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는 ‘잘 안다’는 것은 그의 ‘내밀한’ ‘속’ 이야기를 안다거나, 그의 과거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거나, 그의 마음-행동 습관을 기억하고 있어서 예측을 할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사람은 ‘알 수’ 있는 건가? 한 사람에 대한 데이터들을 많이 가질수록 ‘그 사람’의 본질에 점점 접근할 수 있으리라는, 그리하여 혼란 없이 한 ‘인물’로 그를 인식하겠다는 이 감각은, 연암이 누군가를 바라보고, 쓰고 있는 느낌과 많이 다르지 않은가.

연암에게 박수수는 친한 친구도 아니었고, 7살 어린 먼 친척 동생 정도였던 것 같다. 그와 많은 시간을 함께한 것도 아니고, 많은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다. 이 묘지명에 박수수와의 내밀한 대화가 있는 것도, 그가 태어나고 죽기까지의 세밀한 역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연암의 글을 읽고 이재성(연암의 처남이자 지기)은 자기가 한 번밖에 보지 못한 박수수를 다시 떠올리며 중국 초상화의 대가인 ‘대가미’에 비교하였고, 박수수의 아버지는 그의 글에서 자기가 모르는 아들을 발견하며 애통해했다.

새장에 갇힌 학, 홀홀한 나그네, 답답함에 홀로 술을 먹다가 난 병. 누군가에 대해 쓴다는 것은 그를 들여다보고, 알아보는 일이 아닐까? 이렇게 그의 정신이 드러나는 곳을 바라보고, 그가 어떤 정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들여다봄으로써,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 우리가 서로 다르게 생겼고, 다른 이름을 가진 것만큼 다른 존재임을 알아보는 것. 그때 비로소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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