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연(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과연 실재일까? 지금 보고 있는 스마트폰이, 컴퓨터 모니터가, 옆에 있는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생긴 거라 믿는가? 뭔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정말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정말 그러한 것’이라고 누가 장담한단 말인가?!

우리는 반사된 빛으로 사물의 색을 인지한다. 연둣빛 잎은 나머지 색들을 흡수하고, 오직 연두색만을 반사 시켜 우리의 눈에 ‘연두색’으로 보이게 한다. 물체가 수용하지 않고, 거부한 색이 눈에 보인다니, 새삼 신기하다. 이렇듯 우리가 형체를 보고, 색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빛’이란 존재 덕분이다. 빛은 어딘가에 부딪혀서만 그 존재를 드러낸다. 부딪힘에 의해 빛이 있음을 알 뿐, 실제로 빛 자체를 볼 수는 없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 보이지 않는 ‘빛’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빛’이 느껴지지 않는 아주 깜깜한 밤이 되면, 우리는 당연히 물체를 인지하지 못 한다. 하지만 깜깜한 곳에서 물건은 보이지 않아도 살아 있는 것은 보인다고 한다. 응? ‘온도를 가진 모든 물체’는 스스로 빛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인즉, 우리도 빛을 내고 있다는 거다! 내 몸에서… 빛이?

한여름 밤의 납량특집을 떠올려보자. 어둠 속에서도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던가. 그렇다. 우리의 몸에서는 우리는 볼 수 없는 ‘적외선’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다만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을 뿐이다. 뱀은 적외선을 볼 수 있어 어두운 곳에서도 우리를 발견할 수 있다. 고양이의 세로로 길쭉해지는 동공은 미세하게 빛을 모아 인간보다 훨씬 적은 빛으로도 세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개는 거의 흑백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눈 오는 날을 좋아하는 이유는 온 세상이 하얀 점박이로 축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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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빛’을 통해 세상을 보고, 만나고 있다. 깜깜한 방에 갇힌 우리의 뇌는 감각기관들이 전달해 주는 신호들로 세계를 구성한다. 그 신호의 해석체계가 우리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눈으로 본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존재들은 전혀 다르게 세상을 인식하고 구성하고 있을 거다.

‘인간’이라 할지라도, 친구와 내가 보는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일 수도 있다. 나 자신도 세상을 계속해서 같은 눈으로 보고 있진 않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나고 기억하고, 그 기억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분류화, 체계화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왔지만, 이런 방식은 때론 우리를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게 만든다.

까마귀를 우리는 그냥 ‘까만 새’ 정도로 거칠게 생각한다. 공작새면 몰라도, 까마귀에게 여러 빛깔이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도 못한다. 그저 내가 ‘본’ 그 빛깔로 까마귀를 단정 지어 버릴 뿐이다. 하지만 연암은 까마귀가 가지고 있는 여러 빛깔을 본다.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건만, 홀연 유금乳金 빛이 번지기도 하고 다시 석록石綠 빛을 반짝이기도 하며, 해가 비추면 자줏빛이 튀어 올라 눈이 어른거리다가 비췻빛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내가 그 새를 ‘푸른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고, ‘붉은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 새에게는 본래 일정한 빛깔이 없거늘, 내가 눈으로써 먼저 그 빛깔을 정한 것이다. 어찌 단지 눈으로만 정했으리오. 보지 않고서 먼저 그 마음으로 정한 것이다.

(박지원 지음, 「능양시집서」, 『연암집(하)』, 돌베개, 62쪽)

 

까마귀는 원래 일정한 색이 없는데, 우리의 눈이 ‘까만 새’로 본 것일 뿐이고, 우리의 마음이 ‘까만’ 것으로 퉁 치고 지나갈 뿐이다.

검은색은 수많은 빛깔을 포함하고 있다. 온갖 물감을 섞으면 검은색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연두색도 그 연둣빛을 반사시키기 위해 수많은 빛을 흡수하고 있다. 연두색의 이파리에는 다른 빛들이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각자 고유한 색이 있고, 고유한 색 안에는 여러 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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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은 말한다. 빛깔()이 있는 것 치고 빛()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형체()가 있는 것 치고 맵시()가 있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빛깔과 형체는 우리 눈에 보이는 ‘무엇’이고, 빛과 맵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의 것들이다. 빛이 있지 않으면 빛깔이 우리 눈에 보일 수 없듯, 그 사람의 매력과 태도(態)가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이라는 형상(形)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재밌는 사실은 우리의 눈과 마음이 빛깔(色)을 결정하고, 친구의 매력 혹은 태도(態)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연암의 이야기 속에는 달사(達士), 달관한 사람이 나온다. 달사는 빛(光)과 맵시(態) 같은 이면을 보는 사람이다. 연두색 이파리를 보일 수 있게 하는 이면의 다른 빛들의 인연을 알고 있는 사람, 까마귀를 까맣다고 정의하고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각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가 보는 빛깔(色)과 형체(形) 또한 바로 우리가 그려낸 것이다. 내가 그린 이 세상에 대한 확고함을 내려놓을 때, 그때야 비로소 다른 빛(光)과 맵시(態)를 만날 수 있을지어다. 정말로, ‘진짜’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실재를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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