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소녀, 사랑받는 ‘여자’가 되기로 결심하다 –2)

김석영 (남산강학원 청년스폐셜)

5. 깨뜨릴 수 없는 ‘연애 극’의 두 주인공

좋은 날씨, 넉넉한 시간, 여유, 사랑하는 남녀. 뿌듯하리만치 좋아 보이는, ‘훌륭한 그림’이다. 대체 여기에 어떤 문제가 숨어있었을까? 그날, 그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 본다.

그를 만나기 위해 나는 일찍 일어나서 머리를 하고, 화장을 하고, 옷을 챙겨 입었다. 그와 데이트를 할 때면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정성 들여 치장을 하곤 했다. 일상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과 만나면서 ‘치장’을 하며 즐거워한다는 것이 좀 이상하긴 하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찍는 연예인도 아니고.

하지만 화장 좀 덮고 있다고, 옷이 좀 불편하다고 몸이 ‘폭발’하진 않았을 거다. 데이트를 하기 위해 나는 외모만 꾸민 게 아니다. 우리는 연애를 할 때면(혹은 연애를 걸 때면) ‘핑크핑크’한 기류를 만들기 위해 참 노력한다.

퍼져 있다가 카메라만 돌아가면 ‘꽃웃음’을 짓는 연예인들처럼, 우리도 연인을 만날 땐 행동 하나하나 목소리 하나하나 ‘연애 모드’에 맞게 세팅한다. 모든 행동과 목소리마다 끼를 쭉쭉 짜 넣는다. 그게 ‘우리 만남을 유지합시다’라는 유일한 구애 방식이자 응답 방식인 것이다.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우리가 공유하는 ‘연애 모드’는 ‘항상 뜨거운 모드’였다. 나는 언제나 남자친구의 얼굴을 보면 끔뻑 죽었고, 이벤트든 선물이든 있을 땐 과하게 기뻐했고, 언제나 스킨십엔 ‘웰컴’ 상태였다. 남자친구도 그랬다. 그는 항상 내 애교를 받아줬고, 나를 보면 끔뻑 죽어 줬고, 내가 선물을 주면(선물 준비도 서로 참 열심히 했다) 내 맘을 잘 알아주고, 기뻐했다. 또 그 역시 당연히 스킨십은 언제나 ‘웰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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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렇게 겉에서 보기엔 참 발랄한, 깨가 쏟아지는 연애를 했다. 남자친구가 좋은 것도, 선물이나 이벤트가 재밌고 반가운 것도, 스킨십이 좋은 것도 맞다. 근데 뭐가 문제냐고? 문제는 ‘늘 그러지 않으면 안 됐’다는 것이다. 남자친구가 그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느꼈다.

나는 때때로 ‘기쁜 티’를 내기 위해 감정을 끌어올리느라 노력했다. (예컨대 깜짝 선물을 받았는데 감정이 확! 올라오지 않으면 당황을 감추며 “우와~~♥”를 해줘야 한다. 땀이 삐질 난다.)

그리고 우리의 스킨십은 ‘과도’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에게 말이다. 늘 그렇게 알콩달콩하거나 확 타오를 수가 있나? 한 명은 스킨십을 원하는데 다른 쪽은 편히 있고 싶은 때는 없었을까? 아마 있더라도 금방 마음을 다르게 먹었을 거다.

이렇게 언제나 뜨겁고 애교 넘치는 ‘연애 모드’의 스위치를 켜는 것이 ‘나는 당신과 만나고 싶습니다.’라는 우리의 언어였고, 연인으로의 의무였다. 큰일을 하진 않더라도 일상의 매 순간에 우리는 이 ‘역할놀이’에 충실했다.

이런 데다가 그렇게 오래 보고, 떨어져 있어도 늘 핸드폰으로 연락을 했으니 일상을 늘 함께 보냈으니……. 정말이지 우리는 ‘다르게 될’ 틈이 없었다.

6. 우리는 언제나 ‘나’를 벗어나고 있다

‘다르게 될 틈이 없다’는 것. 이게 내 몸이 발작한 이유다. 연기를 해 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에너지 소모가 많은 일인 줄 알 것이다. 연기를 하는 건 하나의 캐릭터를 머릿속에 넣고 모든 움직임을 그에 어울리도록 통제하는 일이다. 목소리 톤, 발을 딛는 속도, 머리를 넘기는 포즈와 빈도, 기침이나 콧물이 흐르는 것까지도 캐릭터에 어긋나선 안 된다.

연기를 잘한다는 건, 이 ‘통제’를 몸에 잘 새긴다는 뜻이다. 이를 훌륭하게 해내는 배우들이 박수를 받는 건,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애초에 하나의 ‘캐릭터’로서 움직이지 않는 탓이다. ‘나=예쁜 여친’, ‘나=멋진 남친’ 입력! 여기에 어울리게 움직여! 하는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은 반대로 진행된다. 우리는 늘 우리가 통제할 수도 채 다 인지할 수도 없는 수많은 것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 지금 이 공간, 고유한 밝기와 고유한 온도와 고유한 공기 속에서, 당신의 폐의 세포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공기와 만나고, 발가락은 요렇게 꼼지락거리고, 눈꺼풀은 이런 속도로 움직이고, 새로운 흐름이 사유를 스쳐 가고, … 몸이라는 공간의 안팎, 그리고 경계에서는 매 순간 우리가 캐릭터화 할 수 없는 무수하고 다양한 움직임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매 순간 멈추지 않고 짝짓기를 하며 다양한 규모로 헤쳐 모여 하는 분자들의 집합들-운동하는 세포들과 기관들-, 그 흐름들. 이들이 바로 우리를 살아있고 움직이게 하는 ‘욕망’들이다. 그리고 욕망들의 운동의 과정이자 결과로 생겨나는 각각의 모습들과 느낌들의 도합이 ‘나’가 된다.

일이 이러할진대! 내가 ‘여친 놀이’를 하는 동안, ‘연애-그림’을 망치지 않으려고 하는 동안, 이것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여친 상’, ‘연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발생시키는 모든 작동, 모든 만남, 금지! 라는 ‘탄압’이 발생한다.

‘나’의 입장에서는 이걸 ‘억압’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를 압박하는 주체가 있지도 않았고,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분명한 즐거움이 거기에 있었고, 나는 그렇게 사는 게 나쁘지 않은, 아니 최선의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성이 ‘움직임’, ‘다른 것과 짝을 지어 새로운 움직임 만들기’ 그 자체인 욕망들은, 으스러진다. 내가 더 ‘좋은 여자친구’가 되고자 할수록, 남자친구와 더 ‘멋진’ 연애를 하고 싶을수록 욕망들은 더더더 갈 곳을 잃고 삐거덕거린다.

내 일상을 가득 채운 연애는 욕망들이 다른 것을 만날 틈을 주지 않았다. 다른 사유를 만날 틈도, 다른 사람이나 다른 책 등 다른 기운장들과 깊게 접촉할 틈도, 몸에 색다른 느낌을 주는 다른 긴장도를 만들어낼 틈도, 다른 리듬으로 호흡할 틈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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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움직임의 차단은 곧 새로운 감각의 차단이다. 매일 같은 음식만 먹는다고 생각해보라. 같은 자극, 그에 따르는 반복되는 같은 감정으로 몸에는 폭발할 만큼 지루함이 쌓인다. 욕망들은 늘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다른 것들과 만나고 싶다.

그래서 내 몸은 발작을 했다. 더는 본성을 숨길 수 없었던 욕망들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마구잡이로 들고 일어나며, 마구잡이로 ‘이 순간’과 짝짓기하며 ‘발작하는 나’를 튀어 오르게 한 것이다. ‘나’는 당황했지만 ‘몸’은 시원하고, 개운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발작 뒤에 잠깐의 정적동안, 그리고 피로한 몸을 끌고 ‘데이트’ 대신 집으로 돌아갔던 그 길이, 몸에 창문이라도 난 듯 숨통이 트이고 홀가분했던 것 같다.

7. ‘연애’, 세상에 나를 외치는 유일한 길

왜 나는 몸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정말 다르게 숨 쉴 틈도 없을 정도로, 연애를 내 일상에 욱여넣고 있었을까? 마치 아주 즐거운 일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아니 일 중독자처럼! 무슨 최면이라도 걸린 걸까?

나는 연애의 영역에서 묘한 ‘책임감’도 느꼈다. 내게 있어 연인은 언제나 서로에게 ‘1순위’여야 했다. 서로의 연락, 서로를 만나는 것, 서로의 감정이 언제나 상대방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이어야 했다. 나도 모르게 온 생을 걸어, 온 존재를 걸어, ‘여자친구’로서의 내가 되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남자친구도 그러리라 믿었다. 사실 책임감이었다기보단 ‘이렇게 하자’는 강력한 제안이었다.

이건 정말 ‘일 중독’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앞서 연애를 괜찮은 사업, 해볼 만한 사업이라고 몇 번 말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생계, 삶이 사업에 달려 있(다고 느끼)듯이, 내겐 연애가 그런 것이었다.

나는 정말 연애에 ‘매달려’ 있었다. 연애는 ‘운명적 사랑을 찾았다!’는 느낌으로 내 삶을 ‘완성’되었다 느끼게 해 주고, 내 미래를 불안하지 않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세상에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그렇다. 연애란 이미 ‘나와 너’ 둘이 만나기 위한 방식이 아니다. 내가 ‘훌륭한 여자친구’가 되고 싶어 했을 때. 남자친구뿐만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도 내 의식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부러워할 만큼 예쁜 여자친구’로든, ‘연애하고 싶은 상대’로든, 아니면 ‘연애 중인 잘난 사람’으로든, 나는 어떻게든 근사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세상에, 나를 드러내고 싶었다. 그게 내가 아는 유일한 ‘세상과 만나는’ 방법이었다.

‘무언가를 만나고 싶다!’ 이건 우리를 이루는 욕망 차원의 목소리다. 그래서 ‘욕망 덩어리’인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과 만나고 싶다. 주변을 살펴보라. 방콕한 채 글을 쓰는 사람도, 몸이 고장 나는데 돈에 목숨이라도 걸린 듯 돈을 쫓는 사람도, 게임에 중독된 사람도, 그렇게 해야 세상과 만난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한데 문제는 ‘타자를 만나고 싶다’는 이 욕망의 외침은 인간 차원에서는 너무도 쉽게, ‘나를 드러내고 싶다’로 둔갑해버린다는 거다. ‘우월감’이라는 감정이, 우리가 이렇게 길을 내도록 유도한다. 나도 연애를 통해서, ‘예쁜 여자친구’놀이를 하면서, 이 감정을 푸지게 느꼈다.

어쩌면 연애를 통해 ‘만사가 해결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것도, 이 ‘우월감’이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는 어째거나 저째거나, 이 느낌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뿜뿜 하는 것이다. 연애를 통해 우리가 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주류’라는 것도, 언제나 이 ‘우월감’을 실컷 맛볼 수 있는 위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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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월감’을 잘 음미해보면, 이건 ‘정말 기쁜’ 감정은 아니다. 그 감정은 욕망들이 만남이 꽉꽉 막힌 채고, ‘나를 좀 바라봐줘!’라고 초라하게 외침치고 있다가, 잠깐 그 애원이 들어 먹힐 때, 반짝 느껴지는 안도감이다.

그런 감정이 결핍감을 숨긴 채, 좀 있어 보이는 ‘우월감’이라는 단어로 포장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이 감정이 아주 좋은 것이고, 꼭 가져야 하는 감정인 것처럼 따른다. 또 그걸 느낄 때면 마치 내가 잘나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리고 이제는 목적이 전도돼서, ‘세상과 만나는’게 아니라, 이 ‘우월감’ 없이는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러니 나에게 이 ‘우월감’을 계속 선사해주는, ‘좋은 여자친구로서의 나’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 ‘관객’으로 격하되는 모든 타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게 유일하게 내 세계에 남은 남자친구는, ‘연애’는 내 일상을 가득 메우게 되었던 것이다.

8. 우리가 ‘진짜’ 다르게 될 수 있는 순간들

세상과 만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욕망들이 세상과 만날 때, 그것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로 다른 것들과 섞이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운동성의 방향을 바꾸고, 거기서 쾌감을 만들어낸다. 이거, 우리도 배워볼 순 없을까?

‘여자’, ‘여자친구’, ‘남자’, ‘남자친구’로 말고, 세상 속에 다르게 존재하는 길을 내보자는 거다. 하지만 이게 내가 ‘여자라는 틀에서 벗어나겠어!’라고 다짐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여자 말고 더 멋진 나!!’를 상상하고 따른다고 될 일도 아니다. ‘멋진 그림’을 그려놓고 쫓아가는 건, 이미 우리가 실패를 경험한 길이다.

대신 우리는 이런 고민을 해볼 수 있다. 어떻게 고집스런 ‘나’를 열고, 다른 것을 내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순간들 바로 내가 ‘여자’에서, 내가 ‘나’라고 고집하던 모습에서 벗어나는 순간일 것이다. (우리 몸은 내가 생각하는 ‘나’를 언제나 무수히 벗어나고 있겠지만, 우리가 그 순간을, 세상과 만난다는 그 ‘충만함’을 인식할 수 있게, 적극 시도해 보자는 거다.)

‘연애 모드’가 우리를 ‘이 순간’, ‘때-시공간’과 분리시켰으니, 반대로 이걸 이용해볼 수 있겠다. 시공간의 힘을 빌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미나를 할 때, 등산을 할 때, 회의를 할 때, ‘때’에 집중하며, 전체적인 흐름을 읽으며 뭐든 만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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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하든 사랑이 최우선 모드’를 버리고 ‘식사 모드’, ‘글쓰기 모드’, ‘세미나 모드’, ‘등산 모드’, ‘회의 모드’로 집중해 들어가면서, 상황마다의 적합함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거기선 당연히 다양한 우리들의 모습이 튀어나올 것이다.

또 하나 더. 익숙하고 친숙한 사람들 말고, 당황스럽고 낯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 아니, 익숙한 사람이라 해도, ‘낯선 면들, 다양한 면들’을 만나고 견디는 것이다.

누군가에게서 나로선 종잡을 수 없는 어떤 면을 마주했을 때, 편치 못한 감정, 곤욕감이 올라온다. 하지만 초라한 ‘우월감’이 빛나는 외투를 입고 있었듯이 이 ‘곤욕감’도 자세히 음미해보면 마냥 곤욕만은 아닐 수 있다. 그냥 ‘낯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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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때야말로 내가 다른 기운을 쓸 수 있고,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때다. 그 낯선 감정들이 바로 내게 아주 새로운, ‘다른 방식의 접속’에서 만들어지는 ‘다른 쾌감’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월감’ 찾기는 그만두고, 그런 ‘곤욕감’을 좀 견뎌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게 ‘나’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연애를 할 때도, 친구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풍성한 감정들을 견뎌내고 겪어내고, 음미해보자. 사실 그런 게 없으면 우린 지루해 미친다. 그런 길의 끝엔 아마 ‘발작’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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