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찬영 (감이당 장자스쿨)

1. 프롤로그1: 상실의 위험에도 돛을 달다

그럼 세계를 보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혼 곶을 돌아서 세계를 더 보고 싶나? ? 지금 자네가 서 있는 곳에서는 세계를 볼 수 없나?

허먼 멜빌, <모비딕>,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2011, 114쪽

<모비딕>을 읽어나갈 때, 캐릭터가 작품 밖으로 튀어나와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말을 걸고 질문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러면 나는 움찔하며 그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또 어떤 대답을 할지 마음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려보는 것이다. 바로 이 대사가 그랬다.

<모비딕>의 장엄한 항해 서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전, 주인공 이슈메일이 식인종 친구 퀴퀘그와 피쿼드 호에 올라타기 위한 육지 여행을 하는 것으로 길고 긴 서문이 펼쳐진다. 지갑은 점점 가벼워지는데다 우울증과 신경증까지 겹친 이 청춘은 온몸으로 감지한다. “되도록 빨리 바다로 나가야 할 때가 되었구나¹” 꼬박 3년의 시간동안 육지를 밟지 못한 채 먹고 자고 생활할 배를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점찍는데, 충동적인 젊음의 기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마음 가는 대로, 몸 가는 대로! 이슈메일이 선택한 피쿼드 호의 관리 선장 펠레그는 세상을 여행하고 싶다는 이슈메일의 낭만적인 포부에 찬물을 끼얹는다. 천지 만물의 비의를 알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모든 고난과 불행을 딛고 불굴의 의지를 바다에서 한 번 시험해 보겠다는 이 풋내기의 열정이 세파에 닳을 대로 닳은 늙은 선장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저 너머의 세계를 꿈꾸며 먼 파랑새를 좇는 몽상으로 젊음의 나날은 채색되기 마련이고, 언제라도 세상을 다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앎을 실천하고자 하는 들뜬 열정이야말로 청춘의 특징이니까. 따라서 새파란 예비 신입인 이슈메일은 먼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일종의 자격 면접을 치르고 있는 셈이고, 노련한 선장 펠레그는 그를 심사할 근엄한 면접관이다. 한때 큰 배를 총괄하고 지휘하며 온갖 종류의 경험치를 다 쌓은 노쇠한 선장의 눈에는 이슈메일의 흥분 어린 열정이 거슬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슬쩍 이슈메일을 도발해보는 것이다. 네가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곳에서는 세계를 볼 수 없냐고. 굳이 위험한 모험과 죽을 고비를 넘겨야만 세계를 볼 수 있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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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위험한 모험과 죽을 고비를 넘겨야만 세계를 볼 수 있는 거냐고.

이슈메일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책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그저 그가 어떻게든 이 배를 타겠노라 항변하고, 펠레그 선장이 수락하는 장면만 서술로 잠깐 나올 뿐이다. 내가 유독 이 질문 앞에서 고민에 빠졌던 것은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써나가는 모든 과정이 내게는 모비딕을 찾아 나서는 모험과 비슷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나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왜 굳이 머나먼 항해를 떠나려 하느냐고, 네가 딛고 선 땅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없느냐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이제 막 포경선에 올라타려는 이슈메일과 퀴퀘그처럼 모든 사람들은 인생에서 한 번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육지를 떠나야 할 때를 마주한다. 이 험난한 여행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겠지만, 가장 조심스럽게, 또 신중하게 챙겨야 할 동반자는 철학이 아닐까? 이제 막 돛을 달고 출항하려는 배에게 있어서, 순간순간의 방향키를 조정하고, 항로를 계획하며, 폭풍을 만났을 때 대처하는 법을 알려주는 매뉴얼이 바로 철학일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육지란 가족을 기반으로 한 종교적 세계관과 신앙, 믿음을 의미했으며, 대학 시절을 거쳐 만난 새로운 바다는 바로 철학이었다. 바야흐로 안락한 육지를 뒤로 한 채, 이제 망망대해를 앞두고 내 안의 매뉴얼이 싹 갱신되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이 신앙의 뿌리는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오래전, 외할머니가 품었던 씨앗의 산물이었다. 18살에 시집살이를 시작한 그녀는 시댁의 가혹한 학대, 남편의 지독한 바람기와 폭력 속에서 예수를 만나 완전히 회심하고 제사를 거부했다. 한국 사회의 엄격한 가부장제에 혹사당하던 당시 할머니 나이대의 여성들은 신의 말씀을 만나는 순간, 그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감응하는 능력이 있다. 마을에 하나쯤 있는 오래된 교회를 수십 년에 걸쳐 신실하게 섬겨오며 예배당 맨 앞 좌석에 본인 전용 자리가 있는 여성 권사님들은 보통 이런 전형적인 신앙 코스를 밟고 종교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한국 교회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얼핏 보면 광폭한 태극기 부대와 늘 쩌렁쩌렁한 마이크를 켜놓고 흰소리를 날려대는 험악한 인상의 목사들일 것 같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은 바로 이 여성들에게서 나온다. 한국 기독교가 근대를 거치며 엄청난 부흥을 일궈낼 수 있었던 데에 결코 빠질 수 없는, 그러나 숨겨진 백발의 잔다르크들. 낫 놓고 기역자도 몰랐던 무지렁이 여성들에게, 예수는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언어이자 구원이었다. 할머니는 아홉이나 되는 시누이들의 극렬한 반대와 폭압 속에서도 나는 예수쟁이이고, 예수쟁이는 절대 귀신을 섬기는 제사상을 차릴 수 없다며 자신의 신념을 단단히, 소중하게 지켜냈다. 할머니 인생에서 최초로 이뤄냈던 쾌거이자 일종의 혁명이었다. 기독교는 그렇게 우리 집안의 핵심축으로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엄마는 할머니의 여섯 자녀 중에서 목사가 된 삼촌과 함께 가장 신실했던 사람이었다. 이 배경 속에서 내가 태중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건 너무나 당연한 운명이었다. 체구는 콩돌마냥 조그맣지만 태산처럼 꼿꼿한 내면을 가진 두 여인의 확고한 믿음과 신앙을 차곡차곡 내 것으로 물려받으며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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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슬프게도, 누구의 말마따나 ‘지상 최대의 쇼’가 막을 내렸다. 엄마는 내가 당신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유일한 소원으로 삼았지만, 그 하나의 소원을 정확히 빗나가는 것이 바로 자식인 법이다. 더 이상 종교적 세계관으로 움직이는 가족의 충실한 구성원이 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모든 사건과 존재의 원인을 절대자로 간주하는 대전제 자체가 내 안에서 무너져버렸다. 그 붕괴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결코 알 수 없고, 알아내지도 못할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소소한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이 작고 작은 질문들이 모여 아주 희미한 금들을 죽죽 긋기 시작했고, 거기서부터 시작된 균열들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삐걱댔다. 마침내 대학교 시절 만난 책들이 결정타를 날리며 내 신앙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나는 그제서야 모든 호모 사피엔스의 의무는 바로 철학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철학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상적 기반이 근본부터 흔들리고, 마침내 내면의 세계 하나를 무너뜨리고 나서야 사람이 생각하고 보고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실존적 연결성을 절감한 것이다. 나름의 배움과 공부가 그 신체를 통과하며 축적되지 않는 이상 그 존재성은 절대 유지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의 연속성을 결정했던 신앙 체계가 무화되었기에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과 삶의 방향성에 관한 공부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막 걸음마를 익힌 아이처럼. 이제부터 나는 삶과 죽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사후 세계가 없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오늘 마주쳤던 우연한 사건들의 원인을 계획한 배후가 신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1) 허먼 멜빌, <모비딕>, 31쪽

2. 프롤로그2: 상실의 위험에도 돛을 달다

철학에 대한 화두가 새롭게 떠오르며 내게는 전과 다른 질문이 찾아 들었다. 태중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던 나와 달리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고 살아온 다른 이들의 삶과 세계관이 정말 처음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집안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던 한의사 사촌 오빠는 명절 때마다 드리는 예배와 찬송에 늘 코웃음을 쳤다. 어렸을 때는 오빠가 저러다 지옥 갈까 봐 현기증을 느꼈었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오빠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졌다. 그러니까 주말마다 교회에 가지 않고, 기도에 의지하지도 않으며, 절대자의 시선을 단 한 번도 담지해본 적이 없는 삶 말이다. 오빠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는 것일까? 살면서 찾아오는 온갖 사건들의 원인을 뭐라고 생각할까?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불행과 고통, 죽음과 상실은 또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기도하는 손을 잘라버린 이후의 내게 찾아온 질문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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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은 이 내면적 ‘무너짐’의 과정을 나보다 더 격렬하게 겪어낸 사람임이 틀림없다. 우선 그의 어머니가 독실한 퀘이커교도(미국 초기 기독교 종파 중 하나)였다. 유년 시절 아버지를 갑작스럽게 잃고 홀어머니를 챙기며 살아온 허먼은 그의 어머니와 계속적인 갈등에 부딪혀야 했다. 그 갈등의 원인은 허먼 멜빌의 작품 속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모비딕>만 봐도, 그는 결코 유신론자가 아니며, 신실한 종교인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과학과 근대적 이성으로 무장한 무신론자도 아니었다. 동료 작가는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신자도, 불신자도 아닌 자”. 한마디로 딱 정의되기 어려운 그의 종교에 대한 태도가 어머니의 신경을 얼마나 긁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종교적 인식의 경계선에 선 채로 신, 자연과 인간,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종다양한 사건들과 인과들을 탐구하는데 골몰한 것이다. 그 탐구의 끝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누구에게나 바다로 나가야 할 순간, 즉 철학이 필요한 시점이 반드시 온다는 것 아닐까? 에이해브 선장이 흰 고래를 잡으려다 몸의 일부를 잃은 뒤 고통스러운 변신을 겪는 장면, <모비딕>의 후속작인 <피에르, 혹은 애매모호함>에서 무너진 신전을 바라보며 서술하는 장면 등을 보고 있자면 존재가 완전한 탈바꿈을 거치며 겪는 몸부림을 이보다 더 생생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싶다. 인간이 기존의 자신을 버리고 해체하며 깨달음에 도달하는 추상적인 과정을 가장 탁월하게 포착하고 묘사해낼 수 있는 작가는 바로 허먼 멜빌이다.

흔히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고정관념과 편견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이러한 전환의 작업이 얼마나 재밌고 보람찬 일인지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화려하고 웅장한 내 안의 신전이 완전히 무너지고, 그 폐허를 황망히 방랑하는 데서 당신의 공부는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말하기가 아주 조심스럽지만, 이제 막 철학을 시작한 당신에게 나타날 증상들이 있다. 지독한 혼돈과 함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얼마간의 밤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최초의 질문들이 가슴을 틀어막고,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엄습하는 외로움으로 의기소침해질지도 모른다. 사실 재미와 흥분은 그 이후의 문제다. 이 잔해와 먼지 속에서 어떤 방향성으로 다시 걸어갈 것인가? 더듬거리며 부스러기들을 붙들고 나름의 몸부림을 쳐볼 때, 그 과정에서 읽고 쓰고 토론하는 스텝을 밟아 나갈 때, 너무나 미약하지만 그래도 어제보다는 좀 더 초연해지고 단단해진 나를 발견할 때, 문득 깨닫게 된다. 이게 바로 공부의 재미로구나. 이 과정이 없는 채로 붕괴의 폐허만을 무력하게 마주하다 보면 모든 것은 그저 무너지고 해체될 수밖에 없다는 허무주의의 위험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생의 동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나를 뛰어넘는 한 번의 도약으로 비상할 것인가? 혹은 끝없는 허무 속으로 침잠할 것인가? 이 두 갈림길 사이에서 당신을 도와줄 것은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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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상실감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항해를 떠나야 하는 이유는 뭘까? 넘실대는 바다를 코앞에 둔 펠레그 선장의 항구 면접장에 들어설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뮈토스의 종교로 이루어졌던 나의 육지가 무너졌으니, 이제 로고스의 바다로 나아갈 차례가 왔고, 단순한 관찰과 과학 그 이상을 엮어나갈 철학이 내게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이것이 내가 모비딕을 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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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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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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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민

찬영샘의 항해에 동참해 보려 합니다.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들이 기다려집니다^^

한결
Guest
한결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 그 폐허 속에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 묵직힌 울림을 주는 글에 감사드립니다 🙂

수정
Guest
수정

아 너무 멋집니다… !!
폐허 앞에서 방향을 잡고 발을 내딛는 것. 그게 철학을 한다는 거군요. 글 잘 읽었어요. 찬영샘의 앞으로의 항해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