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해 완

관성적인 트랙에서 벗어나는 것, 연구실에서 흔히 표현하는 대로 ‘탈주하는 것’에는 사소한 단점이 하나 있다. 예전에 알던 사람들이랑 말이 예전만큼 잘 안 통한다는 것이다. 내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메이저리그의 세계니까. 그러나 그들에게 나를 이해시키는 작업은 좀 어렵다. 마이너리그의 세계는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데다가, 좌충우돌 길을 만들면서 가다보면 나조차도 내가 뭐하고 사는지 헷갈릴 때가 많다. 그러니 그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은 오죽하겠는가. 처음에는 원래 노선에 각도를 살짝 비틀었을 뿐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옛날 길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바닥으로 탈주

이런 탈주는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에서도 일어난다. 가족을, 고향을, 혹은 한국을 떠나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삶의 조건을 강제로라도 받아들이게 된다. 멀리 떨어져 살면 살수록, 그렇게 예전에 알던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게 적어진다.

그런 이유로 쿠바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코로나 타임’을 공유하는 것은 쉽지 않다. 팬데믹 COVID-19는 말 그대로 전 세계를 휩쓸고 있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가 사회의 어떤 부분을 흔들고 구부리고 허물어뜨리느냐의 여부는 지역마다 다르다. 이곳 쿠바에서 코로나바이러스는 전염병이기 전에 ‘식량 부재’로 먼저 나타났다. 물자 부족이 쿠바의 제일 약한 고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원래도 없던 식재료가 더 없어졌다. 닭고기를 사려는 줄이 다섯 시간씩 이어지고, 대다수의 보데가(한국의 방앗간과 비슷한 곳)에서는 배급표 없이 더 이상 쌀과 콩을 공급하지 않으며, 돼지고기만 팔던 정육점은 모조리 문을 닫았다. 달걀은 시세의 두 배를 주겠다고 해도 어디론가 꼭꼭 숨었다. 다행히 삼 월 내내 닥치는 대로 냉동실을 채워 넣은 덕분에 내가 당장 굶을 일은 없다. 소세지, 스팸, 참치캔 같은 등산용 (혹은 전쟁용?) 식량이 나를 든든하게 지원하고 있고, 룸메이트와 1일 1식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하지만 이걸로 충분할까? 언제까지 코로나바이러스가 계속될 것인가? 바이러스가 끝나더라도 과연 쿠바 정부에 더 많은 식재료를 수입할 만한 외화가 남아 있을까?

이번 상황을 계기로 내 심신이 가장 의지하는 음식이 쌀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이 음식이 사실 내 정신세계를 지탱하는 대들보였다. 쌀을 평소대로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고 비싼 쌀 꾸러미를 급하게 구해서 선반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더니, 거짓말 같이 마음에 안정이 찾아 왔다. 음식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내 모습이 좀 코믹했다. 죽어도 밥심의 한국인이라 이건가. 먹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내 성정이, 먹을 게 넘치는 곳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생긴 게으른 습관이라는 게 이번에 드러났다. 어린 시절 내 철 없는 짓거리들도 생각났다. 할머니는 내가 밥그릇에 밥풀을 남길 때마다 잔소리 하시곤 하셨는데, 그때마다 나는 밥 말고 빵과 케이크를 달라고 대꾸했었다. (마리 앙뚜아네트 드립…?) 아프리카에서는 아이들이 음식이 없어 굶고 있다고 아버지가 호통을 치면 아예 한 술 더 떴다. 내가 이 밥을 다 먹는다고 해서 아프리카 애들에게 없는 밥이 생기는 건 아니라고…… 이건 카르마다. 내게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되돌아가 그때의 나에게 싸대기를 한 대 날리겠다.

 

여하튼 이 모든 것이 새롭다. 내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안함을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도, 매 끼니마다 남은 식량을 계산하며 식사량을 조절하는 것도, 배고픔을 불행이 아니라 신체의 견디는 능력 중 하나로 여겨보는 것도. 모두 내 ‘원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나에게 코로나 타임은 바닥으로 탈주하는 시간이다. 식량이 줄어들고 식생활의 질이 저하된다는 점에서 바닥이지만, 제 잘난 맛에 사는 호모 사피엔스 또한 생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도 ‘바닥’이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그렇게 움직이기 위해 또 먹어야 하는 동물의 운명에서 나는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농업 혁명 이후로 역사 속에서 불공정하게 세습되어 온 가난 때문에 이 생명 활동이 특정 사람들에게 더 과하게 몰아졌을 따름이다. 그 동안 나는 내 덕이 아닌 조건에 기대어 호화로운 거품 위에 둥둥 뜬 채 살아왔다.

지금은 지구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예외 없이 바닥으로 탈주하고 있다. 물론 바닥의 깊이는 장소마다 다 다르다. 쿠바보다 더 심각한 처지에 놓인 인도에서는 수많은 빈민들이 코로나 이전에 굶주림과 싸우며 경찰의 곤봉에 맞아가며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다. 같은 시간, 노르웨이에서는 사람들이 요즘 생연어를 못 먹고 냉동 연어를 사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통탄을 금하지 못하며 마구 화를 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과연 같은 지구에 살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내게 이 말을 전해준 노르웨이 친구가 느끼는 두려움이 내 두려움보다 덜하다 말할 수 없다. 인간 마음에는 재미있는 역설들이 많은데, 그 중 하나는 얕은 고난이 더 깊은 공포를 잉태시킨다는 것이다. 높은 곳에 처할수록 추락이 더 무섭다. 바닥의 심연은 까마득하게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을 것이고, 추락의 깊이를 가늠해본 적이 없으니 최악을 상정할 것이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얼마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마음 속 공포가 CG 효과를 일으키면서 한 편의 스펙터클한 재난영화가 되어버린다.

“쿠바인들은 원래 힘들게 사니까 이번 코로나 사태 때도 괜찮을 거야”라는 내 친구의 다소 무례한 말이 옳다면, 그건 쿠바인들이 쓸데없는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늘 바닥을 가까이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충분히 힘들지만 그렇다고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릴 깜냥이 된다. 그래도 이곳의 길거리는 시체가 그대로 방치된 에콰도르 같은 상황에 도달하지 않았다. 인종차별이 난무하는 뉴욕처럼 공기가 스산하지도 않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지금 내가 쿠바인들을 닮아야 할 게 있다면 바로 이런 실용적인 자세다. 바닥에 단단히 발을 붙여야 쓸데없는 공포가 올라오지 않는다.

배고픔이라는 병, 고립이라는 죽음

집에 갇혀서 이런 저런 잡념을 하던 요즘, 당연한 사실이 당연하지 않게 가슴에 와 닿았다. 병에 걸리면 배가 고프다. 그러니까 병과 굶주림은 한 세트다. 이유도 간단하다. 병든 몸으로는 경제 활동(식량 사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 활동이 멈추면 신체는 음식을 섭취할 수 없고, 영양분이 없으면 세포들은 신진대사를 할 수가 없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신체의 기능이 저하되면 병인을 극복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악순환이다. 그래서 자연에서는 병 든 개체가 단기간에 회복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천적에게 잡아먹히거나 조용히 단명한다.

병이 곧 배고픔이요, 배고픔이 곧 병이라는 공식은 인간사에서도 유효하다. 물론 경제를 발달시킨 우리로서는 배고픔이 다른 동물들보다 더 복잡하게 표현되긴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다른 점은 어떤 종보다도 병을 사회적인 것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이 아닐까. 네가 아픈 것을 나의 문제로 여겨 주고 돌봐주는 게 공동체다. 이 공동체의 단위에는 가족, 친척, 마을 커뮤니티, 종교, 최근에는 국가 복지 제도까지 포함된다. 물론 돌봄을 구실 삼아 신체에 개입하여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차별하고 또 유기하는 방식도 (공동체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각양각색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우리는 사회망 속에서 병자가 병 때문이 아니라 굶어서 죽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그래야 우리도 아플 때 그 망에 잠시 기댈 수 있을 테니까. 이 무언의 약속은 배고픔이라는 병에 대항하여 우리가 발명한 치료제처럼 보인다.

그런데 만약 이 병이 역병이면 어떡하나? 인간의 접촉을 매개 삼아 세를 불리는 전염병의 경우, 공동체는 병자에게 힘이 되기는커녕 병자 때문에 다 함께 전멸할 위기에 놓인다. 사회가 무너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고립 상태는 사람들을 배고픔이라는 또 다른 병으로 몰아넣는다. 사람을 연결해주고 또 그 연결망으로 활기를 얻는 인간식 ‘사냥 활동’인 경제는 완전히 멈춰버린다. 병이 배고픔을 부른다면 역병은 모두를 아사로 몰아가는 셈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읽다보면 왕의 부덕함을 비판할 때 ‘기근과 역병’이 창궐하는 시절이었다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예전에는 민중의 생활고를 강조하는 의례적인 묘사이겠거니 넘겼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정말 무시무시한 시절이었다. 이 두 재난이 손을 잡고 늘 쌍으로 사람들의 목을 조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도 재난의 테두리는 동일하다. 코로나는 전 세계에서 배고픔을 토로하는 수억 명의 아우성과 함께 고난의 이중주를 연주하고 있다. 코로나로 죽느냐, 굶어 죽느냐, 아니면 둘 다 시달리다 죽느냐! 코로나에 걸리기 전에 먼저 굶어 죽겠다면서 경제 활동을 재개하라는 미국의 성난 시위대와, 그 앞을 수술복과 마스크를 입고 혈혈단신으로 가로막은 의사의 대치는 우리가 어떤 재난을 맞닥뜨린 것인지 단 한 장면으로 요약한다. 개인뿐만 아니다. 정부들도 ‘방역’과 ‘경제’라 불리는 두 방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인도처럼 몽둥이로 때려서라도 사람들을 집에 강제로 격리시키거나(그러자 사람들은 ‘고향집’에 가겠다며 길거리로 우르르 몰려나왔다), 경제를 죽이는 게 코로나로 사람이 죽는 것보다 더 애끓는 일이라며 거의 손을 놔 버리는 브라질 같은 나라도 있다(브라질 대통령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감기에 불과하다’고 말한 후부터 확진자가 미친 듯이 치솟는 중이다). 심지어 세계 최고의 방역 국가라고 칭찬 세례를 받으며 당장의 위기를 피한 한국에서도 경제가 망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나오고 있다. 이제 이 국면이 지나고 나면 빈사 상태에 빠진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이른바 경제 성장이라는 명분하에 수많은 결정들이 합리화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쾌락으로 몸집을 키우고 공포로 정당성을 얻으니까.

그러나 이 공포에는 실체가 있다. 식량 문제는 현재 수많은 사람들의 턱 밑까지 쫓아와 목을 조르고 있는 진짜 현실이다. 쿠바에 사는 나에게까지 미치는 현실이다. 코로나라는 강력한 변수를 인정하고, 무조건 ‘파이’를 키우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낡은 낙관을 버리고, 고립된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활동하면서 식량을 적절하게 생산 및 분배할 수 있는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지 않는다면…… 코로나 트라우마는 코로나보다 더 오래갈 것이다.

코로나 역병 때문에 고립된 공동체에서 부각된 문제에는 배고픔만 있는 게 아니다. 죽음의 문제도 있다. 전염병은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죽음의 문제를 일상 속으로 끌어들인다. 특히 코로나는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신병이라 더 드라마틱하다. 그런데 이 충격에는 ‘나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의 직시뿐만 아니라, ‘저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가’라는 한탄도 섞여 있다.

우리는 죽음도 사회적으로 경험한다. 그런데 역병으로 죽는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 죽을 수가 없다. 철저하게 고립된 채로, 바이러스를 탑재한 감염원이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죽는다. 관계를 박탈당한 개인에게는 정체성이 없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고립은 또 다른 죽음일지언대, ‘익명의 아무개’가 된 채로도 의연하게 삶의 마지막 순간을 겪을 만큼 멘탈이 강한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음압병실에서 방호복을 입은 간호사의 손을 잡고 가족들과 영상통화로 마지막 말을 나누는 것은 차라리 테크놀로지의 눈물겨운 승리다. 코로나에 강타당한 에콰도르의 도시 과야킬에서는 처리하지 못해서 쓰레기봉투로 감싼 시체가 집집마다 들어 있다. 한국에서도 집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다가 노인들이 홀로 숨을 거두는 일이 있었다. 뉴욕에서 익명의 시체들을 무인도에 집단 매장하는 모습은, 우리가 평소에 회피하고 또 미화하고 싶어 하는 평화로운 죽음과 거리가 멀다. 의료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 속에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렸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죽는 사람들이 최대한 ‘인간적으로’ (즉, 우리가 속한 문화의 방식대로) 고립되지 않고 마지막 순간을 보냈으면 하는 바라는 마음도 있다.

코로나의 필살기는 사망률이 아니다. 속도다. 우리에게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곧장 덮쳐온다.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 활동이 제거당하면, 우리는 자연계의 죽음을 그냥 있는 그대로 직면하게 된다. ‘하나 뿐인 나의 어머니’의 눈물 겨운 마지막 모습이 아니라, 바이러스에 침투당해 균형이 무너져버린 한 마리 사피엔스의 ‘몸’을 보게 된다. 이 경험은 당연한 말이지만 강도가 세다.

코로나보다 더 높은 사망률과 사망자를 내는 치명적인 질병들은 많다. 8.5%의 사망률에 매년 160만 명(합병증까지 합치면 380만 명)의 생을 마감시키는 당뇨병도 있고, 매 달 지구상에서 75만 명을 꾸준히 죽이고 있는 아사도 있다. 하지만 이런 병들은 역병과 달리 만성적으로 우리 현실 안에 정착해왔다. 어쩌면 우리는 역병의 기습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이 기습에 대응할 수 있을 만큼 나와 타인의 죽음을 연습할 기회가 평소에 너무 없었는지도 모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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