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변태 도덕론자, 호미미 - 3)

이호정(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억압을 위탁받은 담당자, 가족

결핍, 그것은 어떻게 해서 우리 안에 자라날까. 변태 호미미들은 나를 무진장 괴롭혔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결핍을 ‘심하게’ 느끼기 때문에 ‘변태’라는 이름표를 붙인 게 아니라는 점이다. 결핍을 느낀다는 것, 이것은 욕망의 입장에서는 그 자체로 변태적이다. 조금 느낀다고 해서, 크게 불편하지 않다고 해서 멀쩡한 게 아니다. 우리의 욕망은 상당히 왜곡되어있다.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말하는 ‘욕망기계들’은 늘 어딘가로 흐르며 ‘짝짓기’한다. 보면 볼수록 참 멋진 사유다. 기계들은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결핍 같은 건 모른다. 조각조각 파편화된 부분대상들은 그저 순간순간의 짝짓기를 끊임없이 실행한다. 그와 같은 짝짓기에는 어떤 목적이나 방향 같은 건 없다. 즉 우리 자신은 무언가를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 자체로 삶인 것이다.

하지만 욕망의 이런 활기 넘치는 힘은 어느 순간부터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게 된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욕망의 배치가 변하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했다. 그는 산업화‧도시화의 산물로 등장하게 된 ‘부르주아 가족’에 주목한다. 과연 현대 산업사회의 가족제도에서 그가 본 건 무엇이었을까? 프로이트는 신화에서 유래한 이름을 붙인 자신의 학설을 공표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이었다.

산업화 이전에 가족은 ‘경제 공동체’였다. 대다수가 농업 또는 수공업으로 살림을 꾸렸고, 온 가족이 생계유지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한 집에 함께 살았다. 구성원들도 훨씬 다양했다. 조부모, 부모, 하인, 유모, 아이, 친인척 등등. 그들 모두에게는 같이 ‘경제’를 운용해나가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먹고 살아야 했으니 말이다. 가족 사이의 애정 같은 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산업화를 거치며 새로이 출현하게 된 ‘부르주아 가족’은 그것이 꾸려진 기반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아빠-엄마-아이’의 모델로 축소된 이 새로운 형태의 가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아무리 함께 살아도 ‘사랑이 없으면’ 이들은 서로를 ‘가족’으로 여기려 하지 않았다. 활발한 이혼율이 그 증거다. 산업화 이전에는 사랑이 부재하다고 해서 가족이 해체되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다. 지금은? 사랑이 언제 식나 보자~ 하고 눈에 불을 켜고 서로를 감시할 정도다. 바로 그 사랑의 중심에는 ‘아이’가 있다.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는 행복한 가정, 부르주아 가족의 다른 이름은 ‘스위트 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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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우리의 욕망이자 무의식을 바로 그 ‘아빠-엄마-나(아이)’로 이루어진 가족 삼각형 안에서 이해하는 개념이다. 그 내용은 오이디푸스 신화와 비슷하다. 남자아이는 성장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과 함께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을 갖는다. 그 욕망은 시기가 지남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계가 바로 심리적 ‘거세’를 당하는 때다. 남아는 아버지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건 무엇을 뜻할까? 바로 남아의 욕망이 ‘충족될 수 없음’의 상태, ‘부족’한 상태, 즉 ‘결핍’의 상태가 생긴다는 걸 뜻한다.

그런 식의 ‘거세’는 남아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여자아이에게도 거세의 과정이 존재한다. 다만 여아는 그것을 좀 더 씁쓸한 방식으로 겪는다. 여아 역시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갖지만, 성장하면서 남성의 성기를 보게 되고 자신에게는 그것이 ‘없음을 봄’으로써 심리적 거세를 당한다. 결국 남아나 여아 양쪽 모두에게는 ‘욕망의 근원적인 결핍 상태’가 주어진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무의식의 결핍’을 아주 어릴 때부터 ‘장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화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현실에서는 과연 어떻게 작동하게 될까? 부르주아 가족의 핵심인 ‘아이’의 출현이 그 모든 걸 설명한다. 아이인 ‘나’는 가족 내에서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로 강력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가족의 일대사가 무엇이던가? ‘아이의 돌봄과 교육’만큼 부모의 열정을 끌어올리는 문제도 몇 없다. 우리의 아이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보호’받아야 하고, 충분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것은 인류 보편의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근대 이전의 시대에 그것은 씨알도 안 먹히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중세시대에 아이는 지금처럼 관심과 애정을 듬뿍 받아야 하는 ‘미성숙한’ 존재가 아니었다. 아이는 그저 크기가 좀 작을 뿐이지, 어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온전한’ 존재였다. 그러니까 아이가 특별대우를 받아야 할 존재가 된 건 인류 역사에 있어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근대 이후 ‘부르주아 가족’이 출현함과 동시에, ‘사랑받아 마땅한 나(아이)’도 태어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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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에 아이는 지금처럼 관심과 애정을 듬뿍 받아야 하는 ‘미성숙한’ 존재가 아니었다. 아이는 그저 크기가 좀 작을 뿐이지, 어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온전한’ 존재였다.

바로 그 ‘사랑받을 존재로서의 아이’, 그것의 전제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건 바로 아이는 ‘존재적으로 부족한 인간’이라는 거다. 가족 내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도대체 어떤 일들이 행해지고 있는지를 똑똑히 보라! 그것은 아이를 끊임없이 ‘무능력한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다. “조심해~ 다치니까 엄마가 해줄게.(넌 모자라서 이런 일은 못해.)”, “밖에 나가 논다구? 밖이 얼마나 위험한데~! 엄마랑 같이 안전한 키즈 카페에 가자~(넌 칠칠맞아서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 그러니까 내가 편안하게 앉아서 감시할 수 있는 레이더망 안에 있어.)” 부모의 사랑에 의해 아이는 자신이 ‘거세된 존재’임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그리하여 아이로서 대우받고, 아이로서 자신을 규정함으로써 스스로의 내면에 결핍을 더욱 더 뿌리 깊게 내면화하는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간다…….

요즘에는 이런 유의 ‘보호’와 ‘사랑’이 심지어 성인 이상의 자녀에게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뻗치고 있다. 그들은 얼마나 못난 존재로 살아가는가. 나 역시 그랬다. 부모에게서 사랑을 한껏 받은 자녀들이 과연 자신의 존재를 떳떳하게 느낄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 그들은 철저히 ‘무능력하게’ 길러지고 있다. 요리 하나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어른’이라 여길 수 있을까? 그들은 영원히 ‘아이’인 채로 살아간다. 이게 바로 가족 내 ‘사랑’의 실상이다.

  사회구성체에 의한 억압의 위탁과 동시에, 이 억압에 대한 욕망적 구성체의 왜곡과 이전이 있다. 억압의 위탁된 담당자, 또는 차라리 억압에 위탁된 담당자, 그것은 바로 가족이다. 한편 억압된 것의 왜곡된 이미지, 그것은 근친상간 충동들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오이디푸스화는 이중 조작의 열매이다. 탄압적‧사회적 생산이 억압적 가족에 의해 대체되고, 또 후자가 억압된 것을 가족적 근친상간 충동들로 재현하는 이전된 이미지를 욕망적 생산에 주는 것은 동일한 운동 속에서이다.

(질 들뢰즈‧펠릭스 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213쪽)

‘오이디푸스화는 이중조작의 열매이다.’ 가족 삼각형은 우리에게 이중의 조작을 행했다. 처음에 ‘결핍’은 사회구성체로부터 생겨났다. 왕 또는 독재 권력의 횡포에 의해, 대다수의 삶이 나락에 빠지기도 하고 극심한 빈곤을 겪기도 했다. 외부에 의해 생겨난 결핍이 많은 이들의 삶을 좌지우지 했던 시대, 이제 그러한 사회적 억압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에 따라 우리의 삶은 자유를 얻은 듯 했다. 더 이상 억압으로 인한 괴로움 없는 삶! 우리는 해방되었다!

그러면 이제 ‘결핍’ 같은 건 없어야 하지 않나? 아니, 우리의 삶이 이렇게나 풍족해졌는데 ‘부족함’을 느낄 거리가 있냔 말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우린 여전히 온갖 종류의 ‘결핍’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대체 이게 뭐지?! 결핍은 우리 이전의 시대보다 더욱 더 교묘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바로, ‘가족’이라는 사적 공간 안에서.

여기에 더 이상 외부의 탄압은 없다. 억압을 위탁받은 가족이라는 공간 내에서,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결핍을 느끼도록 차근차근 교육을 받는다. 근친상간 ‘금지’를 내면화하고, 스스로의 내면에 ‘새겨져있는’ 근원적 결핍을 받아들이기. 그건 모든 가족에게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딱히 억울할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사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내면에, 무의식에, 욕망 기계의 차원에! ‘존재적 결핍’을 장착시키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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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억압을 위탁한 자본주의

가족에게 ‘억압을 위탁’한 건 누구였을까? 과연 누가 우리 스스로 ‘결핍’을 밀어 넣길 바랐을까? 그건 바로 ‘자본주의’다! 자본의 세상 위에서 가족은 유독~ 신성하다. 좋은 가족을 이루면 만사가 해결될 것처럼 느껴지고, 그러기 위해 가족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은 넘쳐나고 있다. 가족의 행복,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소중한 가치다. TV너머로 훈훈한 가족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부러워지던가~ 그에 따라, 우리의 욕망은 가족이라는 다트판 위에 우후죽순 꽂힌다. 자본주의가 욕망을 가족에 ‘묶어놓는’ 것이다.

욕망을 가족에 묶어둠으로써, 욕망기계는 끊임없이 결핍의 상태에 내몰린다. 실제로 가족이라는 사적 공간 내에서 결핍이 생산되는 순간을 앞에서 보지 않았나. 자본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욕망이 결핍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놓고는, 이렇게 말한다. “욕망은 원래부터 결핍이야.^^” 그러니 맘~껏 욕망하란다. 최대한 ‘부족해’하라고. 실제로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 그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왜 우리가 결핍을 느끼길 바랄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돈이 증식하기 위해서는, ‘상품’이 팔려야 하기 때문이다. 돈이 돈을 낳는 이상적인 시스템이 원활히 굴러가는 데에, 상품만큼 혁명적인 장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상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쉴 틈 없이 팔리고, 또 팔려야한다. 자본주의는 상품이 정말 미친 듯이, 날개 돋친 듯이 팔리길 원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물건에는 한계가 있고, 또 필요한 물건들은 이미 충분히 가졌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핍’이 필요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끝없이 목말라 하기를 절실히 바란다. 그래야 물건을 계속해서 사고, 갖고 싶어 할 테니까. 상품은 우리에게 ‘당신의 결핍을 채우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를 기만한다. 마치 우리 자신이 그것을 원하는 것처럼 꾸며놓고, 우리가 그걸 구매하는 순간 욕망이 충족되는 듯한 환상을 느끼도록 자신을 설계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숱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아무~리 내가 바라던 걸 사도, 이것만 있으면 진짜로 인생 끝나도 좋을 만큼! 멋진 걸 가져도, 이상하게 갖고 싶은 게 ‘또’ 생긴다는 사실을. 이 현상을 조금만 깊이 음미해보면, 정말 ‘소름 돋는 일’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어떻게 사도~ 사도~ 사고 싶은 게 또 생기지? 끝을 모르는 이 욕망을 대체 언제까지 채워주어야 한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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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은 결코 자연도 아니고, 우리의 본능도 아니다. 그것은 이처럼 ‘만들어진’ 사회적 부산물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오이디푸스’를 외치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오이디푸스로 태어나지 않았다, 당신은 오이디푸스를 당신 속에 밀어 넣었다. 또 당신은 환상에 의해, 거세에 의해 오이디푸스에서 빠져나오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거세는 당신이 오이디푸스 속에, 즉 당신 자신 속에 밀어 넣은 그것이다. 섬뜩한 순환이로다.

(같은 책, 554-555쪽)

우리는 근원적 결핍을 가진 오이디푸스로 태어나지 않았다. 오이디푸스라는 그 가족 삼각형을 우리 안에 밀어 넣었을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가족 삼각형 속에 ‘거세’라는 결핍을 또 밀어 넣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결핍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정말이지 ‘섬뜩한 순환이로다.’

나는 내 안에서 그 섬뜩한 순환이 아주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빠-엄마-아이(나)’로 구성된 가족 삼각형이 내 안에서 아주 뚜렷한 구도를 이루며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거세에 의해 근원적 욕망이 결핍된 나머지,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 어린 아이가 바로 ‘연두’다. 결핍되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잔뜩 손에 쥐어야만 하는 ‘나’의 다른 이름, 연두.

두 번째로, 도덕과 이상을 강요하며 결핍을 생산하는 아버지가 이번 장의 주인공인 ‘호미미’다. 호미미는 도덕적 이상과 사회적 규범을 상정해놓고, 나 자신과 타인에게 ‘이렇게 되어야만 해!’라고 마구 윽박을 질러댄다. 그럼으로써 이상적인 모습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과 타인에게 계속해서 결핍을 생산케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족 삼각형을 완성시켜줄 어머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결핍을 생산하는 호호미가 있다. 호호미는 연민과 동정으로 나를 쓰다듬으며, 내가 질투라는 문제와 제대로 대면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바로 이 합리화의 달인 호호미를 만나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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