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사랑의 자유를 찾아 나선 여자

김석영 (남산강학원 청년스폐셜)

5. 우리 VR시대의 사람들

우리는 무엇을 ‘성’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중요한 자리를 내어주고 있을까? 아주 당연하다는 듯 우리는 성관계, 성기적 쾌락-오르가즘- 등과 관련한 ‘밀폐된 곳에서 행하는 어떤 일들’을 ‘성’이라고 말한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성취감 혹은 좌절감이, ‘그것이 얼마나 극대화되었느냐’가 ‘내 성은 자유로운가?’의 척도다.

이 ‘자유’를 말할 때 이 강력한 힘이 우리 삶을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 우리가 ‘성기적 쾌락의 정점’을 쫓는 과정, 혹은 거기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의 몸과 감정 상태는 어떤지, 혹은 그 정점 이후의 상태는 어떤지, 이것들이 우리가 어떤 정신으로 살게 하고, 음식과, 일, 내 앞에 있는 사람, 시간을 어떻게 대하게 하고 있는지 등의 이야기는 쏙 빠져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성이 ‘어쨌든 억압되어선 안 되는’ 것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탓이다.

이건 ‘성’이라는 것을 정의하는 이건 자본주의 시대, 그리고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다운 아주 독특한 방식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생겨나는 ‘성’과 맺는 아주 기이한 관계방식이다. ‘성’은 무척 좁은 범주만을 가리키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성의 자유를 허하라!’라는 말 뒤에 ‘그것이 내 생활을 어떻게 만들든’이라는 파격적인 전제를 두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coffee-3163596_1920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케이크 한 조각을 먹을 때 이 케이크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나는 왜 이걸 소비하게 되었는지, 우리의 행위들이 어떤 거대한 사이클을 만들고 강화하고 있는지 일일이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한 사람의 눈으로 소화하기엔 너무 거대한 체제 위를 살아가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스케일에 압도된 우리는 그러한 ‘인과의 고리들’에서 쉽게 눈을 돌린다. 그런 우리에게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들, 우리를 움직이는 모든 힘들은 모두 조각조각 나뉜 파편적인 것들로 느껴진다.

그리하여 다른 일상의 영역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그 중 ‘좋은 것’이라 여겨지는 것들만 골라서 극대화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그 ‘좋은 것’이 많은 삶이 ‘좋은 삶’이라 여긴다. 그 ‘좋다고’하는 것이 생활 전반과 어떻게 연관되어있는지를 쏙 빼고 남은 행위들, 경험들, ‘좋은 것’들의 세계, ‘가상현실’의 세계다.

이런 전제가 베이스로 자리 잡고 있는 한, 종종 탄식처럼 ‘절제’를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걸 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올라오는 각종 충동들을 조절하고, 스스로 편안하고 이로운 방향으로 삶을 이끌고 가는 ‘윤리 세우기’에 젬병이다. ‘성’에 있어서도 그렇다. 이 거대한 전제에 매번 패배하기 때문에 성을 ‘키울’ 의지는 있어도 성을 ‘다룰’ 의지는 없다.

중요한 포인트는 그래서 우리가 그것들을 정말 잘 즐길 수 있느냐 하면, 아니라는 거다. 우리가 말하는 그 ‘성’은 이미 많은 것들이 ‘거세된’ 성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우리가 서로를 어떤 존재로 바라보고, 대하는지), 우리 몸의 기운 변화, ‘성’이라 불리는 것의 추동력이 삶에 가져올 수 있는 변화와 균열 등등이.

그런 것들을 다 무시한 ‘성’만을 가지고 놀 뿐이라서, 아무리 극대화되어도 금방 비루하고 목마르게 느껴질 뿐이다. 아무리 화려한 기술과 효과를 자랑하더라도, 어찌 됐든 VR 체험 백만 번인 것이다!

vr-1992973_1920
어찌 됐든 VR 체험 백만 번인 것이다!

6. ‘성’과 ‘일상’을 묶을 때 피어나는 힘

우리가 ‘성’을 명명하고 범주화하는 방식, 그 방식을 바꿀 때라야 성은 본래의 원초성을 되찾을 수 있다. ‘VR’이 아니라 진짜 ‘모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우리가 ‘성’이라고 부르는 것(성기적 쾌락)은 당연히, 애초에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가 못 보던 그 많은 연결고리들을 보다 더 넓게 느끼는 것이다.

‘성’을 떠올릴 때, ‘성욕’이 올라올 때, 그것이 어디서 왔고, 또 우리의 몸과 삶에 어떤 영향을 가지고 오는지를, 그리하여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함께, 또 집중해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성욕을 떨쳐내고 털어내 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내 몸의 상태를 느끼고 총체적 즐거움을 찾는 것으로 시작된다.

계속해서 우리를 끌어당기는 ‘성기적 쾌락’, ‘오르가즘’의 앞뒤를 살펴보자. 물론 그 순간 나름의 즐거움이 있겠지만, 내 몸이 느끼는 피로와 강박과 공허함과 지루함, 다른 사람들이나 일상의 다른 영역들과의 관계 등등을 모두 살펴봤을 때, 재현해야만 할 것 같은 판타지를 쥐고 쫓으며 사는 게 정말 즐거운 일인가?

기민하게 보면 충동들을 조율하고 휩쓸려가지 않을 때 ‘오르가즘’에 도달하고 꺼지는 것이 반복되는 것보다 훨씬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쾌락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이 쾌락은 쾌락을 ‘성기적 쾌락’으로 국한시켰을 때는 카운트되지 않는다. 그 ‘블라인드 상태’를 벗어났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의 감정인 것이다.

이렇게 전반적 일상을 바라보는 것이 ‘성’(성기적 성)을 억압하고 축소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 ‘현실’의 세계에는 VR의 세계에는 없는 ‘긴장도’가 있다. 우리는 전혀 다른 것을 즐기게 되는 것이다.

couple-1030744_1920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꽂힐’ 때, ‘이 힘을 어떻게 쓸까?’를 고민하기 시작하면 그 추동력이 우리가 알던 기존의 좁고 밀폐된 ‘성’을 향해 달려가는 힘이 아니라 삶 전반을 변화시키는 훨씬 넓고 광활한 힘이 된다. 저 사람에게 이로운 것, 나에게 이로운 것, 삶 전반을 생각했을 때 우리는 어떤 방식들로 서로를 이끌 수 있을지, 어떤 방식으로 거리와 관계방식을 조정해야 할지가 포함된다.

이렇게 되면 ‘일상’은 ‘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추동력이 정점과 허무함을 오가며 재미없게 끝나지 않고 오랫동안 긴장도를 유지하도록 해주는 장이 된다. ‘성-추동력’도 ‘일상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상에 전에 없던 타자를 끌어들이고, ‘내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까지’ 생각해보게 하는, 고정되어있던 나의 생각과 일상에 균열을 내어주는 힘이 된다.

그리고 또 이 힘은 얼마나 오락가락하는가. 비가 쏟아지기도 하고 바싹바싹 마르는 해가 뜨기도 하는 날씨처럼 변화무쌍하다. 그래서 ‘성’이 좁은 침실을 벗어나 ‘일상을 다이나믹하게 만드는’, 드디어 ‘자연’과도 같은 힘이 되는 것이다.

waves-4218827_1920
‘일상을 다이나믹하게 만드는’, 드디어 ‘자연’과도 같은 힘이 되는 것이다.

7. ‘성의 쾌락’은 도처에 있다

‘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 ‘성’과 관계 맺는 우리의 방식과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겪은 사건들, 억울한 감정과 속수무책이었던 상황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당시 나에게 있었던 것은 ‘남친에 대한 좋은 감정’, ‘섹스의 쾌락’, ‘좋은 사람을 얻었다는 만족감’, 그뿐이었다. 나는 그 영역(좁은 성으로서의 ‘성’의 영역)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좋았고, 거기에 막힘이 없길 바랐다. ‘콘돔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마치 자유가 거기에 있는 듯했고, 그 말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에 따라왔던 사건, 임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그 상황은 나에게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왔다. 임신은 성관계와 자연스러운 인과를 가진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매끈한 판타지 위를 달리고 싶었던 나였기에 거기서 발생한 사건을 받아들여 보자는, 울퉁불퉁한 현실에 발을 붙이자는, ‘애를 낳자’라는 남자친구의 말은 전혀 위로도 도움도 되지 않았다. ‘임신’이라는 큰 변화를 받아들일 힘도, 무슨 일이 생기든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겠지 하는 배짱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이 억압되고 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성은 이미 너무 ‘비대’했다. 내가 ‘감당’하기는 차치하고, ‘즐거울 수 있는’ 범위를 넘도록 커져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걸 캐치하지 못하고 어디선가 배운 대로 ‘성적 자유’를 외치며 ‘좁은 성’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억압되어 억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깊은 오해가 여기에 끼어 있다. ‘아이를 낳는 것’을 나의 유일한 원초적-본능이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길이라 생각했던 것은,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것이 나의 유일하고 넘을 수 없는 아이덴티티로 여기는 것과 다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까? 내가 오롯이 ‘생물학적 여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임신(했을지도 몰라) 사건’으로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던 그 짧은 순간에도, 또 사실 그저 그와 연애를 하고 있을 때에도 ‘결혼이라는 걸 한다면……’ 바뀌게 될 나의 일상, 친구들과의 관계, ‘여행을 못 가겠지?’ 등등의 문제들이 머릿속을 오갈 정도로 나에겐 다양한 가치들이 있었고, 나는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복잡한 존재가 아니던가.

pregnant-1245703_1920

‘나=생물학적 여자’, ‘여자이니 유전자적 끌림과 임신을 통해 행복을 찾아야 해’라는 말은 너무나도 현실을, 나의 일상에서 힘겨루기를 하는 다양한 바람과 추동력들을 보지 못하는 관념적인 발상이었다. ‘성’을 ‘성기적 쾌락’에 묶어놓고 그것이 단독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관념처럼 말이다.

그런 오해에서 벗어나 ‘성’이 ‘좁은 성’, ‘침실’을 벗어나 넓고 광활한 힘으로, ‘일상’과 결합되며 나올 때, 그것은 독보적이고 지켜줘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를 이끌고 추동하는 다양한 힘들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비로소, 일상을 구성하는 다른 ‘힘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자세히 살펴보라. 우리의 ‘성-본능’은, ‘성적 즐거움’은 ‘침실’이 아니라 일상에서 그 모든 힘들을 ‘조율’해나가며, 몸의 능동성을, 활력을 찾아가고 만들어가는 모든 순간에 존재한다. 성기결합, 오르가즘, 임신과 출산이 아니라 ‘일상의 긴장도’에!

댓글

ava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