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찬영 (감이당 장자스쿨)

(전편에 이어서)

이쯤 되면 종말론이 불러일으키는 남근적 열정에 아주 진저리가 쳐진다. 삶이 없는 진보, 죽음을 향한 희망. 이 말이 도대체가 성립 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삶을 몽땅 베팅한 이 위대하고 화려한 여정, 그 이후가 과연 무엇일지 진지하게 살펴봐야 한다. 광기와 폭력의 에너지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아슬아슬한 상태의 신체는 사실 무력할 뿐만 아니라 무감(無感)하다. 에이해브도 마찬가지다. 흰고래 외에는 눈에 뵈는 게 없다. 결국, 내가 에이해브에게 끌렸던 이유 역시 한 겹 들춰보니 가장 종교적인 배치의 연장 선상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기에, 그토록 추구했던 절대자에 대한 ‘아니오’의 선언은 전혀 새로운 철학이 아니었다는 것이 중간 결론이다. 아니, 어쩌면 에이해브에 대한 분석이 새로운 스타트 지점으로 나를 데려다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른 배치는 어떻게 가능할까? 소멸과 합일의 타나토스가 아니라 계속된 선분을 그릴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이제부터의 미션은 이러하다. 살려야 한다! 무엇을? 삶을, 지금 이 순간을, 에로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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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과 합일의 타나토스가 아니라 계속된 선분을 그릴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작년 2학기, 기해년의 장자스쿨이 딱 반환점을 돌았을 때, 에이해브와 함께 일 년의 공부를 돌파해보리라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나는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피식 웃음만 나온다. 감이당의 모든 대중지성 과정이 그렇겠지만, 우리네 장자스쿨도 한 학기 에세이를 마치고 나면 함께 회식 자리를 가지며 회포를 푼다. 다들 에세이가 끝나 신나고 왁자지껄한 분위기인데 나 혼자 ‘에이해브 가지고는 뭐가 안 나오네. 아, 진짜 3학기 어떡하냐…’하면서 구석 자리에 앉아 조용히 머리를 굴렸던 기억이 난다. 함께 고생한 도반들과 수다를 떨며 맛있는 음식까지 즐기는 회식 자리를 정말 좋아하는데, 그때만큼은 참 마음이 복잡했다. 분명 뚜렷한 지도를 가지고 출발했다고 여겼는데, 난데없이 동력을 잃고 어딘가에 멈춰버린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 공부를 지속하게 한 엔진이 꺼졌다면, 다른 엔진을 또 찾는 수밖에 없다. 엔진이 꺼졌기로서니 우두커니 멈춰 있을 수야 있겠는가? 어떻게든 걸어보고 뛰어보고 도움도 청해보고 길도 헤매보고 온갖 짓을 저질러 봐야 하는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 끝에 내가 가졌던 단 하나의 실마리는 이러했다. “고전이 괜히 고전일 리가 없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만 권의 책들이 전 세계에서 쏟아져 나올 텐데, 왜 고전은 불멸할까? 그리고 영원히 존속될 것이라고 왜 확신하는가? 어딜 들여다봐도, 또 어떤 지점에 서 있더라도 늘 새롭고 다른 길을 알려주니 고전이겠지. 2학기 때 제대로 고꾸라졌지만 3, 4학기 때도 <모비딕>을 변함없이 붙들 수 있었던 동력은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이 믿음 하나에서 비롯되었다. 너무 거창하지만, 이게 바로 주역에서 말한 유부有孚(믿음을 가지고 있음)의 마음이요, 왕유공야(往有功也: 나아가면 공로, 혹은 공부와 깨달음이 있음)라는 문장에 적합한 상황 아닐까? 오로지 고전에 대한 믿음, 그리고 어찌 됐든 길은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품고 다시 꼼꼼히 <모비딕>을 들여다보았을 때, 내가 새롭게 발견한 의외의 캐릭터가 있었다.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2학기 끝을 기점으로 글의 방향성이 확 바뀌며 전체 전개가 두 갈래로 갈라져 나오고, 4학기 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완전히 다른 결론 위에 서 있었던 나를 말이다. 글쓰기야말로 멈추지 않는 운동성이다. 지구상의 어떤 위대한 작가도 자신의 원고가 마지막 방점을 찍는 바로 그 순간의 앎을 감히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난 작가도 뭣도 아니지만, 이 경이로움을 아주 조금이나마 맛본 것만으로도 기해년의 장자스쿨은 내게 더할 것 없이 충만했고 풍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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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대한 질주 속 미시적 생명선

하지만 뒤섞이고 뒤엉킨 삶의 실오라기는 날줄과 씨줄로 엮이고, 평온한 날씨는 반드시 폭풍과 교차한다. 우리의 삶에도 온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결같은 전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585)

地天泰 

九三, 无平不陂, 无往不復 (…)

象曰, 无往不復, 天地際也

평평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것은 없으며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다.

상전에서 말했다.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다 함은 하늘과 땅이 사귀는 것이다.

(고은주 풀어 읽음, 낭송 주역, 북드라망, 2019, 94)

<모비딕>에서는 반복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한다. 끝없이 나아가기만 하는 것은 없고, 나아가면 반드시 되돌아감이 있다는 이 대사는 놀랍게도 에이해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독백하는 장면인데, 물이 명상의 원천이라 그런 것일까? 그는 운명의 본질적 원리를 간파했음이 틀림없다. 그의 대사와 거의 똑같다시피한 문장이 주역의 11번째 괘, 지천태地天泰 에서도 나온다. “无平不陂(무평불피), 无往不復(무왕불복)” 공자께서도 ‘无往不復(무왕불복)’ 딱 네 자만 상전에서 설명을 덧붙이신다.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다 함은 하늘과 땅이 사귀는 것이다.” 날씨가 잔잔했다가도 벼락과 돌풍이 부는 변덕을 부리는 것은 먼 망망대해에서는 자주 있는 일일 텐데, 다만 삶에서 되돌아가는 전진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에이해브는 그야말로 진(進)의 상징, 나아가는 사람이다. 끝없이 나아가며, 그의 시선은 항상 수직적이다. 수직-파괴-고독-도전으로 이어지는 그의 언표는 강건한 기운으로 불뚝거리는 양(陽)의 힘, 그 자체다. 다만 전진, 즉 나아감이란 항상 되돌아감을 전제하고 있다는 독백은, 그 힘의 원천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끊임없이 나아가고 정복하는 기운으로만 살 수는 없다. 无平不陂(무평불피)와 无往不復(무왕불복)의 흐름을 생각해보면, 양(陽)의 원천이 사실 음(陰)이라는 것, 이 두 가지가 서로 기대어 작용하는 대대(待對)의 관계성 속에서 만물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주역의 핵심 원리를 들여다볼 수 있다. 누구보다도 야생적인 눈을 가졌던 허먼 멜빌이 출구 하나 없이 발산만 하다가 죽음으로 고꾸라지는 꽉꽉 닫힌 해석의 책을 썼을 리는 없다. 미세하게라도 튀어나온 돼지꼬리처럼 미시적 선분,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음(陰) 기운 하나쯤은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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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감이란 항상 되돌아감을 전제하고 있다

모비딕을 읽을 때의 시선은 사실 에이해브에게 집중된다. 그만큼 강렬하다. 그렇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영원할 것 같은 자신의 전진 역시 언젠가는 ‘되돌아감’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에이해브의 모습에서 작가인 허먼 멜빌이 그와는 다른 성질의 조그만 샛길을 하나 틔워놨음을 직감할 수 있다. 허먼 멜빌은 너무 명백해도 보이지 않는 법이다.(같은 책, 613)라는 한 줄의 문장으로 관점의 주관성을 평가하는데, 아마 이 상황에 가장 잘 들어맞을 것이다, 너무 명백하게 보이는 캐릭터라 오히려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주인공, 바로 이슈메일이다.

2. 아웃사이더의 외침-“Call me Ismael!"

“Call me Ismael: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31)

그의 이름은 정말 이슈메일인가?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모비딕>은 이슈메일이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서자의 이름을 따서, 방랑하는 삶을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규정하며 시작된다. 성서의 이슈메일은 뱃속에서부터 신께 저주받은 운명을 지음 받은 사람이다. 잔혹한 전쟁과 살벌한 투쟁만이 그가 태어난 이유인 것일까? 창조주는 장담한다. 이 야생의 들나귀 같은 자는 모두가 등을 돌리고, 심지어 같은 핏줄과도 싸우고 투쟁할 것이라고.

네 아들(이슈메일)은 들나귀 같은 사람이라, 닥치는 대로 치고 받아 모든 골육의 형제와 등지고 살리라.

(창세기 1612)

한 마디로 성서의 다른 훌륭한 이름들을 제외하고 굳이 선택할만한 이름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들나귀처럼 사막을 방랑하던 이슈메일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적통이 아니라 히브리 민족의 메인스트림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비주류 아웃사이더다. 이 이름 하나만으로 충분히 추측 가능하다. 이슈메일의 선분은 너무나 독특하다는 것을. 그의 항해로는 절대자에게 극렬히 반항하는 모습의 에이해브와는 분명 다르다. 그게 뭘까? 점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선분이 가진 운동성으로 끝없이 뻗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이슈메일에게 숨겨진 비법이라면 비법일 것이다. 에이해브는 고래를 소유하고 정복한다는 검은 점으로 멈춰버렸다. 합일 직전의 지독한 쾌감, 차이를 완전히 제거한 완벽한 일체. 에이해브의 컨셉이 ‘소멸의 타나토스’라면 이슈메일은 ‘깨달음의 로고스’다. 로고스란 자신의 현장에서 배움의 스펙트럼, 앎의 그물망에 끊임없이 접속하고 연결되는 것이고, 이는 타나토스와는 다른 양태의 에로스의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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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선분이 가진 운동성으로 끝없이 뻗어 나가는 것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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