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희순 (글쓰기학교 토요반)

매스컴과 SNS에선 온통 ‘젊음 유지’ ‘동안 비결’이 난무하다. 그러다 가끔, 50대 전후 여성들 대화에 불청객처럼 ‘폐경’이 오르내리기도 한다. 나 역시 28일 주기로 찾아오던 월경이 끝났다. 100세 시대, 이제 반을 살았는데 왠지 인생 다 산 것 같은 기분일 때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이하 『동의보감(고미숙)』)』를 만났다. 400쪽이 훌쩍 넘는 책 두께와 서두의 낯섦에도 불구하고 ‘몸과 우주’가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특히, 폐경기를 맞은 여성에게 동의보감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살짝 기대도 됐다.

“얘, 너 벌써 폐경이야?”, “언니, 아직도 생리하셔요? 젊으시네.”라며 나누는 이야기 속에 ‘여성의 젊음 마지노선’은 어느덧 ‘폐경’이 된 듯하다. 귀찮은 마음이 많았던 ‘월경’을 생산 가능성에 대한 표지로 여겨 자부심을 갖는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월경의 끝’, 즉 ‘폐경’은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성 상실’로 인식되며 심하게는 ‘폐경=여자로서 끝’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생긴 대로 산다며 씩씩했던 나도 ‘폐경’ 앞에선 작아진다. 그래서 그런가. 자신감의 회복이라며 몸의 생리 현상은 바꿀 수 없어도 겉모습만이라도 젊게 보이고자 다들 혈안이다. ‘어떻게 하면 젊게 보일까’는 나에게도 화두였다. “남들 다 먹는다는 여성호르몬제를 먹어야 하냐?”며 폐경 선배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부작용이 무서워 선뜻 시도는 못 했다. 불면증과 안면 홍조 같은 ‘갱년기 증후군’에 미리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스치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폐경’은 여성에게 달갑지 않은 종착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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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미숙 작가가 읽고 우리에게 전해 준 『동의보감(고미숙)』에선 새로운 눈으로 우리 몸을 바라보게 한다. 우주 삼라만상이 ‘나고 자라고 열매 맺고 익어가고 사라지듯’ 우리의 몸도 같은 원리라는 것이다. 이를 이 책에선 ‘우주론을 통한 생명의 원리’라고 말한다. 그 안에는 자연스런 리듬이 있으며, 조화와 균형, 차이와 균열이 펼쳐진다. 리듬을 거슬러서도 안 되며, 조화가 깨지고 균열이 생기는 것을 무조건 질병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차이와 불균형을 치료하여 없애려 하기보다 생명 활동의 근간이 되는 에너지로 바라보라고 한다. 무엇보다 『동의보감(고미숙)』에선 몸 안의 생명력을 길러 스스로 조절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양생의 원리’를 강조한다. 치료보다 양생!

나는 특히 이 책에서 8장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가 눈에 띄었다. 현대의학에선 임신에서 출산까지 생명 탄생의 전 과정이 여성 자신의 주도 없이 의사가 개입하여 병리학적으로 다룬다. 이에 반해, 여기서는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월경, 폐경, 출산을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 아니라 생명 원리요, 자연의 리듬으로 본다. 자연에 4계절이 있듯 여성의 삶에도 4계절이 있다는 것이다. 초경을 신호탄으로 청춘의 봄을 지나, 자녀를 낳고 키우고 기르는 여름, 곧 중년이다. 그리고 여름에서 가을로 옮겨 가는 순간이 바로 ‘폐경기’라고 하니, 나 역시 뜨거운 여름, ‘화(火)’의 시간을 지나, 점차 서늘해지는 가을, ‘금(金)’의 첫 들머리 50대 초반 폐경기를 살고 있다. 『동의보감(고미숙)』에서 말하는 ‘금화교역(金火交易)’의 시기다. 열기가 식혀지면서 열매가 익기 시작하는 이 시기를 여성의 삶에서는 내적 성숙을 위한 새로운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이때 여성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요, 남성들의 구애의 대상으로서도 아닌 아주 다른 방식으로 훨씬 더 깊고 부드럽게 고양된다고 한다. 여성은 이 시기를 남성의 시선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생의 주기를 잘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 시간을 멋지게 통과해야 가을의 결실과 겨울의 대성찰이 이루어진다니 폐경은 실로 축복이란다. 축복 이전에 자연,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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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를 여성의 삶에서는 내적 성숙을 위한 새로운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이제 자녀들도 스무 살을 훌쩍 넘은 나이.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앞으로 남은 삶을 위해 몸이 다시 세팅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 몸을 치료의 대상으로 맡겼던 시간에서 벗어나 스스로 몸에 흐르는 생명의 힘에 대해 알고, 잘 조절하며 사용하는 법을 『동의보감(고미숙)』을 통해 배웠다. 열정을 펼치는 데 쓰였던 에너지를 모아 나를 만나는 묵상의 시간을 갖는다. 여러 가지 모임과 역할을 하나씩 하나씩 줄여 분주함에서 단순함으로 나가고 있다. 또한, 읽기로 현자들의 지혜를 배우고 글쓰기로 사유의 깊이를 더하려 한다. 생명 탄생은 아니지만, 또 다른 창조의 문이 열려 공동체에 씨를 뿌린다.

“삶의 가을을 맞이한 그대, 폐경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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