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찬영 (감이당 장자스쿨)

(전편에 이어서)

특히 이슈메일이 보는 고래는 에이해브와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이 두 캐릭터의 차이가 선명히 드러난다. 그는 포경업계에서 고래의 소유권이 누구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을 소개하면서 ‘잡힌 고래와 놓친 고래’라는 용어를 통해 세상을 설명한다. 잡힌 고래는 “fast fish”다. fast, 안전벨트를 꽉 조이듯 타이트하다는 뜻이며 소유자가 확정된 상태가 잡힌 고래다. 내 손 안에 완전히 쥐고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는 의미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고래가 그렇게 잡혀버리면 생명을 잃고 박제된다. 놓친 고래는 loose fish다. loose는 타이트하다는 뜻의 정반대다. 확정된 소유자가 없으며 계속 이 바다 저 바다를 유동하는 고래다. 이슈메일의 고래학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대체 소설인지 고래학 논문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박학다식한 지식들이 줄줄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이 모든 분석과 지식의 펼쳐짐은 항상 고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기란 어렵다는 결론으로 맺어진다. 이토록 세세하고 정밀하게 관찰하고 공부한다 하여도 고래란 생물을 완전히 장악하고 알아낼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당신이 고래뿐만 아니라 세상을 탐구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손을 벗어나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는 놓친 고래를 보는 것일 뿐이라고. 이것이 고래를 바라보는 이슈메일의 시선이다.

내가 아무리 고래를 해부해보아도 피상적인 것밖에는 알 수 없다. 나는 고래를 모른다.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고래의 꼬리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머리를 알 수 있겠는가?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460)

그 두꺼운 책에 고래에 대한 끊임없는 지식을 풀어놓았음에도, 그는 “나는 고래를 모른다”는 고백으로 그의 연구를 끝맺는다. 허무한가? 그렇지 않다. 이슈메일이 유독 ‘고래’라는 거대하고 신비로운 동물에 끌리는 이유는 고래가 품고 있는 그 거대함과 미지성만큼이나, 광활하고 끝없는 우주와 계속해서 연결되기 때문이다. 세계를 여는 철학은 정복과 합일에 있지 않다. 굳이 희고 영특한 고래를 찾아 기꺼이 죽으러 나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주와 접속하는 방법을 알기만 하면, 그 웅대함을 마음껏 유영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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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하고 끝없는 우주와 계속해서 연결되기 때문이다.

본연의 운동성을 잃지 않은 바다의 고래처럼 로고스적 탈주선을 끊임없이 그려나가는 것, 이것이 우주적 접속의 방법이다. 이슈메일의 눈에는 온 사방천지가 우주로 통하는 로그인 창으로 느껴졌던 것이 분명하다. 양수기, 밧줄, 거적 등 포경선 위의 모든 사물들에 대한 관찰뿐만 아니라 잡다한 사건과 인연들까지도 생명력을 가진 고래처럼 팔딱팔딱 쏘다니며 접속한다. 그 연결성을 찬찬히 관찰하고 삶과 인간에 대한 여러 잡다한 썰(!)을 풀어놓는 그의 언변은 참으로 기가 막히다. 예를 들면, 거적을 짜면서 우연과 필연, 자유의지가 동시에 만들어내는 삶의 무한한 가능성과 유한함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원숭이 밧줄로 동료와 이어진 자신의 모습에서 인연이란 얼마나 깊게 관계하고 얽혀 있는가를 성찰하며, 인간 역시 포경선 위의 양수기처럼 운명의 여신에 의해 뱅글뱅글 돌려지고 있지 않냐고 반문하는 식이다. 죽은 고래의 평평하고 매끈한 이마, 용연향, 뼈, 색깔까지도 그에게는 끊임없는 철학적 탐구의 과제가 된다. 그래서 이슈메일은 이 태산준령과도 같이 우뚝 선 고래 앞에 덜렁 선 한낱 인간에 불과하지만, 오히려 아주 신나는 듯 간절한 기도를 신께 올린다. 쾰른 대성당이 (…)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듯이, 나의 고래학 체계도 미완성인 채로 남겨둘 작정이다. 신이여, 내가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도록 보살펴주소서!¹ 미완의 고래, 미완의 지식, 미완의 진리탐구. 이슈메일에게는 완전함을 향한 갈망이 없다. 그저 접속할 수 있도록 언제든 눈과 귀를 열어두기만 하면 된다. 포경선 위의 모든 인연, 사물, 사건들이 바로 접속창일 테니까. 이슈메일의 놓친 고래는 팔딱팔딱 쏘다니며 포경선 위의 모든 인연, 사물, 사건들과 자유롭게 연결된다. 미완이 선분은 그래서 이슈메일에게는 계속적인 운동성으로 꿈틀거리며 결코 특정한 검은 점에 멈추지 않는다.

즉 나의 자유의지는 치명상을 입었고, 상대의 실수나 불운이 무고한 나를 부당한 재난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래서 나는 신의 섭리에 일종의 공백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처럼 공명정대한 신의 섭리가 이렇게 엄청난 부당함을 인정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중략)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나의 이 상황이 살아 숨 쉬는 모든 인간의 처지와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대부분의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샴쌍둥이처럼 결합되어 있을 뿐이다. 당신의 돈을 관리해주는 은행이 파산하면 당신은 권총으로 자살한다. 당신의 약제사가 실수로 당신 알약에 독약을 넣으면 당신은 죽는다.

(위와 같은 책, 396)

따라서 이슈메일의 항로는 고독과 비극, 엄숙함과는 거리가 멀다. 식인종과 우정을 나누고, 포경선에서 궂은일들을 해내며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관계 법칙을 깨닫는 것이다. 위의 장면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이슈메일의 독백 중 하나인데, 자유의지가 치명상을 입었다는 부분이나, 신의 섭리가 이렇게 부당할 리가 없다며 비꼬는 대목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종교인이든 아니든, 신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거쳐 가는 질문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정말 신이 살아계신다면, 왜 세상이 이럴까?” 하는, 어떤 훌륭한 목사님도 결코 속 시원히 대답해 줄 수 없는 가장 근원적인 세상의 모순 말이다. 이슈메일의 의심은 이렇게 신의 공백을 생각하게 하고, 그의 직관력은 모든 인류가 예외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거대한 인연장을 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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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다르게 에이해브는 주변으로 인해 항상 번뇌하고, 이 번뇌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항상 파괴와 정복을 다짐한다. 인간을 뛰어넘길 원하는 에이해브는 인드라망의 복잡한 그물망, 즉 서로에게 기대고 빚을 지는 필연적 의존성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인간이 서로 은혜를 입고 입히는 대차관계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서 저주스러워. 나는 공기처럼 자유롭고 싶은데, 온 세상의 장부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² 이는 에이해브의 영웅성, 즉 종말주의에서 나타나는 영지주의(靈智主義: 선택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영성)를 담고 있다. 종말의 타이밍에 우뚝 선 슈퍼맨이라면 주변 따위는 상관없이 완전한 개체로 존재해야 한다. 인연? 그런 것이야말로 번거롭고 번잡할 뿐! 하지만 이슈메일은 키득거리며 말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돌아가면서 때리고 맞는다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이 서로 어깨뼈를 문질러주면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³ 전 세계 사람들이 마주 보고 서서 한 명씩 돌아가며 서로 사이좋게 주먹을 날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머쓱해하며 토닥이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이슈메일은 세상에 노예가 아닌 이가 누가 있냐고 반문한다. 이 노예란 단순히 계급적 의미를 벗어나, 샴쌍둥이처럼 얽히고설켜 서로가 빚진 상태인 인간관계의 실상을 비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선장에게 착취당하는 아주 보잘것없는 선원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즐길 수 있다. 최고참인 선장 역시 말단인 자신에게 의탁하고 있는 자임이 분명하므로. 에이해브와 이슈메일은 둘 다 통찰력을 지닌 캐릭터들이다. 그러나 전자는 이 때문에 괴롭다. 그가 추구하는 시선의 높이는 날카롭지만 그 예리함만큼 무겁고 비극성이 짙다. 반면 이슈메일이 확장시키는 시선의 넓이는 수평으로 확장되며 끊임없는 여백을 확보하고, 그 여백만큼 웃기고 쾌활하다. 그의 서사는 종말론의 엄숙한 플롯을 동력 삼지 않는다. 모두가 바다 깊이 침몰한 배에서 유일한 생존자로 허먼 멜빌이 선택한 이유가 아닐까?


1)《모비딕》, p.194.

2)《모비딕》, p.564.

3)《모비딕》, p.34.

3) <모비딕>의 유쾌한 지정생존자

이슈메일이 피쿼드호에 올라탄 이유는 간단하다. 육지에서 자꾸만 우울해지고 어떤 흥미도 느끼지 못한 채 무력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처럼 영혼이 스산해질 때, 입 언저리가 삶에 대한 냉소로 불쾌하게 씰룩거릴 때, 그는 조용히 배를 타러 바다로 간다고 고백한다. 바다는 그에게 잊고 있던 에로스를 흔들어 깨워준다. 어디 바다뿐인가? 포경선에 우글거리는 밑바닥 인생들의 각양각색 에피소드들은 그를 매개로 통과하며 편집되고 변주된다. 장례 행렬을 만나면 그 끝에 붙어 따라가고, 관을 파는 가게 앞에서 늘 걸음을 멈추던 이 우울 모드의 회색 선원은 바다 위에서 누구보다 활력 있는 에로스적 생명력으로 다시 채색된다. 따라서 이슈메일을 중심축에 두고 모비딕을 읽어나가면, 이 책은 그의 성장 소설이자 항해 철학서로 새롭게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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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그에게 잊고 있던 에로스를 흔들어 깨워준다.

따라서 나도 그 철학을 가지고 피쿼드호의 항해 전체와 그 목표인 거대한 흰 고래를 지켜보았다.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292)

여러분이 철학자라면, 포경 보트에 앉아 있어도 (…) 난롯가에 (편안하게) 앉아 있을 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공포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위와 같은 책, 355)

그렇다면 그의 항로는 에이해브와 반대되는, 그저 태평하고 유유자적하기만 한 항로인가? 그렇지 않다. 로고스적 캐릭터답게, 유독 철학을 강조하는데, 온갖 사물, 인연들과 섞이고 엉키는 그의 로고스는 그냥 철학도 아니고 “악당 철학desperado philosophy”을 낳는다. desperado는 악당, 무법자를 뜻하기도 하지만, 전쟁터에서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병사를 뜻하는 불어이기도 하다. 단언컨대, 이슈메일이 발휘하는 로고스적 힘은 에이해브의 타나토스적 힘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강력하다.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물건들에 대한 관찰과 포경선에서 고래를 추격하며 벌어지는 세세한 사건들에 대한 통찰은 치열한 로고스적 기반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슈메일의 선분으로부터 종말론을 극복할 단서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을 알게 된다는 것은 끝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역(易)의 법칙을 체험한다는 뜻이다. 이 법칙의 일부로서 예외 없이 적용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운명을 바라보는 새로운 해석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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