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희씨(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이 연대기가 주제로 다루고 있는 기이한 사건들은 194×년 오랑에서 발생했다.

(까뮈, 『페스트』, 책세상, 2017, 15쪽)

‘기이한 사건들’ 속으로 들어가기 전 오랑이 어떤 도시인지를 간략하게나마 스케치해 보는 게 좋을 듯하다. 세계 지도를 펼치면, 아프리카 대륙의 북단, 북으로 지중해를 이고 좌로는 모로코 우로는 튀니지·리비아와 접해 있는 곳에 알제리라는 꽤 넓은 나라가 있다. 땅덩어리는 넓지만 대부분이 사막이고 사람이 살 만한 북쪽 해안가에는 아틀라스 산맥이 서북쪽으로 길게 뻗어있어 면적은 남북한을 합한 것의 열 배가 넘지만, 인구는 남북한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그 북쪽, 지중해와 면한 해안선 가운데쯤에 수도 알제가 있다. 거기서 다시 해안선을 따라 왼쪽으로 한참을 가면 제법 큰 도시가 하나 나온다. 이곳이 바로 오랑이다. 100여 년 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는 1962년에 독립을 했다. 아랍국가인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 『페스트』에 프랑스인들이 주요인물로 등장하고, 오랑이라는 도시가 프랑스 현청 소재지로 설정되어 있는 이유다.

2017년 5월에 머물렀던 지중해가 떠오른다. 연구실에서 지중해 탐사 세미나를 마치고 현장으로 여행을 떠났다. 아테네를 시작으로 크레타를 거쳐 스페인의 바르셀로나까지. 지도를 보니, 마지막 방문지였던 바르셀로나에서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정 남쪽이 바로 알제리의 수도 알제다. 금세 친근감이 느껴진다. 그때 바르셀로나 근교 해안도시에 숙소를 잡고 이틀을 묵었다. 여행일정 열흘 간 단 하루도 비가 내리지 않았던 맑고 청명한 날씨, ‘구름 한 점 없는’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구나 싶을 만큼 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파란 하늘, 어떤 장면도 그림으로 만들어주던 마법 같은 태양 빛. 당시 내 눈에 비친 지중해다. 오랑도 그런 곳일까.

오랑의 사계

여기서는 계절의 변화도 하늘을 보고 읽을 수 있을 뿐이다. 봄이 오고 있다는 것도 오직 바람결이나 어린 장사꾼들이 교회에서 가지고 오는 꽃광주리를 보고서야 겨우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시장에서 파는 봄인 것이다. 여름에는, 아주 바싹 마른 집에 불을 지를 듯이 해가 내리쬐서 벽이란 벽은 모두 흐릿한 재로 뒤덮인다. 덧문을 닫고 그 그늘 속에서 지내는 수밖에 없다. 가을에는 그와 반대로 진흙의 홍수다. 맑은 날씨는 겨울이 되어야 비로소 찾아온다. (같은 책, 15-16쪽)

좀 뜻밖이다. 이래서 서술자가 작품 첫머리에서, 얼핏 보기에는 여느 상업 도시들과 흡사하지만, “비둘기도 없고 나무도 없고 공원도 없어서 새들의 날개 치는 소리도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도 들을 수 없는 도시”(같은 책, 15쪽) 오랑을 어떻게 설명하면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나 보다. 오랑은 흔히, ‘지중해’ 하면 떠올리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날씨와는 거리가 먼, 오히려 ‘사막’과 ‘고원’을 연상케 하는 도시다. 높은 언덕바지에 달팽이 모양으로 건물들이 들어서고 바다와는 거의 등을 지고 있어서 바다를 보려면 일부러 찾아가야 하는 곳. 게다가 헐벗은 고원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어 키 큰 나무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하긴 그해 오월의 아테네에서도 크레타에서도 차를 타고 달리며 본 들판이나 야트막한 언덕엔 작달막한 올리브나무, 포도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그 사이사이로 풀과 덤불들이 제멋대로 자라고 있었다. 가지를 넓게 드리운 아름드리나무를 찾을 순 없었지만, 그래도 오랑처럼 이렇게 삭막하진 않았다.

사막에 내리꽂히는 불볕, 헐벗은 고원지대에 불어 닥치는 거센 바람과 흙먼지가 재처럼 벽을 뒤덮고 있는 도시. 오랑의 봄은 억수 같은 소나기, 푹푹 찌는 더위에 차라리 한여름의 열기를 그리워할 정도로 짙은 안개와 높은 습도로 우리의 무더위를 연상케 하고, 여름은 흙바람에 뒤덮인 벽들, 뜨겁게 달구어진 ‘솥뚜껑’을 덮고 있는 듯한 하늘이 상상만 해도 목에 무언가 걸린 듯 숨쉬기가 힘들다. 9월과 10월에는 안개와 더위와 비가 차례로 하늘을 가득 채우다가 겨울이 되어야 겨우 맑아지는 도시. 오랑은 그해 5월에 만난 ‘지중해’와도 너무 다르고, 그 동안 내가 살아온 우리나라의 그 어느 도시와도 다른,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무척 멀게 느껴지는 낯선 도시다.

오랑 시민의 일, 사랑, 죽음

멀고도 낯설게 느껴지는 이 도시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도시를 아는 편리한 방법은 그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죽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의 이 자그마한 도시에서는 기후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모든 것이 다 함께, 열광적이면서도 무심하게 이루어진다. (같은 책, 16쪽)

달리 말하면 삶에 대한 태도가 어떠한지를 보면 그 도시가 보인다는 것이다. 비단 오랑뿐이겠는가마는 우선 이곳부터 차근차근 살펴보는 게 순서일 듯하다.

그들은 일을 많이 한다. 모두가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에서 하는 일들이다 보니 장사에 관심이 많다. 그렇다고 일주일 내내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취미 생활도 즐긴다. 여자, 영화, 해수욕 등등. 평일 퇴근 후면 같은 시간 카페에 모여 앉거나 정해놓은 대로를 걷고, 주말이면 좀더 시간을 내서 젊은이들은 주로 욕망을 격렬하게 발산하는 활동들을, 나이 든 축들은 대부분 공굴리는 모임이나 친목회 모임, 또는 내기 트럼프를 한다.

그들이 하는 사랑은 어떨까. 그들에게 사랑은 성행위와 동의어다. 섹스에 파묻혀 짧은 시간 동안 서로를 ‘탕진’하거나 둘이서의 기나긴 ‘습관’ 속에 얽매이는 양 극단을 오간다. 전자는 주로 젊거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 취하는 바이고, 후자는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에너지를 폭발시킬 힘이 없거나 먹고 사는 일에 지친 사람들이 하는 사랑 패턴이다. 탕진을 하든 습관 속에 묻히든, 하여간에 시간도 없고 깊이 생각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사랑이 뭔지 알지도 못한 채 소위 사랑이란 걸 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어떻게 죽는가. 서술자는 오랑에는 다른 도시와 달리 죽음에 이르러 겪게 되는 독특한 불편함이 있다고 한다.

오랑에서는 지나치게 거센 기후, 거기서 거래하는 사업의 중요성,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황혼, 쾌락의 특질 등 모든 것이 한결같이 건강한 몸을 요구한다. 이곳에서 병을 앓는 사람은 아주 외롭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시간에 전화를 붙잡고서, 혹은 카페에 앉아서 어음이니 선하증권이니 할인이니 하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더위로 불꽃이 튀기는 듯한 수많은 벽들 뒤에서 덫에 걸린 채 다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해 보라. (같은 책, 18쪽)

오랑에서 요구하는 건강한 몸이란, 거센 기후에 살아남을 수 있는 몸,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잠도 줄이고 휴식도 줄일 수 있는 체력을 자랑하는 몸, 언제든지 쾌락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는 스테미너 넘치는 몸이다. 생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현장으로서의 몸, 서로가 서로에게, 나아가 천지자연에 기대어 있는 유기체로서의 몸이 아닌 개인의 성공과 쾌락을 향해 앞만 보고 내달릴 수 있는 건장한 몸이다. 물론 건강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로병사’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아니 생명의 이치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건강 자체에 집착할 일이 아니라 그 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탐구해야 하지 않을까. 건강한 몸이 건강한 삶을 보장할 수 없고, 반대로 허약한 몸이 허약한 삶과 직결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게 오랑에서만 겪는 불편함이라고? 당시에는 오랑의 이런 모습이 정말로 유별난 것이었다는 건지, 아님 ‘어떻게 죽는지’에조차 관심이 없는 오랑이란 도시를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반어법을 쓴 건지 모르겠다. 어찌됐든 부동산과 주식을 포함한 온갖 재테크에 관심이 쏠려 있는 사람들, 소위 성공을 위한 스펙 쌓기에 골몰하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틈에서 덜컥 병이라도 나면…. 가벼운 병이야 잠깐 쉬었다 가는 시간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큰 병이라도 나면 당장 돈벌이를 못하는 건 고사하고 이 병원 저 의사를 찾아다녀야 하는 번거로움과 병원비의 부담은 어쩐단 말인가. 돈벌이와 출세에 바쁜 사람들에게 병자는 거추장스런 존재가 되고, 더욱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건 오늘 대부분의 도시에서도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오랑과 ‘오랑’

갑자기 서울이기도 하고 뉴욕이기도 하고 베이징이기도 한 수많은 ‘오랑’이 『페스트』 속 오랑에 겹쳐진다. 사시사철 자연 속에서 살아가지만 스스로 자연과 연결된 존재로 살지 못하고 자연을 저만치 두고 풍경으로 소비하거나 마구잡이로 쓸어다가 상품을 만드느라 정신없이 돌아가는 도시. 거센 기후 탓에 ‘초목도 없는’ 도시 오랑과 무엇이 다를까. 일하고 사랑하고 죽는 건 또 어떤가. 오늘날 부와 섹스에만 쏠린 욕망, 마음을, 영혼을 돌보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도시. 내게는 죽음이 오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고 병든 자를 밀쳐내는 수많은 ‘오랑’이 ‘넋도 없는’ 도시 오랑과 또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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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는 무얼 한 걸까? 발전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말 그대로 심장이 열을 받아 아우성칠 정도로 ‘열심히’ 달려왔는데, 일과 사랑, 죽음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치도 변하지 않은 걸까. 우리 삶은 눈곱자기만큼의 성숙도 이루지 못한 건가. 페스트가 사스로, 신종플루로, 메르스로, 코로나19로 끊임없이 ‘새롭게 시작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여전히 부에 쾌락에 탐닉하면서 병든 자가 외로운 도시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죽어라 ‘제자리걸음’만을 하고 있다.

페스트와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의 덕목(?)은 40년을 앓으면서 비로소 삶을 돌아보게 되는 류머티즘과 달리, 일하고 사랑하고 죽는 ‘생로병사’를 짧은 시간 안에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데 있다. 평소에도 늙고 병들고 죽는 경험을 한다. 그러나 그 범위나 기간이 매우 추상적이고 넓으며 개별적인 경험에 머물고 마는 탓에 일생을 단시간에 총체적으로 사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갑자기 무서운 전염병이 닥치고 사람들이 죽어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시에 같은 처지가 되어 짧은 시간에 ‘로병사’를 압축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된다. 페스트와 코로나19가 들이닥친 “초목도 없고 넋도 없는 도시”(18쪽) 오랑과 ‘오랑’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질병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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