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스님 4월 선물강좌

맛을 만드는 우리의 뇌

자기극복이 사실상 맞는 말인가 라고 생각해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극복되어야 할 존재인가 라고 하면 사실상 극복된다는 말 자체가 성립되기 어렵고, 내가 생각하는 습관을 바꾸는 것을 자기극복이라고 본다면 그건 가능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가 내용이지, 극복되어야 할 자기가 있다고 하는 것처럼 한다고 하는 것은 조금 모순인 것 같습니다. 우선 생각한다고 하는 말은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는 것을 보면, 여기 보면 하향 판단과 상향 전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여기 보면 2000원 커피하고 4000원 커피라고 써놓은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 커피 회사에서, 아마 이 강의를 들으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무슨 김대식 씨라고 하는 분이 티비에 나와서 하는 강의를 들어보면 저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떤 커피회사에서 같은 커피를 놔두고 한쪽에서는 2000원이라고 써놓고, 한쪽에서는 4000원이라 써놓고 사람들한테 한번 시음해보시고 커피 맛이 어떻게 다른지 좀 이야기를 해주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실상 눈을 가리고 혀로 들어오는 정보는 거의 똑같다고 봐야죠. 완벽하게 똑같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이제 같은 커피를 두 가지 나눠놨습니다.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는 2000원하고 4000원이 있어요. 근데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비싼 것이 그래도 대체적으로 다 좋다고 입력이 돼 있죠. 근데 맛을 마셔보니까 혀에서 들어오는 정보는 똑같다고 말하고, 눈에서 들어온 정보는 두 개 차이가 나니까 이것을 안에서 어떻게 하든지 해결을 해야 해요.

그런데 한쪽이 4000원이니까 4000원 커피가 더 맛있고 좋은 커피로 안에서 해석이 돼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 4000원 짜리 커피는 이러이러해서 2000원 커피보다 훨씬 좋고, 심지어 굉장히 비싼 커피에 서로 대비해 봐도 맛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대부분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것은 이제 값비싼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하도록 되는 근거가 내부에 이미 있는 거예요. 눈으로 들어올 때. 그런데 그 경험치는 굉장히 오랜 세월 쌓아가지고 우리 뇌의 기억의 패턴 속에 들어있습니다. 근데 이 기억의 패턴이 들어온 정보를 함부로 삭제하거나 하는 것이 대단히 쉬운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삭제해놓으면 다음에 값에 대한 가치를 판단할 때 혼란이 옵니다. 그래서 비싼 것이 좋다고 하는 일반적인 판단을 하도록 뇌에다가 명령을 하는 것하고 똑같습니다.

자 여기서는 뭡니까? 이미 상향판단은 이제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가, 즉 혀를 통해서 들어가는 정보죠. 맛의 정보로 한다면, 이 하향판단은 이 맛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데, 그 전에 갖추어져 있었던 가치 판단의 영역이 개입되면서 훨씬 훌륭한 커피라고 판단을 내리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경험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경험한다고 생각했는데, 잠깐 트릭만 써도 안에서 전혀 다른 식으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의식과 빈 마음

엉덩이의 감각을 한번 느껴보세요. 이걸 제가 서너 번 계속 물어봤기 때문에 아시는 분들은 아실 거예요. 방금 전까지는 엉덩이에서 일어나는 아무런 신체적 감각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로 말을 듣자마자 자기 엉덩이가 마룻바닥하고 부딪쳐서 누르고 있는 감각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제가 이 말씀을 드렸을 때 비로소 엉덩이에서 오는 신호가 척수를 통해서 뇌로 가서 해석됐느냐,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 몸과 마음에서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접속하는 모든 정보들을 뇌가 계속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뇌가 처리할 때 의식되기 전에 무의식에 내부 영상을 만듭니다. 이것은 자각되지 않는 심상이니까 영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내부 영상을 만들어요. 무의식이 아주 다양한 내부 영상을 만듭니다.

그런데 주의를 어디로 기울였느냐 하는 그 영상만 의식이 되는 거예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영상은 전혀 의식되는 순간 없는 것하고 똑같아요. 그 안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팥죽을 끓이면 팥죽에서 보글보글 끓을 때 계속 뽕뽕 올라오고 있죠. 그렇듯이 무의식 층위에서는 다양한 내부 영상을 계속 만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는 엄청난 영상들이 계속 생겼다 소멸되고 있는 겁니다. 근데 그 순간 내가 이리 주의를 기울이면 엉덩이의 감각이 의식이 되는 거고, 이리 주의를 기울이면 제 소리가 들리는 거고, 이리 주의가 가면 여기 있으면서도 엉뚱한 데로 생각이 가버립니다.

그런데 우리 뇌는 이렇게 영상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자아와 대상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자아와 대상의 경계가 사라진다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좌뇌의 꼭대기에서 약간 내려오면 이 부분에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구분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끄면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자기가 우주가 돼요.

여러분 무슨 기도를 열심히 하거나 참선을 열심히 했던 경우에 나는 합일된 어떤 것을 느꼈다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또 그런 것들을 써놓은 책도 많이 읽는데, 아까 이 부분이 꺼지면 좀비가 되고, 위에 있는 그 부분이 꺼지면 우주적 자아가 되고 다시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가지고 시상이라고 우체국처럼 외부에서 오는 편지를 신피질에 전달하는 곳이 있어요. 그런데 더 의식 집중이 계속 일어나면 우체국이 전부 다 작업을 하지 않습니다. 작업을 하지 않으면 어떤 내부 영상도 안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그 밑에 쪽으로 내려가면 그런 것을 여러분 많이 들어 보셨을 텐데 ‘빈 마음’이라고 합니다, 빈 마음.

그 순간에는 내가 우주가 됐다라고 하는 인식이 발생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그런 상태만 있어요. 그래서 그 상태에서 나와서 나는 그런 상태를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이제 일상으로는 굉장히 막 분별을 합니다. 그래서 일상의 의식과 아까 합일된 의식과 빈 마음의 의식이 기본적으로 동시에 항상 같이 작용합니다, 동시에. 왜 작용하냐면 이와 같은 영상이 만들어질 때 이 영상이 쭉 가는 게 아닙니다. 쭉 가는 게 아니고, a가 만들어지고 b라고 그 때 여기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한 번 거칩니다.

거친 이후로는 계속해서 정보를 전달하는 이 연결망들이 수시로 바뀝니다. 저기서 기차가 오는데 이쪽으로 갈 수도 있고 이쪽으로 갈 수도 있어요. 여기서 뭘 하면 기차가 이렇게 가죠. 또 이쪽으로 돌리면 기차가 이렇게 오죠. 그러듯이, 뇌에서 감각정보를 처리하는 시스템이 항상 영상을 만들었다 해체하고 마치 기차 연결하듯이 굉장히 복잡한 시스템을 이쪽으로 연결하고 이쪽으로 연결하면서 제가 지금 말하는 다른 말들을 계속해서 연결합니다.

그럼 이 주어 부분하고 서술 부분하고 합쳐지면 지금같이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는 형용사, 부사, 명사, 동사 등등의 모든 것들이 기차를 굴리듯이 막 굴려가지고 1000분의 1초 사이에 막 처리를 하고 그것들을 종합해서 지금 제가 하는 말들이 막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때 조금만 다른 식으로 신호기를 옮기면 같은 상황에 대해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같은 것을 보는 게 아니고, 보는 것이 항상 보인 사물이 됩니다. 외부를 보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오는 정보를, 아까 시지각을 신피질로 보내면 이것이 어디 통로와 무엇 통로로 나눠지듯이 굉장히 많이 나눠지면서 다시 연합되는데, 그 시스템이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똑같지 않아요.

그리고 이 모든 것들마다 다 온전히 그 순간의 자기가 돼요. 근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부분을 만드는 것은 의식이 만드는 거지, 즉 나라고 하는 생각이 발산되는 것이 만드는 게 아니고, 우리의 무의식이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외부가 자기를 만듭니다

무의식을 만드는 것은 기억정보입니다. 내가 무엇을 더 많이 기억했느냐가 무의식이 어떤 것을 만들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거의 사람마다 생각도 다르고 세계도 본래부터 다르도록 되어 있는데, 외부에서 학습할 때 주로 뭘 학습합니까? 돈을 잘 버는 사람을 선호하도록 학습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굉장히 다양한 자기라고 하는 생각들이 발생하는데, 전부 다 돈이라고 하는 개념들을 향해서 막 갑니다. 저절로 한 개인이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는 시스템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한 가지 가치를 지향하는 것, 한 가지 가치가 이 사회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것은 사람들마다 쉼 없는 경쟁으로 내몰리게 하고 있는 거예요. 쉼 없는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는 순간 자기 속에 들어있는 굉장히 다양한 자기들이 다 사상되는 것처럼 되고, 오로지 내가 돈을 많이 벌었느냐 돈을 많이 못 벌었느냐로 자기를 판단하게 되면서, 돈의 많고 적음은 저금통장에 돈이 얼마 있느냐가 결정하니까 반드시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실패한 것처럼 느끼도록 되어 있습니다.

본래 인간의 가치 체계가 자존감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비교할 수 있는 영역 자체가 아닌데, 다른 것으로 비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면서 마치 인간의 가치 체계가 (따로)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 이제 그러면 내 안에 들어있는 이 하향판단을 하는 기억정보가 그럼 제멋대로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많은 경우는 외부에서 감각을 우리한테 깨우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을 이렇게 보는 순간 지금 여기 나와서 각자 보면 조금씩 다르긴 할지라도 그래도 공통된 것처럼 보이게 내부에 있는 영상 기계가 그걸 계속 만들어주는 것이죠.

외부가 자기를 만듭니다, 어떤 경우는. 바꿔 말하면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는 처녀 총각이라고 부릅니다. 결혼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의 자아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처녀라고 하는 자아를 갖고, 총각이라고 하는 자아를 갖는 거예요. 결혼을 딱 하고 나면 여기에 다른 자아가 하나 생깁니다. 아내라는 자아하고 남편이라는 자아가 생깁니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떠나서 그와 같은 삶을 살 때 옆에서 이제 아내로 불리는 사람과 접속하는 순간 나는 어떤 자아가 되냐면 남편이라는 자아가 되는 거예요. 남편이라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아내라는 자아가 됩니다.

결혼했으니 이제 애를 낳았습니다. 그러면 어제까지 아빠, 엄마가 없다가 애를 낳는 순간 엄마나 아빠라는 자아가 생깁니다. 엄마, 아빠라는 내부의 지각 정보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은 굉장히 작동하고 있고, 그것이 현실에 어떻게 작동하느냐 하는 순간 자기가 하나씩 만들어지는 거예요. 아내는 특정되지 않는 자아가 아마 생각의 수만큼 중첩돼 있다고 할 수가 있어요. 하나의 자아가 있는 게 아니고. 그러다가 특정한 인연을 만나면 그 중에 어떤 것이 자아처럼 나오는 거예요. 아까 엉덩이 감각을 느끼는 순간 엉덩이의 신체적 감각이 그 순간에 지각 정보가 되듯이 내가 인연 관계에서 어떤 자아를 끄집어내느냐 하는 것은 나만 결정하는 게 아니고 외부가 결정해주고 있는 것이죠.

이 외부가 여기서 말하는 상향전달체계입니다. 만약에 내가 가지고 있는 기본 정보만을 가지고 세상을 충분히 살았으면 새로운 감각 정보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겠죠. 그런데 살다보면 굉장히 다양한 현상들하고 만나게 됩니다.

댓글

ava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