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사랑의 자유를 찾아 나선 여자

김석영 (남산강학원 청년스폐셜)

(전편에 이어서)

5. 그들은 왜 그래도 된다고 착각 하는가

우리는 그렇게 몸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에게 힘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방식은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들에게 원초적 자립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길로 아마도 가장 먼저 제시되는 길이고, (돈을 벌거나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길이 비교적 막혀있기 때문에) 가장 만만한 방법이라 생각되는 길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서는 그러지 못하면 무능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길임으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되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만큼 보장되어 있다. ‘몸’이라는 게 우리에게 실제로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지는지,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다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괜찮기만 한 길은 아니라는 것도 누구나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 길에는 불가피하게 찝찝한 사건들과 느낌들이 동반된다. 왜? 어쨌든 몸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성적어필을 ‘통해서’ 이다. 그러니까 성적 어필을 ‘하기 위해서’ 몸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도 내가 가진 이것이 성적 어필이 ‘가능함’을 통해서 힘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특정한 누군가에게 어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지만 모순적이게도 이것이 모든 이들에게 어필되는 것이라는 공감에서 힘이 나온다. 이것은 결국 외부의 시선에 좌우되는 사이비 자립이다.

유행하는 패션이 그러하듯 많은 이들이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있으며 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메시지 자체가 힘인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반응하는’ 어떤 것들이 있고, 그것이 거의 보편적이라는 말이 될 테다. 편의를 위해 아주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섹스어필하는 몸’, (그것을 포함한) ‘건강한 몸’, ‘당당한 몸’ 등으로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장착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여자들이 한편에 있고, 그것에 반응하는 남자들이 한편에 있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그런 남자(도식적으로 보았을 때 힘의 영향을 받는 어떤 사람)들에게 ‘여자들의 몸’은 근사한 물건처럼 가지고 싶고 소비하고 싶은 어떤 것이 된다. 그들에게 ‘몸’은 이미 어떤 ‘사람’이 아니다. 이제까지 음악방송, cf, 예능 등에서, 더 나아가면 야한 잡지나 동영상, 혹은 상상 속에서 봐온 어떤 것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카탈로그에서 자주 보고 끌렸던 상품이 내 눈앞 매대에 진열되어있는 것처럼. 그것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나를 소비해주세요~’라고 외치고 있고, 보는 이는 그 목소리에 충실히 빨려 들어간다. 이 ‘blind’의 순간이 몸을 둘러싸고 ‘힘’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 그 사람은 거기에 어떤 다른 목소리, 감정이나 생각이 붙어있으리라는 당연한 사실조차 상상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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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하는 패션이 그러하듯 많은 이들이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있으며 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메시지 자체가 힘인 것이다.

몸이 발휘하는 힘, 상품의 목소리는 사람(주체)의 목소리로 착각된다. 그래서 그들은 그 사람이 자신을 유혹한다고 느끼고, (상대가 어처구니없어할 만한) 그에 걸맞는 대접을 한다. 몸을 통해 힘을 발휘하려는 의지가 1도 없는 사람을 봐도, 그것이 ‘여자의 몸’이기만 하면 이런 식의 눈과 귀가 작동하기 일쑤다. 물론 앞서 ‘거칠게 도식화 한다’고 했듯이, 이건 단순히 성별로 나눌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늘어나는 남성 화장품, 패션 브랜드, 옷가게들이 보여주듯 힘의 공방이 펼쳐지는 중심에는 ‘남성의 몸’도 얼마든지 위치할 수 있다. (그렇게 생산-소비되도록 부추겨지는 남성의 몸들을 보고 있노라면 ‘함께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란 말을 썼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눈과 귀가 있고, 상황에 따라 누구나 ‘그들’에 속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의 몸에서 이런 메시지를 읽는 것이 보편적인 세상 위에, 그런 눈과 귀를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이다. 나와 남을 이렇게 보는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 각자가 매 순간 내 안에 쌓여있는 판타지에서 벗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읽고자 하는, 어떤 것에서든 익숙한 목소리를 뚫고 새로운 목소리를 뽑아내 들을 능력과 의지가 얼마나 있느냐에 달려있다.

6. 내 몸을 긍정하기?―중심은 텅 비어있다.

‘그들’이 시선을 보내고 손을 대는 몸은 그들 눈에 이미 ‘나’라는 특정한 사람의 몸이 아니다. 여기에 우리를 짓누르고 분노케 하는 무거운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시선이나 손을 마주할 때 불쾌하고 깜짝 놀라겠지만, 아무도 ‘나’를 건드리거나 괴롭히려 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이미 나의 몸이 아니라 ‘여자의 몸’이라는 기표에 붙은 자신들의 상상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 대고 ‘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할 필요가 없다. 또 이런 사건을 나에게만 일어나는 사건으로 해석할 필요도 없다. 어쩔 수 없이 누군가 나의 몸에서 어떤 기호를 읽어내는 것과 나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이런 오해와 불편함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을 뿐이고, 가끔 똥을 밟을 때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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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묘한 해방감이 있다. 묘하다고 한 것은 나의 몸이 뿜어내는 힘과 나를 분리하기가 내게 쉽기만 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몸’이, ‘내’가 어떤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어쩌면 한 편 믿고 싶은 것이다. 내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내 몸’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조금 과장하면 뭐 그런 얘기. 허나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분노는 더 거세진다. 내 몸이 나의 아이덴티티가 되고, 그럼 계속해서 내가 쫓아야 할 지향점이 될 텐데, 그럼 사건들은 어쩌다 밟은 똥이 아니라 앞으로도 내가 계속 갈 그 길에 방해가 되고 내 길 위에 있는(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맞닥뜨려야 하는) 절대적으로 해결해야 할 거대한 괴로움들이 될 테니까. 한 마디로 ‘그들’과 거리 취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내 몸-아이덴티티를 버리기는 쉽지 않다. 왜인지 ‘내 몸을 긍정해야’할 것 같기 때문이다. 요즘은 특히 여기저기서 ‘바디-파지티브(Body-Positive)’를 내건 캠페인들도 많다. 내 몸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당당하게 드러내자는……. 한데 몸이 왜 ‘드러내거나 숨기는’ 것이어야 하지? 이런 식의 담론들은 ‘몸을 둘러싼 권력을 해체시키자’라기보단 ‘어떤 몸이든 권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자’라는, 오히려 우리에게 몸의 권력을 통한 사이비-자립을 부추기고 있는 이야기들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건강한 방식으로 몸을 긍정’하기 위해 ‘왜곡된 시선들’과 치열하게 싸운다. 하지만 그 긍정이 ‘보여줄 수 있다’는 의미의 긍정이라면 어딘가 이상하다. ‘그들의 왜곡된 시선’만 없으면 자유롭게 몸을 긍정하며 살 수 있으리라는 바람은 성립될 수 없는 환상이다. 타인의 시선과 힘(긍정의 가능성)이 따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나의 몸을 사랑하며 제대로 드러낼 권리’를 지켜야 할까? 몸과 나를 잘 ‘드러내는’ 데에 어떤 가치가 있을까? 이런 게 내 삶에 어떤 좋은 영향을 끼치지? ‘힘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다른 사람의 몸을 보며 탐닉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어떤 이로움이 있는가? 쾌락과 무기력이 반복되는 중독 상태.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많이도 얘기되고 사건/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몸’의 중심은 텅 비어있는 것이다. 중요하다고 말해지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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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 ‘나의 몸을 사랑하며 제대로 드러낼 권리’를 지켜야 할까? 몸과 나를 잘 ‘드러내는’ 데에 어떤 가치가 있을까?

7. 자유는 ‘탐구의 상태’에서 나온다.

‘어떻게 몸을 둘러싼 권력을 해체할까?’ 이것이야말로 ‘어떻게 우리의 몸을 자유롭게 할까?’라는 질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몸을 드러내자거나 드러내지 말자는 이야기로는 풀리지 않을 것 같다. 한데 나는 요즘 뜻밖에, 믿기 힘들 정도로 이런 문제들에서 가벼워지고 있다. 첫 글에서 요즘엔 성추행 등의 불쾌한 일을 겪은 기억이 없다고 했다. 아마 내가 사는 환경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약 4년간 공부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다. 대단한 사람들이 여기 모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대단한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확실히 이곳에 오면 다들 ‘좋은 삶’에 대해 탐구한다. 꼭 책을 읽고 하는 세미나 자리가 아니더라도 여기서 하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삶에 이로운 게 뭐지? 그런 게 있을까? 나를 소진하지 않고 자연에 합치하며 사는 것이 뭐지? 등의 질문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저 몸이 힘을 가지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저렇게, 또 이렇게 사는 것이 각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게 이로운지, 하는 것이다. 이건 개인 개인의 능력은 아닌 것 같다. 이끌어주는 서로 없이 각각의 친구들이 뿔뿔이 떨어진다면 아마 모두 몸이라는 텅 빈 중심을 두고 다시금 권력을 구성하며 살게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場)이 다르게 작동할 수 있는 것은 여기서는 우리가 늘 ‘blind’ 상태를 뚫고 ‘탐구’의 상태에 스스로를 두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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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탐구하는 장을 열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몸을 둘러싼 권력을 해체하는 길, 우리의 몸이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도 모를 힘을 무작정 가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힘을 발휘하여 나의 자유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 자립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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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영
Guest
다영

사이비 자립이라는 말이 재밌어요ㅋㅋ 저도 단순히 몸을 보여주거나 숨기거나 하는 태도 위에서만 몸을 봤던 것 같은데, 언니글을 보니 몸이 다른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게 탐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