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스님 4월 선물강좌

기억의 자모음

외부의 다양한 현상과 만날 때마다 잠깐은 혼란하겠지만 안에서 거기에 맞는 판단과 자아를 동시에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것을 하향판단이라고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향판단이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어떤 경우에는 상향 즉 외부에서 오는 정보가 더 힘을 갖고 있는데, 사람의 경우에는 하향판단이 상당히 힘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사람은 눈에 정보가 들어와서 최종 판단까지 갈 때 그걸 입력이라고 하고, 여기를 출력이라고 합니다. 동물은 입력된 정보가 거의 일직선으로 처리가 돼서 출력됩니다. 물론 안에서 하향으로 판단하는 것이 있어서 알고리즘으로 이렇게 가긴 하는데, 이 알고리즘이 그렇게 복잡하진 않아요. 단선적이에요. 근데 사람의 알고리즘은 여기까지 가는 과정에서 굉장히 자주 출력하는 데에 접속합니다. 그래서 아주 짧은 순간에 계속 수정을 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지각을 수정할 때 사람의 과거 경험 정보 치가 훨씬 더 강력히 작동을 하기 때문에 출력을 어느 정도 조율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출력을 조율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은 수행이라고 하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심상이 만들어지면 우리가 그쪽에 정신이 팔립니다. 그런데 무의식 층위까지 해체되는 영역이 있다고 했죠. 기본적으로는 해체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과거의 기억 정보라고 하는 것은 기억 정보 층에 굉장히 다양하게 기억의 자모음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근데 이것은 그냥 기억의 자모음이라고 하는 단일한 숫자가 아닙니다. 이 하나하나는 기억이 기억이라고 인지를 하는 거예요. 물론 이것이 가라고 한다든가 감이라고 한다든가 하는 정보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우리는 알 수가 없어요.

즉 기억의 자모음은 기억이라고 하는 정보활동을 하기 위해서 이 순간에 내가 기억을 발산해야 하겠다고 하는 것을 아는 거예요. 물론 우리가 말하는 의식적 앎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이 기억의 자모음은 기억된 경험치뿐 아니라 그 기억된 경험치들이 끊임없이 생물처럼 살아서 무의식적인 인지 작용을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의식된 사건, 즉 안으로 정보가 들어와서 이 정보를 해석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활동을 할 것인가 라고 하는 것들은 이렇게 쑥 올라오는데, 하나는 내부 이미지인 내부영상 심상을 만들어주는 것, 즉 기억의 자모음들이 심상을 만들어주는 거예요.

다른 한편으로는 이 기억의 자모음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만드는 ‘앎’이라고 하는 것 있죠. 이 앎이라고 하는 기능이 쭉 있어서 의식이 주체처럼 쭉 일어납니다. 그래서 주관과 객관이라고 하는 내부의 인식 시스템이 형성돼요.

자 그런데 보통은 이렇게 만들어질 때 의식적 있음이 이쪽으로 따라갑니다. 그래서 기분 좋은 이미지가 싹 만들어지면 내가 기분 좋은 활동을 생각하고, 또 기분 안 좋은 영상이 만들어지면 기분 안 좋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있을 때는 이 두 가지가 완벽하게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어나면 마치 아까 ‘어디 시스템’ 하고 ‘무엇 시스템’이 나뉘듯이, 의식이 내부 영상하고 상관없이 아는 주체처럼 설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 심상이, 무슨 생각의 테마들인지를 알지만, 그 생각의 테마에 따라서 내가 현혹되거나 감정의 상태가 막 흔들리지 않는 그런 상태가 지속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마치 심상과 의식이 나라는 것처럼 느껴져요.

보통은 이제 이 심상이 생기면 거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 감각 상태를 동반합니다. 감정 상태를 동반해서 욕심도 나고, 분노도 생깁니다. 생길 때는 욕심과 분노라고 하는 감정을 이렇게 만들어내기 위해서 안에서 신경 조절 즉 정신을 조절하는 화학 물질이 분비됩니다. 이 화학 물질이 딱 분비가 되면 경험치에 의해서 내가 화를 내거나 욕심을 내거나 질투를 하거나 이런 일이 바로 발생합니다.

90초간 머무르기

우린 구별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것이 나와서 머무르는 시간이 90초입니다, 90초. 어떤 내부영상이 탁 떠올랐는데, 욕심이 팍 올라오는 거예요. 일차적으로 훈련될 때는 욕심 쪽으로 갔는데, 내가 이 안에 ‘욕심부리지 말고 그냥 지켜보세요.’라고 하는 정신세계도 같이 지금 무의식 쪽에서 올라오고 있는 거예요. 근데 일상적으로는 욕심 쪽으로 길이 나도록 훈련이 됐는데 잠깐 주의를 기울여서 ‘욕심낼 거 뭐 있어.’라고 하는 쪽으로 오면 이제 그것에 대해서 탐욕이라고 하는 심리 현상을 만들지 않고 그냥 흘러가도록 지켜볼 수가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욕심나게도 볼 수 있고, 욕심 안 나게도 볼 수 있고, 기분 좋게도 볼 수 있고, 기분 나쁘게도 볼 수 있는 온갖 내부영상들이 이렇게 만들어져 있는데 그 순간의 내가 어떻게 주의를 기울이냐가 그 순간 자기의 정신이 되고 자기의 세계가 되는 거예요. 탁 일어나면 처음에는 그와 같은 화학 물질들이 강력히 작동해서 내 감정을 컨트롤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요. 근데 딱 일어나면 ‘아, 화학 물질이 발생해서 내 감정을 이렇게 끌고 가려고 하고 있구나.’ 하고 빨리 알아차린 다음에, ‘그래, 90초만 참아보자!’

90초는 깊은 호흡을 한 세 번쯤 하거나 다섯 번쯤 하면 지납니다. 깊은 호흡을 한 세 번쯤 하면, 산소나 이런 것이 잘 공급이 되고 혈류가 증가해서 마음을 축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는 데 굉장히 좋아요. 그 전에는 그냥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일이 탁 일어나면 심호흡을 한 3회나 5회 하세요. 이렇게 말했어요. 근데 3회나 5회 하는 이유가 밝혀진 것이 당신의 감정을 끌고 가는 화학 물질이 90초간 머무릅니다. 90초만 머물러서 흘러가도록 하면 다음 순간의 내가 이리 갔던 것을 그냥 지켜보는, 그냥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의식 상태예요. 지켜보는 마음이 먼저 생깁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지켜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와 같이 만들어진 감정에, 만들어진 내부영상에 현혹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을 불교용어로 ‘정념’이라고 부릅니다. 바른 마음 챙기기 같은 알아차림 등등으로 한국어로 번역할 때 여러 가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정념도 있고 사념도 있는 거예요. 사념은 아까 말한 탐욕인데, 그것도 마음의 한 종류죠. 근데 이 탐욕은 자기를 괴롭게 할 확률이 높아요. 그런데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은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 확률이 높아요. 그래서 개인과 사회에 괴로움을 발생시키지 않을 것들을 아는 상태로 자기 몸과 마음에 일어난 심리 현상에 주시하는 것을 ‘정념’이라고 합니다.

정념이라고 하는 상태가 이어지는 거예요. 팍 올라왔는데 90초만 견디자고 쭉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 다음에는 말이 올라오려고 합니다. 보통 기분 좋고 나쁜 것에 따라서 말의 톤도 바뀌고 말의 내용도 바뀌고, 또 욕망이 없어지면 지금 또 선거 운동에서 여러 일들이 벌어지듯이 평소에는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 분도 막 이상한 말을 하고, 저는 거의 텔레비전 볼 때 그 분들 나오면 다른 데로 돌리는데 국회의원들 나와서 토론할 때 그건 거의 100프로 들을 필요가 없어요.

왜 들을 필요가 없느냐. 여당은 이미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할 것이 정해져서 내부에서 그것만 찾아가는 거예요. 야당은 거기에 맞는 것만 찾아갑니다. 절대 둘이 토론을 해서 공통점이나 다른 것을 찾아보자 라고 그렇게 써놓고 실제로는 자기 말만 한 시간 동안 하는 거예요. 절대로 다른 영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거예요. 주의를 안 기울이면 토론자들끼리 내부에서 신경 신호에 공명이 안 일어납니다. 둘이 만나서 갔는데 한 번도 본질적으로 공감할 수 없는 신체 상태에서 한 시간 동안 시청자들한테 쓸데없는 이야기 하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공감을 하는 이야기를 서로 하면 7초만 지나면 두 사람의 뇌의 파동이 비슷해집니다. 그래서 자기가 굉장히 넓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토론은 암만 들어봐도 안 돼요. 절대 공감, 즉 신경 파동이 한 번도 함께 공명파를 만들지 못해요. 그런데 앉아서 둘이를 이런 부분들을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하면 잘 되는 사람은 7초만 지나면 ‘맞아.’라고 자기가 수용하는 영역이 넓어지는 거예요.

안에서 자기를 볼 때 ‘나는 이런 사람이면 돼.’라고 하고, ‘그런데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는 것은 뭣하고 똑같냐 하면 여야 국회의원들이 나와서 토론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런 사람이어야 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런 자아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를 이루는 것 자체가 아까 말한 대로 온갖 중첩된 정보들이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정보도 볼 수 있어야 하고, 이 부분도 볼 수 있어서 함께 공명하는 축을 넓혀가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기의 생각 세계에 대해서 뒤로 물러나서 보는 훈련이 필요한 거예요. 그걸 정념이라고 할 때 이때도 중요한 것이 그런 상태에서 이제 무얼 해야 하냐면,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말을. 말의 힘은 굉장히 큽니다.

자기 자신한테 무슨 말을 하는가

한 25만 년 전에 지구상에 현생 인류가 나타났는데, 그 때 당시에 네안데르탈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뇌가 훨씬 더 큽니다. 우리가 뇌가 크기가 한 1250 정도 된다 하는데, 네안데르탈인은 우리보다 한 200 커가지고 1450 정도 돼요. 뇌 용량이 크다라고 하는 것들은 그것만 가지고 생각을 더 다양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여튼 용량도 크고 힘도 엄청 셌습니다.

그런데 언어를 발생시키는 부위가 우리 유전자에 있는데, 이것이 한 40만 개의 유전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언어를 발생시키는 유전 정보의 ATCG라고 하는 것이. 이 40만 개 중에서 네안데르탈인하고 현생 인류하고는 딱 한 자 차이 납니다. 네안데르탈인에게서 A가 있는 자리에, 현생 인류에는 T가 들어있습니다. 이 유전 정보 하나가 딱 바뀌면, 그냥 유전 정보만 바뀌는 게 아니고 구강 구조라든가 언어를 발생시키는 내부 구조들이 전부 바뀝니다. 그래서 자모음을 굉장히 다양하게 발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손들에게 정보를 굉장히 많이 전달할 수 있었어요.

한 25만 년 동안 살면서 우리는 이제 언어, 언어는 25만 년 전에 생겼고 변해오는 것은 한 17만 년 정도 됐고 문화 유전자가 확실히 생긴 것은 한 6만 년 정도 됐으니까 그 사이에 굉장히 시간이 걸리기는 하는데, 어쨌든 언어적 분별을 도와서 세상을 살아가는 굉장히 큰 도구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한편으론 뭘 잃었습니까? 언어가 발생되지 않는 상태에서 세계와 접속하는 통로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언어의 분별만큼 공감하기도 더욱 어려워지고, 언어의 분별이 세진만큼 자기 존재도 특정한 언어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말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내부에 있는 언어의 작동 회로를 바꿉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한테 무슨 말 하는지 한번 속으로 생각해보세요. 자기 자신한테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지. 내가 나를 볼 때 어떻게 보는가.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도 자기 혼자 있을 때는 펑펑 우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더군요. 나는 왜 인생을 이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뭐 제가 만나본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그걸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습니다만 어쨌든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이 가지고 있는 자아의 내용은 특정 부위로 집중돼 있습니다. 이 부분을 유연하게 한 사람은 자신에게 굉장히 너그러워집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어떤 마음으로 나를 보느냐가 자기를 결정하는 거예요. 근데 자기 자신에 대한 말을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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