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지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山水蒙   

, .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

몽괘는 형통하다. 내가 어린아이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나를 찾는 것이다. 처음 묻거든 알려주지만 두 번 세 번 물으면 모독하는 것이다. 모독하면 알려주지 않으니 자신을 바르게 지키는 것이 이롭다.

初六, 發蒙, 利用刑人, 用說桎梏, 以往吝.

초육효,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는 초기에는 형벌을 가하듯이 엄격하게 하는 것이 이롭다. 그러고나면 속박하고 있던 차꼬와 수갑을 벗겨주어야 하니 그대로 나아간다면 부끄럽기 때문이다.

九二, 包蒙, . 納婦, , 子克家.

구이효, 어리석음을 포용해주면 길하다. 부인의 말도 받아들이면 길할 것이니, 자식이 집안일을 잘하는 것이다.

六三, 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无攸利.

육삼효, 이런 여자에게 장가들지 말아야 한다. 돈 많은 남자를 보고 자기 몸을 지키지 못하니 이로울 바가 없다.

六四, 困蒙, .

육사효, 어리석음에 빠져 곤란을 겪게 되니 부끄럽다.

六五, 童蒙, .

육오효, 어려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이라 길하다.

上九, 擊蒙, 不利爲寇, 利禦寇.

상구효, 어리석음을 쳐서 일깨워 주는 것이다. 도적이 되는 것은 이롭지 않고 도적을 막는 것이 이롭다.

카오스의 혼돈 속에 만물이 생겨나는 때가 둔(屯)괘라면 둔괘 다음의 몽(蒙)괘는 이 혼돈 속에 태어나는 것들이 아직 어려 어리석음에 있는 상태다. 몽괘는 이 모습을 산 아래 물이 있는 형상으로 표현한다. 산 밑에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데 이 샘물은 어디로 흘러 가야 할지 모른 채 작은 흙 둔덕만 만나도 멈추어 버린다. 그러나 샘물에 길을 내주어 제대로 흘러가게 한다면 샘물은 시냇물을 만나 강이 되고 바다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몽이 때에 맞게 가르침을 구해 지혜의 깨우침을 얻는 과정과도 같다.

몽괘에는 두 개의 역할이 등장한다. 양효인 구이효와 상구효는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고 나머지 음효들은 배우는 제자다. 여기서 산수몽괘는 스승-제자 사이의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것은 스승이 제자를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자발적으로 스승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匪我求童蒙 童蒙求我) 몽은 험난함을 만나 멈출 수밖에 없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마주했을 때 겸손한 자세로 스승을 찾는다. 몽은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안다. 소동파는 “몽이란 사물에 가려진 것일 뿐이니 그 가운데는 반드시 분명 본래부터 올바름이 있다”고 했다. (소식, 동파역전, 82, 청계) 비록 지금은 이치에 어둡지만 몽 자신에겐 깨우칠 수 있는 근본 성품과 바탕이 있다. 이를 올바른 길로 가이드 해주는 것은 스승이다. 이때 가르치는 스승과 배움을 구하는 제자 사이의 믿음과 신뢰는 필수! 몽괘의 괘사가 한 번 묻고도 의심쩍어 다시 묻는 제자의 태도를 경계하는 이유다.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몽괘는 육오효의 동몽처럼 스승에 대한 신뢰를 품고 겸허히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훌륭한 제자라고 말한다. 그럼 제자가 가르침을 따라 열심히 노력만 하면 깨우칠 수 있는 걸까? 몽괘는 제자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어리석음을 부수고 깨뜨리기(擊蒙) 위해선 상구효같은 스승의 역할이 결정적임을 시사한다.

20세기 서양에 불교를 알린 인물 중 티베트의 학승 게쉐 랍텐(1920-1986)이란 분이 있다. 이분은 열여덟 살까지 농가의 목동으로 살았는데, 경전을 공부하고 수행하는 스님의 삶을 동경하던 중 가정을 꾸리고 사는 재가자의 삶은 끝없는 의무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생각에 출가를 결심한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 쎄라 승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 게쉐 잠빠 케둡과 여러 스승을 만나고, 이후 스승들의 가르침을 따라 무려 24년간의 치열한 공부 끝에 그 자신 또한 큰 스승이 된다. (게쉐 랍텐, 어느 티베트 승려의 삶, 이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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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각별하다. 제자는 스승에게 온전히 헌신하며, 스승은 제자를 자식처럼 돌보고 자신이 평생에 걸쳐 닦은 불법을 전수한다. 랍텐의 스승이었던 게쉐 잠빠 케둡은 공부를 막 시작한 랍텐을 마치 어머니처럼 보살펴주었는데 이는 몽괘의 구이효가 아직 어리숙하고 무력한 제자들을 인자하게 감싸는(包蒙) 모습과도 같다. 그는 종교적 가르침만 베푼 것이 아니라 가난한 랍텐에게 음식과 옷을 구해주고 행동거지를 일일이 살펴주며 아플 때 보살펴주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그 단계에서 랍텐의 공부가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제자의 공부가 깊어지고 비약하는 단계는 몽괘의 상구효에서 스승이 어리석음을 쳐서 일깨워주는 격몽(擊蒙)의 때다. 이때 상구효는 스승은 도적이 되지 말고 도적을 막아주어야 한다(不利爲寇 利禦寇)고 말한다. 여기서 도적(寇)이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비유컨데 공부의 성취를 침해하는 모든 물리적 정신적 상황을 말한다.

승원에서 공부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랍텐의 스승은 고향에서 가르침을 펼치기 위해 쎄라를 떠난다. 쎄라에 남아 공부하던 랍텐은 스승을 그리워하다 결국 자신도 귀향을 택한다. 3개월이 넘는 풍찬노숙의 모진 고생 끝에 간신히 고향에 도착한 랍텐. 그는 벅차오르는 감동으로 스승을 찾아뵙지만, 스승은 그를 반가이 맞이하기는커녕 크게 꾸짖는다. 네 공부에 가장 유익한 곳에 너를 두고 왔는데 어찌 그곳을 떠나 여길 왔느냐고. 다시 돌아가 공부하든지 아니면 다시는 나를 볼 생각을 하지 말라고! 스승의 냉엄한 태도는 랍텐의 공부가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어구(禦寇)’였다. 제자의 정진에 방해가 되는 도적을 막으려는 것. 사실 스승의 입장에선 제자가 왔다면 그를 따뜻이 맞이하며 그에게 승원의 한 임무라도 맡기고 곁에서 공부하도록 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승은 그것이 랍텐의 공부와 성취에 도움이 되지 않는 ‘위구(爲寇)’라고 판단한 것이다. 랍텐은 그토록 고되었던 긴 여정을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결국 스승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가르침과 배움의 길에서 스승과 제자는 각자의 위치에서 더 쉽고 유혹적인 길을 만난다. 이때 스승은 귀한 배움의 길에 해가 될 도적으로부터 제자의 공부를 보호하는 것이 임무다. 실제로 스승은 랍텐이 쎄라로 돌아가는 것을 반대할 승원 당국과 가족들에게 마지막까지 랍텐이 비밀을 지키게 함으로써 제자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보호한다. 그런데 도적은 이렇게 현실적 상황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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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침을 줄 때 가르침을 사유하고 숙고해서 자신의 지혜로 만드는 것은 제자의 몫이다. 학생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낑낑대고 있으면 답답한 마음에 얼른 답을 가르쳐주고 싶지만 훌륭한 선생은 학생이 이리저리 궁리하면서 답을 구할 때까지 지켜본다. 해답지를 얼른 들이미는 위구(爲寇)가 아닌 학생이 직접 깨우치도록 보호해주는 어구(禦寇)다. 어구는 제자에게 스승 자신이 깨우친 방식이 아닌 제자 스스로 자신의 방식을 찾도록 도와준다. 랍텐의 스승도 랍텐에게 정성껏 가르침을 전수하지만 지난한 노력과 수행의 과정을 통해 공부를 체득하고 이치를 터득하는 것은 결국 랍텐 자신이었다.

제자가 스스로 깨우쳐 가는 길을 보호해주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무한한 신뢰와 존경이 있다. 이것을 상전에서는 위아래가 서로 소통되어 따른다(上下順也)고 표현한다. 몽이 격파되고 스승과 제자가 서로 막힘없이 통할 때 스승의 깨달음과 제자의 깨달음은 공명한다.

갓 솟아난 작은 샘물처럼 험난한 장애 앞에 멈춰버리던 몽은 이제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지혜의 힘을 얻어 큰 바다가 된다. 험난함은 몽이 어리석어 깨우치지 못했기에 나타났던 현상이다. 미약한 물줄기에게 험난함은 장애가 되지만 큰 바다가 된 지금 예전의 험난함은 더 이상 장애가 아니다. 어리석은 몽이 스승을 만나 배움의 길을 통과하며 형통하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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