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찬영 (감이당 장자스쿨)

(전편에 이어서)

2) 에이해브의 ‘No’와 이슈메일의 ‘And’

유신론자의 삶을 살아왔다면 그 삶의 새로운 가능성은 무신론자로 전향하는 것인가? 절대자와 관련된 모든 것에 ‘아니오’를 외치며 정반대의 지점을 다시 새롭게 확보하는? 에이해브를 통해 그런 방향성의 결과물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아니오가 결국에는 이전과 다를 것 없이 아주 비슷한 배치 내에서 동일하게 움직인다. 그렇다면 새로운 도주선과 운명 탐구의 길은 어떻게 열어젖힐 수 있을까? 나는 신실한 신도의 삶에서 광적인 반종교론자로 내 사상적 좌표만 살짝 달리하는 것을 새로운 가능성이자 길이라고 믿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신이란 말이 얼마나 싫었던지, 작년에 스피노자에 대해 배우는데 그 단어를 마주하자마자 불쑥 짜증이 올라왔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분명 그 신이 그 신이 아니란 걸 아는데도, 나는 단어를 전혀 바꿔보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었다. 이것은 ‘아니오’의 포지션을 고집할 때 나오는 경직성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철학의 방향, 즉 로고스의 가능성은 ‘아니오’가 아닌 ‘그리고’의 영역 위에서 탄생할 것이다.

들뢰즈는 “철학은 반성이 아니라 생성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철학을 짧고 간단하게 정의 내린다. 단순해 보이는 문장 안에 정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 글의 프롤로그를 써내려갈 때만 해도, 나는 철학이란 무조건 망치로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부정하고 의심하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파괴의 과정이 섣부른 반성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내게 어떤 힘들이 작용하고 있는가? 혹시 내가 지나온 모든 길들을 부정하고 앞으로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써 내려가는 것을 철학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성과 달리, 생성이란 니체의 말대로 어느 것 하나 없어도 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의 모든 요소들 속에서 그저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생성의 철학이 주는 가장 큰 기쁨이다.

에이해브와 종말론을 연결시키며, 또 이슈메일을 다시 새롭게 인식하면서 확실히 알았다.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내 신체성이 작동하는 배치와 구도 자체를 들여다보고 바꾸지 않는 이상, 내 과거와 그동안의 길을 자꾸만 너절한 것으로 간주하며 계속 새로운 완성을 세팅하는 타나토스적 갈구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Yes와 No의 버튼을 메뚜기 뜀뛰듯 펄쩍펄쩍 오가며 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를 가로지를 새로운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것이 바로 And, ‘그리고’의 가능성이 아닐까? 내게 허락된 ‘그리고’란, 무신론 vs 유신론, 철학 vs 신앙의 대립항 구도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무신론 ‘그리고’ 유신론, 철학 ‘그리고’ 신앙, 지혜 ‘그리고’ 영성, 가족 ‘그리고’ 공부일지도 모른다. 이 ‘그리고’의 가능성에서 수많은 블록들이 다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 그리고 영성, 신앙 그리고 공부… 얼마나 많은 것들이 비로소 가능해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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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반성이 아니라 생성하는 것이다.”

『모비딕』 곳곳에 숨겨져 있는 성서의 코드를 읽어내고, 이를 재해석하느라 다시금 성서를 폈다. 수십 번도 더 통독하고 필사하고 낭송한 책이 바로 성서이지만, 『모비딕』을 읽은 후에 다시 찾아 읽은 창세기, 요나서와 열왕기상, 전도서, 요한계시록 등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새롭게 읽힐 수가 있는지, 완전히 처음 읽는 것처럼 훅 다가오는 성경의 낯섦에 크게 놀랐다. 그와 동시에 이슈메일이 고래에 대해 평생 알지 못할 거라고 말한 맥락이 어떤 뜻인지 와 닿는 것이다. 내가 과연 성경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모비딕』 한 권만으로 다른 텍스트를 읽는 눈이 바뀌어 버린다. 그렇다면 매번 새롭게 고전을 읽어낼 수 있는 눈과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신체성으로 내가 열려있을 때, 이 ‘알 수 없음’마저 얼마나 큰 재미로 다가올 것인지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이건 두려움을 낳는 ‘무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에이해브처럼 세상천지의 수수께끼를 혼자서 다 격파하려는 고독한 갈증에 목말라 할 필요가 없다. 이 말랑말랑하고 유연한 불멸의 고전들은 주역 47번째 수풍정 괘의 괘사처럼, 마르지도 넘치지도 않는 우물물과도 같아서(无喪无得), 오고 가는 모든 이들을 먹이는 데다가(往來井井), 육오효의 말씀처럼 더운 날 벌컥벌컥 들이키는 깨끗한 찬물처럼 통쾌함을 가져다준다(井洌寒泉食). 수많은 점들을 통과하는 나만의 ‘그리고’ 연결고리들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이슈메일이 알려준 통쾌함의 로고스다. 내가 로고스적 힘으로 움직이는 철학의 문이 된다면 과거에 나를 지나쳤던, 지금 나를 통과하고 있는, 또 앞으로도 내게 흘러들어올 모든 것은 그저 철학, 철학이 된다. 기존의 배치 구도는 그 움직임 속에서 완전히 무력화되거나 변화될 것이다. 거기에 내 공부의 방향성이 보인다.

3) 원숭이 밧줄의 철학

『모비딕』은 마치 감자를 줄줄이 캐어나가듯 연결되고 연결됨의 연속이었다. ‘이만하면 됐겠지’하는 순간에 실타래를 풀 듯 희미한 선이 나오고 또 나오는 것이었다. 다시 『모비딕』을 쓰라고 한다면 또 다른 이야기들과 맥락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만큼 이 책에서 경험할 수 있는 채널들은 무궁무진하다고 감히 자신한다. 내가 고래잡이 이야기를 하는 책 덕분에 미국사를 이 잡듯 뒤지고, 민주주의의 철학적 함의와 개신교에 대해 분석하는 글을 쓰며 날밤을 샐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담임이신 고미숙 선생님의 가이드와 학인들의 조언이 끝을 알 수 없는 이 줄줄이 넝쿨을 계속 타고타고 내려가게 했다. 광활한 태평양을 넘고 2세기를 돌아 그 너머까지, 그 심연까지, 마침내 나 자신으로 이어지는 연결성을 발견하도록 말이다. 이슈메일이 말한 원숭이 밧줄이 내 앞에도 놓여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고래의 시체를 해체할 때 바다 위로 떨어지지 않도록 서로 묶여서 작업하는 선원들처럼, 이 흰고래와 함께 파도로 휩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장자스쿨의 동학들이 내가 묶였던 밧줄의 다른 한쪽 끝에 묶여 인연이란 이름으로 많은 영감과 이야기들을 건네주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무엇을 했다’라는 언어에 기초한 확신을 믿지 않는다. 정말 ‘내가’ 한 것인가? 지금 내 옆에서 함께 공부하고 웃고 떠드는 동학들은 물론이거니와 샴쌍둥이처럼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 이 인연장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확연하게, 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움직이며 흘러가고 있는지. 그렇다면 그 속에서 내가 온전한 나만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확언할 수 있는 건 대체 몇이나 될는지. 나는 ‘나’라는 주어의 무용(無用)함과 함께 원숭이 밧줄의 철학을 다시금 되새긴다. 더욱더 많은 밧줄로 더 많은 인연들과 연결된다면 끝없이 반복되는 영원한 항해로(航海路)도 그 무게감을 벗어던지고 한없는 유쾌한 철학의 여로로 다가올 것이다. 이 글은 2019 기해년 장자스쿨의 인드라망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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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내가 무엇을 했다’라는 언어에 기초한 확신을 믿지 않는다.

4) 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항해로

참으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고전 한 권을 늘상 붙들고 있다 보면 일상의 곳곳에 가랑비에 옷이 젖어가듯 삶 속에 배어드는 문장들을 감지하게 된다. 내가 어느샌가 『모비딕』의 언어에 기대어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문득 깨닫는 것이다. 예전에는 밑도 끝도 없는 안개에 둘러싸인 듯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공포와 불안감에 어쩔 줄 몰랐다면, 이제는 앎이 순간순간 가져다주는 단단함과 평온함을 느끼는 동시에, 지금 내 눈앞에 벌어지는 사건들과 인연들을 관찰하는 재미와 호기심은 날이 갈수록 또렷해지고 무궁무진해지는 생생함을 누린다. 공부를 시작한 뒤로, 난 더 이상 내 하루하루를 지겨운 쳇바퀴 굴리기의 반복으로 보지 않는 새로운 시선을 확보하게 되었으니까. 이슈메일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와서도 우울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성경 속의 나사로처럼 죽다가 부활했다고. 이제 남은 생이 얼마나 재밌을지 기대된다고 패기 넘치게 외친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이 장면들은 왠지 모를 담담하고 따뜻한 용기로 나를 내면에서부터 데워주는 것 같다. 일상의 곳곳에 모비딕의 흰고래는 나의 순간순간에 이렇게 헤엄치고 굽이굽이 닿으며 유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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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앎이 순간순간 가져다주는 단단함과 평온함을 느끼는 동시에, 지금 내 눈앞에 벌어지는 사건들과 인연들을 관찰하는 재미와 호기심은 날이 갈수록 또렷해지고 무궁무진해지는 생생함을 누린다.

운명을 안다는 것은 생로병사의 스텝을 밟아나가는 태도와 방식을 스스로 발명하는 것이다. 에이해브와 이슈메일, 이 두 야만인 역시 앎에 대한 각자의 방식, 각자의 깨달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항로는 다르지만 둘의 공통점은 근원적 질문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다는 것. 무지에서 벗어나 앎의 행로를 따라가기 위한 고래사냥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책이 보여주는 두 가지의 독특한 항로는 오래도록 고전으로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 이 여정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망각하고 있는지, 바로 코앞에 두고 눈 감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 과연 무엇인지 알려고 해야 한다. 이 알려고 하는 의지만이 무지로 인해 마비된 좀비로부터 당신의 생명력을 흔들어 깨울 것이고, 삶과 죽음을 비롯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순간과 운명의 흐름들을 온전히 누리게 되는 기예를 알려줄 테니까.

깨달음의 길을 떠나 헤매는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죽은 자들 속에 있으리라

잠언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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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영
Guest
다영

한 권의 책이 쌤을 이토록 큰 생생하게 살아가게 하다니 너무 놀라워요! 넝쿨넝쿨 ‘그리고’를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