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합리화의 달인, 호호미

이호정(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약자를 발굴하는 감정

난 아직 아이를 낳지도 않았건만, 내 안에는 일찍부터 ‘어머니’가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쓰다듬는 손길은 늘 무언가를 생산했다. 바로, ‘결핍’이다.

불쌍한 사람, 약한 사람을 보면 나는 금방 마음이 동했다. 그 사람을 도와줘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끓어오르는 것이다. 나의 (진짜)어머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외롭게 집에 혼자 계신 것,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주부로서 사시는 것, 선천적인 것+움직임이 적다보니 각종 성인병을 앓고 계신 것 등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팠다. ‘성품 훌륭하고 성격도 시원시원하신 분인데 이렇게 집에만 계시다니…안 될 말씀! 내가 나서야겠다!!’

내 마음을 움직인 동력, 그것은 상대를 ‘불쌍하게’ 보는 시선이었다. 나는 그렇게 보는 게 엄마를 더 위하고, 엄마를 더 생각하는 일이라 믿었다. 누군가를 안타깝게 바라볼 때, 우리 안에서 그 존재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생기지 않나. 그리고 우리는 그걸 ‘사랑’이라고 말한다. ‘Humanity’, 혹은 ‘인류애’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약한 사람을 도와주고 어려움에 처한 이를 위해 손길을 뻗치는 일은 내 안에 당연한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상당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지만 그 사람을 ‘불쌍하게’ 보는 게 과연 정말 상대를 위한 일일까? 내가 누군가를 불쌍히 여길 때 나오는 태도를 보자. 혀를 끌끌 차기도 하고, 상대방을 쓰다듬거나 그 사람의 감정을 같이 나누기도 한다. 그렇게 상대와 나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 속에 ‘눌러앉아’ 있게 된다. 동정의 감정선 위에서 다른 상황, 다른 삶에 대한 상상력은 발휘되지 않는다. 그저 상대를 계속해서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동정의 시선은 왜 생겨나는 걸까? 상대와 더 나은 삶을 도모하게 하는 힘도 아니면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도와주고 싶다’는 이 마음의 정체는 대체 뭘까? 내 안의 어머니, 호호미는 바로 그런 상대의 결핍을 이용해 자신의 힘을 행사한다. 상대를 약한 존재로 끌어내리고 자신이 상대를 돌봄으로써 흐뭇한 만족감, ‘내가 위에 있다’는 느낌을 맛보는 것이다.

그런 쾌락은 호호미로 하여금 약하고 불쌍한 존재를 끊임없이 찾아다니게 만든다. 그 사람이 실제로 약한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호호미는 한시라도 빨리 상대를 돌봐주고 자신이 올라가는 즐거움을 느껴야 하기 때문에 상대의 상황 같은 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아주 적극적으로 상대의 ‘결핍’을 생산해서 상대를 약자로 만들어버린다. 약자를 발굴하게 만드는 감정, 그게 바로 연민과 동정이다.

정신승리, 그리고 오이디푸스

호호미가 생산하는 결핍에는 상당히 무시무시한 전략이 뒤따라온다. 바로, ‘합리화’다. 그것은 상대나 나 자신이 힘들고 불쌍해 보이기 시작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발생한다. 그 찰나의 순간, 모든 것은 흐려진다.

질투하는 나 자신이 힘겨워 보이는 그때, 나는 질투라는 해로운 감정의 뿌리를 뽑기로 마음먹었던 계(戒)를 슬금슬금 내려놓는다. 그게 얼마나 나와 타인을 갈라놓게 하는 감정인지 같은 것은 더 이상 중요치 않다. ‘불쌍한데!! 지금 그따위 게 무슨 소용이람!?’ ‘불쌍하다’는 감정 앞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모든 현실들은 힘을 잃는다. 연민과 동정은 나를 완벽히 무장해제 시키는 ‘절대감정’으로써 작동했다.

무장해제 된 나의 눈은 이제 상황을 명확하게 보지 못한다. 질투 앞에서 눈을 부라리며(?) ‘다르게 살고 싶다’를 외치던 나 자신은 어디로 가고, 그저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자세로 퍼져서 앉아있는 스스로를 대면한다. 사실 뭐 인생에 있어 그렇게까지 중헌 게 있을까? 그냥 살면 되지 않나? 뭐 이런 말들이 내 안에서 득세하게 되는 거다.

놀라운 일이다. 연민과 동정이라는 감정에 의해 나는 내가 가진 숙제를 삽시간에 합리화해버렸다. 그것도 그냥 합리화가 아니다. 내게 일어났던 것은 완벽한 ‘정신승리’였다. 말 그대로 나 자신의 ‘정신’ 속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다. “질투는 누구나 하는 거 아니야?!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돼?? 나도 사람이라고오오!!!” 아주 발악을 했다.

그런 정신승리로 인해 얻게 되는 승리감은 나 자신의 삶을 더욱 견고해지게 만든다. 원래 살던 삶으로부터 단 한 발짝도 못 떨어지게, 조금도 다르게 살지 못하게 말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가진 업(業)들이 절대 떨어지기 싫어서 나를 어떻게든 붙잡기 위한 소행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그러한 업의 바다에 둥둥 떠서 표류하게 된다. 슬픈 얼굴로 연민하고 동정하는 호호미에 의해서.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는 호호미는 사실 나의 업들과 결탁한 합리화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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