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합리화의 달인, 호호미

이호정(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전편에 이어서)

결국 누군가를 쓰다듬으며 연민하고 동정하는 일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괴로움을 느끼는 삶 그대로 계속해서 살아가게 한다.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구실을 계속해서 주는 것이다. “괜찮아~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인정 넘치는 말 뒤에 가려져 있는 것은 “너 계속 그러고 살아^^”라는 무시무시한 방관과 책임회피다.

쓰다듬고 동정한다는 건 어떤 삶에서 ‘결핍’을 발견하는 일이다. 내 안의 어머니 권력은 바로 그 결핍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삶을 결핍으로 보는 이러한 시선 속에서 나의 욕망은 갈 곳을 잃었다. 오이디푸스적 삶이 도래한 것이다…….

 

부패와 죽음의 깊은 냄새는 바로 오이디푸스, 즉 늪지의 땅에서 나온다. 이 죽음을 오이디푸스적 삶을 위한 보존실로 만드는 것은 거세, 독실한 금욕적 상처요, 기표이다.…섬뜩한 아낭케, 약자들과 쇠약한 자들의 아낭케, 전염성 강한 신경증의 아낭케의 이름으로, 욕망은 자신에 맞서 등을 돌리고, 자신의 그림자나 자신의 원숭이를 생산하며, 공허 속에서, 즉 자기 자신의 결핍 속에서 발육하는 낯선 인공적 힘을 발견한다. 

(질 들뢰즈‧펠릭스 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553쪽) 

생산하는 힘으로써의 욕망은 삶에 대한 결핍 위에서 등을 돌린다. 그리곤 ‘자신의 그림자나 자신의 원숭이를 생산’하며 ‘결핍 속에서 발육하는 낯선 인공적 힘’을 발견한다. 그 낯선 인공적 힘이란 바로 ‘사랑받아야 한다’는 욕망이다. 그것은 우리가 삶을 어딘가 결핍된 것으로 보는 순간부터 생겨나는 ‘인공적 힘’이다. 다시 말해, ‘사랑받아야 한다’는 욕망은 ‘만들어진’ 거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라고 생각해왔는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 가사는 우리를 얼마나 헛된 곳으로 데려가는가. 삶은 사랑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의 그림자나 원숭이가 사랑받는 걸 보면서 즐거워한들, 정녕 그게 다란 말인가? 우리는 누군가에게 이쁨을 받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들인가?

현대인들이 ‘인정욕망’에 시달리는 것은 바로 이 ‘결핍’과 궤를 같이 한다. 뭔가,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 그것은 오이디푸스적 삶의 위험신호다. 그 안에서 욕망은 생산하는 힘으로써의 위력을 잃는다. 그저 사랑받기를…누군가 ‘나’를 알아주기를…….

현대인들이 ‘인정욕망’에 시달리는 것은 바로 이 ‘결핍’과 궤를 같이 한다. 뭔가,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 그것은 오이디푸스적 삶의 위험신호다.

욕망은 그 자체로는 사랑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사랑하는 힘, 즉 증여하고 생산하고 기계 작동하는 덕(德)이다(왜냐하면 삶 속에 있는 것이 어떻게 또한 삶을 욕망할 수 있으랴? 누가 이것을 욕망이라 부르려 할까?)  

(같은 책, 553쪽)

들뢰즈‧가타리는 나에게 ‘욕망이 삶 속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욕망이란 삶 밖에 있는 것, 삶에 없는 것을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온전히 삶 안에서 일어나는 일, 삶을 움직이고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 통렬히 깨닫게 해주었다. 그것은 내가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을,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줄 수 있고’, ‘만들어낼 수 있고’, 어떤 흐름을 ‘작동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했다. 그게 바로 ‘생명’이라는 것도.

‘나’로서의 삶은 힘든 게 많다. 나를 위해 지켜야 할 것도 많고, 사랑도 받아야 하고…. 하지만 ‘생명’으로서의 삶이라고 하면 차원이 아주 달라진다. 끊임없이 다른 생명들과 주고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생명으로서는, 어떤 존재에게 계속해서 ‘줄 수밖에’ 없다. 아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고 있다’는 증거다. 이것이 바로 욕망의 힘이다. 욕망이란 한낱 내가 가져야할 것들을 원하기만 하는 그런 소극적인 힘이 아니라, 내가 아닌 그 어떤 존재에게도 무언가를 줄 수 있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광대하고도 드넓은 힘, 그야말로 덕(德)인 것이다!

욕망이란 한낱 내가 가져야할 것들을 원하기만 하는 그런 소극적인 힘이 아니라, 내가 아닌 그 어떤 존재에게도 무언가를 줄 수 있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광대하고도 드넓은 힘, 그야말로 덕(德)인 것이다!

Outro

우연히(=반자발적으로) 시작된 이 글은, 내 안에 우글거리고 있는 욕망들과 마주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내게 주었다. 글을 쓰기 위한 준비단계를 거치고 있던 때만 해도, 나는 그것들을 도저히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다. 너무 무서웠고, 싫었다. ‘질투얘기 금지’라는 방편으로 간신히 효과를 보고 있었는데…그 제어 안 되는 ‘미친 감정’들이 또 튀어나오면 나는 어찌 산단 말인가!ㅠㅠ

그 감정들은 내게 있어 참으로 ‘실존적인’ 문제였다.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실제로 내 삶을 구성했으니까. 나는 연두-호미미-호호미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세계 속에서 살아왔다. 그것은 ‘연애’라는 장에서 아주 극단적으로 드러났고, 공동체에서 연애를 한 덕분에 나는 이 문제와 극적으로 조우할 수 있었다. 부끄러운 점이 당연히 있지만, 생각해보면 아주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시퍼런 괴물을 형상화한 ‘연두’라는 소유욕은 나를 정말로 몹시 괴롭혔기 때문에 나는 그 장의 마지막을 쓸 때 여전히 좀 찝찝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딘가 굉장히 시원~했다. 연두는 나와 사람들 간의 관계를 막는 주범이었다. 엄청난 힘의 소유욕은 그만큼 강렬한 증오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걸 낱낱이 폭로하는 작업은 나로 하여금 연두를 찐하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해한다’는 건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일이기도 했다. “이래서 소유욕이 증폭되는 거였구나~”라는 등의 앎은 왠지 모르게 나를 가볍게 해주었다. 내 안에서 망동하는 소유욕이 어떤 놈인지를 조금 더 알게 된 것만으로도, 그걸 대할 때의 마음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시퍼런 괴물을 형상화한 ‘연두’라는 소유욕은 나를 정말로 몹시 괴롭혔기 때문에 나는 그 장의 마지막을 쓸 때 여전히 좀 찝찝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딘가 굉장히 시원~했다.

그러면서 만나게 된 변태 도덕론자 호미미, 합리화의 달인 호호미는 나의 소유욕을 정당화하는 결핍들이 어떻게 생성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 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갖가지 방식들이 출현해서 스스로도 많이 놀랐다. 무엇보다 놀라웠고 쓰는 데 가장 애를 먹었던 지점은 바로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 안의 가족 삼각형을 선명히 인식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내 안에서 근대 이후 핵가족의 역할과 위치를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내가 겪는 이 고통들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님을 실감케 했다. 우리 모두가 ‘오이디푸스적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고, 동시에 거기에서 어떻게든 함께 야반도주를 하고 싶어졌다.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안티 오이디푸스』에게서 전해 받은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그들 역시 오이디푸스적 삶으로부터의 야반도주(?)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나는 그 열기에 힘입어 내 문턱에 조금씩이나마 다가설 수 있었다. 하나의 책과 이런 식의 화학적 결합을 일으킬 수 있다니…! 그것은 나를 무척이나 충만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써온 것은 ‘글’이라기보다는 ‘브리꼴라쥬’였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에는 굉장히 다양한 재료와 흐름들이 덧붙어있다. 이 글을 시작하게 한 것은 계속해서 함께 공부해온 근영샘과 친구들이었고, 계속 써질 수 있었던 것 또한 삶을 함께 하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입과 사유와 웃음 덕분이었다. 존재적 불안에 허우적대고 나 자신을 끊임없이 비하하는 데 쓰이던 욕망에서, 브리꼴라쥬를 생산하는 욕망으로의 이행. 이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다른 성욕, 다른 욕망의 탄생’이었다. 참으로 멋진 일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써온 것은 ‘글’이라기보다는 ‘브리꼴라쥬’였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에는 굉장히 다양한 재료와 흐름들이 덧붙어있다. 이 글을 시작하게 한 것은 계속해서 함께 공부해온 근영샘과 친구들이었고, 계속 써질 수 있었던 것 또한 삶을 함께 하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입과 사유와 웃음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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