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2부. 슬기로운 유배생활(1) - 군자는 어떻게 유배지와 만나는가

문리스(남산강학원)

유배는 못 슬퍼 - 지행합일 vs 지행일치

정덕 4년(1509), 양명(38세)은 귀주성 제학부사(提學副使) 석서(席書)의 방문을 받습니다. 석서는 당시 귀주성의 교육(학문)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관리(제학부사)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식 방문 이전에 이미 몇 차례 양명의 강의를 수강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행장이나 연보 등에 실린 이 시기의 기록들을 보면 양명은 의외로 용장 생활에 잘 적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본 생활 여건이 안정적이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조건의 측면에서 보자면 용장은 양명에게 거의 모든 면에서 최악의 상황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정작 양명을 돕기 위해 따라왔던 시종들은 각종 풍토병과 향수병 등에 시달리며 우울 증세를 보였던 것에 반해 양명은 빠르게 현지에 적응하기 시작합니다. 타고나길 건강하고 강골이었기 때문일까요? 전 수많은 중앙 관료(그리고 그 동료 무리)들이 용장 등 ‘변방’ 지역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기본적으로 그들의 허약한 신체성에 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하지만 양명의 용장 생활에 관해서는 그 외에도 주목해봐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명사(明史)>에 실린 왕양명의 열전(王守仁傳)에는 왕양명이 그들(묘족, 요족 등)의 풍속을 기반으로 해서 그들을 이끌어 교화시켰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매우 기뻐하며 무리를 이끌고 나무를 베어 머물 집을 지어주며 왕양명을 거주해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수인인속화도(守仁因俗化導),이인희(夷人喜), 상솔벌목위옥(相率伐木為屋), 이루수인(以棲守仁).” 눈에 띄는 대목은 ‘인속화도(因俗化導)’, 즉 그들(오랑캐)의 풍속을 긍정(?)한 바탕 위에서 그들을 이끌었다는 부분입니다.

<명사(明史)>에 실린 왕양명의 열전(王守仁傳)에는 왕양명이 그들(묘족, 요족 등)의 풍속을 기반으로 해서 그들을 이끌어 교화시켰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매우 기뻐하며 무리를 이끌고 나무를 베어 머물 집을 지어주며 왕양명을 거주해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인속화도! 이것은 양명의 현지화 전략이라 부를 만합니다. 이 대목은 다음 절에서 다룰 ‘상의 사당(象祠)’과도 관련이 깊고, 앞에서 다뤘던 하루헌의 기본 태도와도 부절을 합한 것처럼 맞물려 있습니다. 이른바 중앙(문명)으로부터 이방(야만)의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이방의 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길을 찾습니다. 이방의 땅에서 내 몸을 더럽히지 않은 채 고결(!)하게 자신을 지킬 길을 찾으려는 마음인 것입니다. 당연히 그럴수록 현지인들과는 더욱 분리될 뿐입니다. 


양명이 달랐던 점은 양명이 추구했던 유배 생활이란 그곳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오랑캐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랑캐에서 자유로워지는 길. 요컨대 양명은 묘족 등 현지인들에게 그곳의 지리 및 기후에 맞는 농사법 등 삶의 기술을 배웁니다. 반면에 현지인들은 양명을 통해 자신들에게 부족했던, 삶을 지혜(지식)로 다듬어가는 배움의 기회를 얻습니다. 


오랑캐인들이 기뻐했다(夷人喜). 저는 이 말이 의미심장하게 읽힙니다. 양명이 오랑캐 사람들의 도움으로 하루헌, 군자정 등 머물 곳을 갖추면서 제일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는 그곳에 학교(용강학원)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용강서원으로 그 지역 현지인들이 드나들게 되면서, 그들은 처음으로 배움의 기쁨(학이시습, 불역열호)을 만끽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상황의 전체적인 총합 표현이 오랑캐인들이 기뻐했다는 말의 핵심입니다. 제가 있는 공부 공동체(남산 강학원)에 그리고 함께 있는 인문 의역학 연구소 감이당에는 뒤늦게(!) 배움을 찾아 공부하러 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현직에서 은퇴하고, 때로는 현직중에 현직을 포기하고 공부에 접속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면 한결같이 배우는 게 재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공부 자체는 언제나 녹록치 않은 법이고 그런 점에서 힘든 일이라면 힘든 일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공부는 또한 언제나 공부를 하는 내 자신에게 즐거움을 선물합니다.

오랑캐인들이 기뻐했다(夷人喜). 저는 이 말이 의미심장하게 읽힙니다. 양명이 오랑캐 사람들의 도움으로 하루헌, 군자정 등 머물 곳을 갖추면서 제일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는 그곳에 학교(용강학원)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용강서원으로 그 지역 현지인들이 드나들게 되면서, 그들은 처음으로 배움의 기쁨(학이시습, 불역열호)을 만끽했던 것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유배의 이미지입니다. 조금 과감하게 말해보면, 저는 유배의 이미지란 타인의 시선에 불과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유배가 힘들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유배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는 유배지의 실상을 이해하기 어렵게 할 뿐 아니라, 유배의 독특성 또한 가려버립니다. 전근대 시기 대표적인 인물들이 태평성세에서 평탄한 관직 생활을 지내며 사상적+예술적+문화적 성취를 이뤄낸 경우가 있었을까요? 


어쨌거나 양명의 용장 생활은 아마도 하루 24시간이 모자랐을 것입니다. 기본 삼시 세끼(당시엔 두끼만 먹었다고 해도 어쨌거나 끼니 찾아 해결하는 일만도 이미 하루 일거리입니다!) 거기에 곳곳을 다니며 산책하고, 터를 잡고, 목재 등을 마련하고, 집을 짓고, 인근 사람들과 사이 좋게 교유하고, 틈틈이 농사일을 하고, 찾아오는 손님들 맞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갑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유배지에서 제대로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처지를 슬퍼한다거나 떠나온 고향 생각 등으로 우울할 틈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유배지가 우울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유배지에선 우울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양명이 낯선 이방인인 그를 경계하던 묘족 등 현지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이야기는 양명의 용장 행적을 살필 때 몇 차례 반복됩니다. 이를테면 귀주성 상급 기관의 권력을 등에 업고 용장에 왔던 한 관리가 양명을 모욕하려다 묘족 주민들에게 오히려 구타당했던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양명은 졸지에 귀주성 안찰부사였던 모응규(毛應奎)의 질책을 받게 됩니다. 직분과 직책상 하급 관리로서 상관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양명은 끝내 모응규의 사죄 요구를 거절합니다. 주민들의 분노는 자신이 시킨 게 아니고, 용장에서 보인 관리의 무례함은 안찰부사의 지시가 아니었으니 자신도 안찰부사도 상관없는 일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양명의 논변 때문에도 흥미로운 대목이지만, 여하간 양명이 받은 모욕을 자신들의 일인 양 대처해준 용장 현지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평소 양명이 그들과 어떻게 어울렸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전습록>에서 제자들과 활기차고 화기애애한 강학 공동체 모습을 떠올려도 될 것입니다). 조금씩 낯이 익고, 함께 하는 일들이 늘어가고, 왕래가 생기면서 아마도 양명과 현지인들의 교유는 생각보다 훨씬 활발발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습록>에서 제자들과 활기차고 화기애애한 강학 공동체 모습을 떠올려도 될 것입니다). 조금씩 낯이 익고, 함께 하는 일들이 늘어가고, 왕래가 생기면서 아마도 양명과 현지인들의 교유는 생각보다 훨씬 활발발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양명은 석서의 요청으로 귀양까지 출장 강학을 나서게 됩니다. 용장에서 귀양까지는 오늘날 자동차를 타고 포장 도로로 이동해도 대략 40-50분 정도가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러니 당시의 양명에게 용장에서 귀양까지의 이동이란 그 자체로도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중장거리인 셈입니다. 


결국 귀양서원으로의 출장강학까지 더해진 양명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하나 하나 그려보노라면, 그 일정은 도회지 관료 생활에 비교해 전혀 부족함(!^^) 없는 아니 오히려 더욱 빡빡하게 짜여진 일상일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유배자는 안 슬픕니다. 아니 바빠서 못 슬픕니다. 슬플 틈이 없습니다. 그저 유배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슬플 뿐!


양명을 찾아온 석서는 주자(주희)와 육상산(육구연)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물었습니다. 하지만 양명은 주자와 육상산의 학문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 대신 그 즈음 자신이 깨달은 지점에 관해 말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지행합일(知行合一)’입니다. 참고로 이 말은 ‘지행일치(知行一致)’라는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행합일(知行合一).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하나라는 이 말은 왕양명식 사유의 출발이자 전제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알면 실천하게 되어있다는 것이고, 실천한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구나 다 ‘지행합일’을 모를 게 없겠다고 고개 끄덕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만약 그렇다면 양명의 이 지행합일은 어떤 점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일까요?


그럼 이렇게 한 번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혹시 ‘아는 것이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은 잘 알지만, 어떤 경우에 알긴 알지만 실천면에서 미처 다하지 못했다고 느낀 경험이 있나요? 지금 이 말에 그런 적이 있다거나 혹은 누군가 이렇게 말할 때 아무 걸리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양명의 ‘지행합일’을 오해하고 있는 것 입니다. 다시 말해 지행합일은 이 두 가지 상황이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좀 헷갈리시나요?^^ 

이제, 좀 헷갈리시나요?^^

좀 더 간단하게 말해보겠습니다. 양명의 지행합일은 너무 당연한 얘기입니다. 누구나 모를 게 없는 간명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편의적으로 이해합니다. 알지만 실천이 잘 안된다, 알아야 실천하지,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한다 등등. 지금도 그렇지만 양명 시대에도 그러했습니다. 양명은 바로 이러한 말(사고)들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행합일이란, 적어도 저렇게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석서도 그랬습니다. 석서는 양명에게 들은 지행합일의 이야기를 듣고 환희에 차서 깨우친 게 아니라, 의심을 가득 품고 돌아갑니다. 하지만 석서는 이튿날 다시 양명을 찾아왔습니다. 저는 옛사람들의 태도랄까요, 여하튼 석서와 같은 이런 면을 보면 곧잘 감동하곤 합니다. 나이도 지위도 높은 석서였지만, 양명의 열정적이고 정성스런 진심에 우정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왕양명 특유의 인간적인 매력이기도 하고, 양명학 특유의 유연하고 활기찬 기운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다음날 다시 찾아온 석서를 맞아, 양명은 이제 오경(五經)의 말들을 근거로 지행합일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석서는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성인의 학설을 오늘 다시 보게되었다.주자와 육상산은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는데 각각 득실이 있다. 그것들에 대해 변론하거나 힐난하지 말고 나의 본성이 본래 자명하다는 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었구나!”(<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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