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라(청년공자 용맹정진밴드)

내 안에 권력있다?

대학생 시절, 방학마다 고르는 재미가 있었다. ‘이번엔 어떤 알바를 해볼까?’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경제적 지원을 중단하겠노라 선언하신 부모님 덕분이었다. 고액 알바에 속하는 과외는 능력이 안 됐고 생동성 시험 알바는 겁났다. 이런 고액 알바를 제외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곳은, 공장이다.

초콜릿이 상자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반장님이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배치 속에서 몰래 초콜릿을 입안에 던져 넣을 때도, ‘인두로 기판을 뎁히고-납을 밀어 넣고-납 떼고-페달 클릭!’을 눈 감고 할 수 있을 만큼 컨베이어 벨트와 일치된 채 납땜을 하면서도, 기계적으로 헬멧 스티로폼에 스펀지를 붙이며 쉬는 시간 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리면서도, 잔업에 자원하고 시급의 1.5배를 셈해보며 히죽거리면서도 권력은 얄미운 반장님과 짠돌이 사장님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권력의 근거가 돈인지, 힘인지, 투표용지에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런데 푸코에 따르면 “권력은 소유되기보다는 오히려 행사되는 것”(58쪽)으로, 권력은 메커니즘 즉, 어떤 특정한 구조 내지는 작동 원리로 존재한다. 심지어 그 권력은 나를 거쳐, 나를 통해 관철된단다. 권력이 메커니즘이라고? 심지어 권력(메커니즘)을 내가 작동시키고 또 가담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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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라는 기생충

생명체가 시대와 조건에 따라 생존 전략을 바꾸듯, 권력 또한 더 효율적이고 유리한 방식으로 전략을 바꾼다. 근대 권력의 주요 전략은 ‘규율’이다. 규율 권력은 학교, 병원 같은 제도와 장치를 통해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규율을 내면화하고, 스스로 내면화된 규율에 따라 움직인다. 권력이 굳이 나서 억압하고 강제할 필요도 없다. 개인의 신체, 몸짓, 시간, 품행이라는 미시적 영역을 훈육하기만 하면 규율 권력이 자동기계 장치처럼 저절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마치 숙주를 조종하는 기생충 같다. 권력(기생충)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전략인가? 그럼 숙주의 입장은 어떨까? 우리는 ‘감히 나를 조종하다니! 당장 기생충 약을 먹겠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다. 규율 권력이라는 기생충은 나를 유용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확실히 앞서 언급한 아르바이트의 경험들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유용했다. 어디를 가든 직장 상사와 동료들은 나를 책임감 있고 성실하고 ‘시키는 일’을 잘 해내는 유능한 인재라고 칭찬했다(갈비뼈에 금이 가도 출근을 하니까). 그때마다 내가 쓸모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나면 더 많은 일이 찾아왔다. 어느새 ‘주어진 일을 열심히 잘하는 애’에서 ‘시키지 않아도 찾아서 일을 열심히 하는 애’로 레벨 업(?)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유능해지는(줄 알았는데 그) 것이 아니라 유용해지고 있었다. “(유용성이라는 경제적 관계에서 보았을 때) 신체의 힘을 증가시키고 (복종이라는 정치적 관계에서 보았을 때는) 동일한 그 힘을 감소시키는” 권력의 규율 전략을 통해 유용해 질 수록 “복종되고 훈련된 신체, 순종하는 신체”(217쪽)로 거듭나고 있었던 거다. 그렇다면 권력타도!를 위해 적극적으로 ‘무용’해져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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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되고 훈련된 신체, 순종하는 신체 "

유용한 숙주의 삶

벤담Jeremy Bentham이 고안한 판옵티콘Panopticon은 규율 권력이 애용해 마지않는 일망감시장치다. 구조는 간단하다. 중심에 높은 탑이 있고 그 주위를 원형건물이 둘러싸고 있다. 원형건물은 독방들로, 탑에 있는 감시자는 원형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만 원형건물에 있는 사람들은 감시자를 볼 수 없다. 그래서 누가 감시를 하는지 심지어 어떤 동기에서 감시하는지 상관없이 감시의 효과가 일어난다. “수감된 자가 스스로 권력의 전달자가 되는 어떤 권력적 상황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312쪽) 구조가 간단한 만큼 감옥만이 아닌 학교, 병원, 회사 등 다양한 곳에서 “하나의 전형 구실”(318쪽) 을 한다.

그렇다면 판옵티콘 체제에서 벗어나면 규율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글쎄, 쉽지 않은 문제다. 판옵티콘을 필요로 하고 작동시키고 있는 건 바로 우리 자신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권력을 계획 정비하고, 그것을 한층 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권력 자체를 위한 것도 아니고, 위기에 처한 사회의 즉각적인 구원을 위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의 여러 역량을 강화시키는 일이다. 생산을 증대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교육의 기회를 넓히고 공중 도덕의 수준을 높이는 등 말하자면 증가와 다양함을 가져오는 일이다.

_미셸 푸코,『감시와 처벌』, 오생근 역, 나남, 2011, 321쪽.

우리가 가치의 기준을 “증가와 다양함”에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판옵티콘이라는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숙주의 삶을 살 게 된 건 권력이 우리를 억압하고 강제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효율성과 경제성을 추구한 대가일지 모른다. 우리가 “증가와 다양함”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이상 판옵티콘은 계속해서 작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증가와 다양함을 추구하게 된 건 우리 또한 판옵티콘이라는 공장을 통해 ‘유능하되 순종하는 신체’를 가진 주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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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숙주의 삶을 살 게 된 건 권력이 우리를 억압하고 강제했 기 때문이라기보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효율성과 경제성을 추구한 대가일지 모른다.

기준을 바꾸는 미세한 저항

물론 효율과 경제성을 추구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삶의 모든 측면에서 효율과 경제성을 우선순위에 둘 때 어떤 걸 놓치게 될까? 우리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보면 된다.

얼마 전, 친구들과 꽤 많은 서랍을 조립할 일이 있었다. 나는 정민이와 짝이 되어 작업했고, 처음엔 조립하는 법을 알려주며 차근차근 같이 만들었다. 그런데 이내 정민이의 속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바쁘게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잡아주는 역할만 하게 된 정민이가 마지막은 자기가 끼워봐도되겠냐고 물어봤다. 그제야 빠르게 많이 작업해야 한다는 생각에 같이하고 있는 친구를 보지 못하고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효율을 추구하는 습관이 친구가 배울 기회를 빼앗고 있었던 거다.

겨우 이런 일에 권력을 운운하다니? 하지만 규율 권력이 미시적 차원에서 우리를 ‘유용하고 순종적인 주체’로 만들었다면, 변화 또한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에서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사소하다고 해서 간과한다면 “사소한 일은 그렇다 하고, 큰일에 부닥칠 경우, 과연 우리들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큰일이 우리의 힘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220쪽, 재인용)

앞서 규율 권력은 우리를 ‘유용하되 순종하는 신체’로 만들어낸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유능함’이 규율 권력이 다루기에 ‘유용’한 것을 뜻하는 건 아닌지 의심해보자. ‘유능’의 기준을 바꾸고, 다른 전략을 세워보자. 이를테면 함께하는 가치를 내면화하는 구조, 만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신체에 새길 수 있는 방식을 고안해보는 거다. 이를 위해선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에서 신체에 내면화된 권력을 포착해야 한다. 바꿀 수 있는 곳은 우리 자신(의 신체)이며, 바꿔야 하는 지점도 나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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