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약자가 살아가는 법 - 2)

근영(남산강학원)

중세 천 년의 비결

0. 중세

중세 가톨릭 시대, 사람들은 모두 신의 부름을 받고 태어났다. 그러니까 그냥 우연히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는 거다.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라고 신에 의해 불려 나왔다. 누군가는 신발을 만드는 일로, 누군가는 농사를 짓는 일로, 또 누군가는 귀족이 되어 통치하는 일로, 그렇게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이 세상 왔다. 신의 부름, 신이 주신 이 임무가 ‘소명’이라는 것이다.

중세 천 년의 시간 동안, 삶은 이 소명을 따라 펼쳐졌다. 다른 선택? 그런 건 없다. 내가 그 일을 좋아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아예 처음부터 고민거리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힘들었겠다고? 어쩌면 그럴지도. 아무런 선택지도 없이 그렇게 숙명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어찌되었든 자유가 없는 삶이니까 말이다.

해서 우리는 그 시대를 보며 섣불리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한다. 어떻게 그렇게 오랜 기간 억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는지 이상하다고, 아마도 가톨릭 권력이 무척이나 야만적이고 폭력적이었나 보라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아직 계몽이 덜 되어서, 그러니까 쉽게 말해 바보 같아서 그걸 그냥 당하고 산 것 같다고.

하지만 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우리 자신에 대한 크나큰 오해다. 생각해 보라. ‘천 일’도 아니고 ‘천 년’이다. 그 기나긴 시간을 어떻게 야만과 폭력만으로 지탱할 수 있었겠는가? 사람들이 하나 같이 바보여서 그런 억압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고? 천 년을? 내겐 이것이야말로 이상한 소리로 들린다.

그러니 좀 다른 방향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이 없는 지금, 우리에게는 소명이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직접! 결정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만약, 그게 잘못된 결정이라면? 그럼 이번 생은 꽝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냥 살다 가게 되는 거다. 허무함…. 게다가 내가 선택한 것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지도 못한 채 더듬더듬 길을 걸어가야 하는 수고로움까지 거기에 얹어진다니…피곤함.

중세는 달랐다. 그런 고민, 그런 허무, 그런 피곤은 없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소명을 받은 의미 있는 존재이니까. 비록 그것을 내가 선택하진 않았지만, 그게 뭔 대수랴. 그 소명대로만 살면 의미 있는 삶이 보장된다. 쓸데없이 이 길, 저 길 기웃거리며 방황할 필요도 없다. 신이 내려준 삶, 그것은 부자유이지만 안전하고 편안하다.

1.예수
신이 내려준 삶, 그것은 부자유이지만 안전하고 편안하다.

신은 결코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모셔야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신에게 예속됨으로써 중세라는 시대는 삶이 주는 크나큰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요컨대, 내 삶의 의미라는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스스로가 삶의 길을 만들어가는 수고로움 또한 덜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움, 자기 존재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예속의 대가로 이런 것들이 주어진다니, 그리 나쁜 거래라고는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신이 보장하는 존재의 이유, 혹은 삶의 의미. 그렇다면 우리는 그냥 아무런 의미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다. 뭔가 특별한 역할이 있고, 해서 우리는 특별한 존재다. 어떤가. 왠지 좀 뿌듯하고, 왠지 좀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되고, 그렇지 않은가. 그거다. 그게 바로 중세가 천 년을 이어온 비결이다.

새로운 우상, 국가

신의 거룩한 부름, 그것은 신의 영광을 실현하는 길이었다. 해서 소명의 실행은 종교적 유토피아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길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의 왕국이 끝나버렸다. 예속 끝, 자유 시작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적 낙원을 꿈꾸지 않았다. 세속적 삶은 그 자체로 긍정되었고, 낙원은 인간 스스로 이 땅에 일으켜 세우면 될 일이었다. 종교적 유토피아를 대신할 이상적 인간 사회에 대한 관심. 바로 여기서 급부상한 것이 ‘국가’였다.

국가는 인간의 자유가 실현되는 이상적 공동체이자, 그 실현을 위한 절대적 조건으로 여겨졌다. 헤겔 같은 철학자의 말마따나, “세계사에서는 국가를 형성한 민족만을 문제로 한다. 왜냐하면 국가야말로 절대 궁극 목적인 자유를 실현한 자주독립의 존재이고, 인간이 지니는 모든 가치와 현실성은 국가를 통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오호라, 인간다운 삶, 자유의 열쇠가 국가에 있었구나. 이제 남은 일은? 국가 건설을 위해 이바지하는 거다.

오호라, 인간다운 삶, 자유의 열쇠가 국가에 있었구나. 이제 남은 일은? 국가 건설을 위해 이바지하는 거다.

그런데, 이거, 이상하다. 가만히 살펴보니 헤겔의 말도 좀 거슬리는 구석이 있다. “자유를 실현한 자주독립의 존재”라는 말의 주어를 한 번 보라. “국가”다. 그러니까 자유나 자립의 주인공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는 거다. 물론 국가라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자립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선차적으로 국가가 있어야 한다는 이 역전된 논리. 국가는 그렇게 은근슬쩍 모든 가치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국가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자립을 보장받겠다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자유와 자립, 그것은 매 순간 스스로가 자기 삶의 길을 열어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무언가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자유롭다고, 자립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국가라는 트릭은 잘 먹혀 들어갔다. 왜? 신이 주었던 그 편안함을 국가가 주었으니까. 자기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대신, 국가의 부름에 응하기만 하면 되었고, 그렇게 되면 국가의 영광이 내 삶의 의미를 담보해 줄 테니까. 심지어 때로는 내가 직접 국가에 헌신하지 않아도 그런 영광을 공짜로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오늘날 식으로 말해서,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국가대표가 우승했을 때 느끼는 뿌듯함 같은 것을.

신이 그랬듯, 국가는 우리가 떠안은 존재적 부담감과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는 그런 존재로 다가왔던 것이다. 요컨대, 국가 그것은 신의 다른 이름이었다. 새로운 우상의 탄생!

 

국가란 온갖 냉혹한 괴물 중에서 가장 냉혹한 것이다. 그것은 차갑게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이 대지 위에 나보다 더 위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질서를 부여하는 신의 손가락이다.” 괴물은 이렇게 울부짖는다. 그런데 무릎을 꿇는 자는 귀가 큰 자나 근시인 자들만이 아니다! 아,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인 그대들에게도 국가는 음산한 거짓말을 속삭인다! 아, 국가는 자신을 흔쾌히 바치는 적절한 마음의 소유자를 알아맞힌다! 그렇다 국가는 낡은 신을 정복한 그대들로 알아맞힌다! 그대들은 싸움에 지쳤고, 이제 지친 나머지 새로운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홍성광 역, 펭귄 클레식, 107~109쪽)

‘좋은’ 주인을 기다리다

예속에서 벗어나면 마냥 좋을 거라는 생각은 우리의 착각이다. 주인을 잃은 노예에게 자유만큼 낯선 것은 없다. 갑자기 의존할 것이 사라졌고,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노예는 부담스럽고, 무섭다. 그러니 돌아가고 싶다. 주인이 있던 그 시절로.

국가는 이 마음 위에 세워졌다. 이로부터 우리가 곧잘 하는 말들이 나온다. 정치가 이 모양 이 꼴이니 내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제도가 잘못되어서 사는 게 험악하고 팍팍하다고. 정치적 혁명이나 제도 개혁은 삶을 바꾸는 마법의 카드인 양 제시되곤 한다. 하지만 제도가 완벽하게 마련되면, 정치가 잘 굴러가면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불안이, 헛헛함이, 무기력이 해결될까? 니체는 단호히 말한다.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정치적 사건으로 현존재의 문제가 움직였거나 심지어 해결되었다고 믿는 철학은 모두 농담 철학이나 사이비 철학이다. 세계가 존재한 이래 자주 국가가 세워졌다는 것은 오래된 이야기다. 그런데 한 번의 정치적 혁신으로 어떻게 인간을 단번에 만족하는 지구 주민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봐라.

(니체,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역, 책세상, 423쪽)

정치와 제도에 기대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약자의 마음이다. 니체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국가가 내 삶을 어찌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은 주인의 명령에 편안함을 느끼는 노예의 마음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그 마음이 있는 한, 중세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중세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우리는 주인을 적극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정도? ‘좋은’ 주인이 되라고 요구할 수 있다는 정도?

정치와 제도에 기대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약자의 마음이다. 니체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국가가 내 삶을 어찌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은 주인의 명령에 편안함을 느끼는 노예의 마음과 다를 바 없다

그렇지만 그 마음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또 다른 질문이 올라온다. 우리는 정말로, 진심으로 정치가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는지, 라는 질문이. 어쩌면 우리 자신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정치와 제도를 끊임없이 들먹이는 건, 그것이 우리 자신의 삶에 면죄부 같은 것을 주기 때문은 아닐지. 제도를 탓하는 동안, 정치인을 욕하는 동안, 우리는 모든 책임을 벗어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니체는 당시에 그런 사람들을 많이도 봤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한다. “그가 정치 정세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역사적 연구들을 신문 읽기 이상으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또 독일 국가의 건설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것을, 매일 맥주 집에 들르는 것 이상으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 자신에게도 물어볼 일이다. 지금 떠드는 정치에 대한 수다가 혹 좋은 주인을 기다리는 노예들의 술자리 안주 정도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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