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현실, 그것은 어떻게 존재하나

얼마 전에 영화 <매트릭스>를 다시 봤다. <매트릭스>는 소재 자체가 쇼킹한 영화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야말로 리얼한 꿈(가상현실)이고, 컴퓨터로 프로그래밍 된 채로 꿈을 꾸고 있는 진짜 몸은 따로 있다는 내용이다. 주인공 레오는 꿈에서 깨어날 것인지, 환영의 삶을 계속 살 것인지 선택을 앞두게 되는데, 주인공답게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 빨간약(이 약은 꿈을 꾸며 잠들어 있는 레오의 본체를 깨우는 역할을 한다)을 먹는다. 빨간약을 먹은 후 레오가 마주하게 되는 진짜 현실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로봇에 의해 인간 의식이 지배되고 있는 세상. 인간은 잠이 든 채 오로지 로봇의 에너지원으로 배양되고 있었다.

영화를 보며 충격적인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우리는 현실과 꿈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꿈은 깨기 전까지는 꿈인 줄 모른다. 왜? 꿈에서도 오감(다섯 감각)과 의식이 작동하고, ‘나’라는 생각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각할 수 있고, 사유할 수 있으며, ‘나’라는 생각이 작동하는 곳은 어디든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지 않은가. 맑은 하늘은 눈앞에 보이고, 시원한 바람은 몸을 스치고, 카페에서 주문한 달달한 조각 케이크의 단 맛은 혀를 자극하고 있으며, 친구의 수다 소리, 커피 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생생히 느끼며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느끼며 생각하는 내가 분명 있으니, 어찌 꿈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영화 속에서 현실이 이렇게 초라한 줄 알았더라면 빨간약을 먹지 않았을 거라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시 컴퓨터가 프로그래밍 한 꿈속으로 들어가 현실 같은 꿈속에서 폼 나게 살려고 동료들을 배신한다. 매트릭스 속 세상이 가짜임을 아는 자신의 기억만 없애면 꿈은 그냥 현실이 되는 것 아닌가. 로봇에 의해 프로그래밍 된 꿈이지만 그 속에서 자신은 그저 현실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뭘까? 꿈이랑 어떻게 다를까? 현실과 똑같이 생생한 꿈을 깨어나기 전에 꿈이라고 알 수 있을까? 장자는 나비 꿈을 꾸고,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 꿈을 꾸는 것인지 의심했다고 한다. 장자의 감각으로 생생하게 느껴지는 세상과 나비의 감각으로 생생하게 느껴지는 세상, 둘 중 어느 것이 꿈일까? 우린 한 번도 이 현실이라는 것을 제대로 의심한 적이 없다. 현실은 나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고, 나는 그저 이 현실 속에서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만 고민했을 뿐. 영화를 보며, 현실이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 감각과 상관없이 따로 존재하는 현실이란 것이 과연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뭘까? 꿈이랑 어떻게 다를까? 현실과 똑같이 생생한 꿈을 깨어나기 전에 꿈이라고 알 수 있을까? 장자는 나비 꿈을 꾸고,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 꿈을 꾸는 것인지 의심했다고 한다. 장자의 감각으로 생생하게 느껴지는 세상과 나비의 감각으로 생생하게 느껴지는 세상, 둘 중 어느 것이 꿈일까?

내가 산출한 것을 다시 내가 인식하는

흔히들 유식은 불교인식론이라고 한다. 맞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자체의 본성을 가지고 따로 존재하는 대상을, 그와 별도로 존재하는 내가, 감각기능을 이용하여, 객관적으로 사물을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빨간 장미가 존재하고 있고, 나는 나의 시각기능을 이용하여, 그것을 인식할 뿐이라는 것. 이때 빨간 장미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 굳이 상관을 찾으면 내가 그것을 어쩌다 보게 되었다는 것 정도? 그러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빨간 장미를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는가이다. 파랗게 인식해도 오류이고, 주황으로 인식해도 오류이며, 장미가 아니라고 인식하면 더 큰일이다. 내 감각기관이 어떻게 감각하더라도 빨간 장미는 여전히 빨간 장미일 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식의 인식론은 이것과 조금 다르다. 유식은 식의 ‘아는’ 기능 자체가 세상을 만들고, 그렇게 만든 세상을 다시 식의 ‘아는’ 기능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즉, 인식하는 주체가 인식 대상을 수동적으로 인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식 자체’가 인식하는 주체(見分)와 인식대상(相分)을 산출해내고 그 산출해낸 것을 식이 다시 인식한다는 것. 참 어려운 개념이다. 어쨌든 이런 인식론에 의하면 내가 산출한 세상을 내가 다시 인식하는 것이 된다. 빨간 장미는 나에 의해 비로소 빨간 장미가 되고, 이 빨간 장미를 다시 내가 인식하여 빨간 장미라고 안다는 것. 유식의 인식론에 의하면, 나와 상관없이 객관적 법칙들 또는 객관적 사실에 의해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갑자기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아니 세상은 나로부터 나온 것이 된다.

빨간 장미는 나에 의해 비로소 빨간 장미가 되고, 이 빨간 장미를 다시 내가 인식하여 빨간 장미라고 안다는 것. 유식의 인식론에 의하면, 나와 상관없이 객관적 법칙들 또는 객관적 사실에 의해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갑자기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아니 세상은 나로부터 나온 것이 된다.

심층의식에서 나타난(現) 현실

그럼 유식은 구체적으로 식이 어떻게 세상을 만들고, 또 어떻게 세상을 인식한다고 할까? 그걸 알려면 유식에서 말하는 식에 대해서 좀 알아야 한다. 유식은 총 여덟 개의 식을 얘기하는데,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나식(末那識) 그리고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간단히 1식, 2식, 3식, 4식, 5식, 6식, 7식, 8식이라고도 한다. 안식에서 의식까지는 많이 들어봤지만, 말나식과 아뢰야식은 명칭부터가 생소하다. 산스크리트어를 중국인들이 발음 나는 대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이들 중 안식에서 말나식까지(1식에서 7식까지)는 현실의 표층에서 작용하는 식이고, 아뢰야식은 표층 뒤에서 작용하는 심층의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식이란 ‘알다’, ‘분별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안식(眼識)은 ‘보는 것을 통해 앎이 일어나는 식’이란 뜻이다. 그런데 식의 뜻이 참 놀랍다. 대상을 보고 인식하는 수동적인 것으로만 식을 생각했는데, ‘앎이 일어나는’ 것이 식이라니. 그렇게 보면 우리가 자각을 하던 하지 않던, 보는 데서도, 듣는 데서도, 냄새 맡는 데서도, 맛보는 데서도, 감촉하는 데서도, 생각하는 데서도 끊임없이 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나의 식들은 수많은 앎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이식(耳識)은 듣는 것을 통해 아는 작용, 비식(鼻識)은 냄새 맡는 것을 통해 아는 작용, 설식(舌識)은 맛보는 것을 통해 아는 작용, 신식(身識)은 감촉하는 것을 통해 아는 작용, 의식(意識)은 생각하고 사유하는 것을 통해 아는 작용, 말나식은 ‘나’라고 아는 작용, 마지막으로 아뢰야식은 이 모든 식들(안식에서 말나식까지)을 생겨나게 하는 근본(根本) 식이자 이 식들이 안 것을 저장하는 저장식이다.(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다음 연재 글에서 계속된다.)

유식의 여덟 개 식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이 되는 것은 아뢰야식이다. 근본인 이유는 다른 모든 식들이 아뢰야식에서 변하여 나오기(이를 ‘전변(轉變)’이라고 한다) 때문이다. ‘아뢰야’는 ‘저장하다’, ‘보존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아뢰야식엔 무언가를 저장하는 기능이 있음을 의미한다. 무엇을 저장하는가? 안식에서 말나식까지의 아는 작용을 통해 안 모든 것을 저장한다. 한마디로, 식이 ‘경험하여 안 모든 것’을 저장한다는 것이다. 종자(種子) 형식으로 저장하는데, 종자는 씨앗이라는 뜻이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나는 바로 그 씨앗이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조그마한 것(因)을 땅에 심어 물과 햇빛(緣)을 주면 어느새 콩이 되고 팥이 된다(물론 유식에서는 콩 심었다고 콩 그대로 팥 심었다고 팥 그대로 나오진 않는다.^^). 그러니 종자를 잠재에너지라고도 할 수 있다. 아뢰야식에는 이와 같은 잠재에너지 형태의 종자들이 저장되어 있다. 아뢰야식의 종자를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매트릭스를 운영하는 프로그램들로 비유할 수 있을까. 가상현실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그 뒤편에 존재하면서 언제든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힘. 뭐… 똑같진 않지만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종자를 잠재에너지라고도 할 수 있다. 아뢰야식에는 이와 같은 잠재에너지 형태의 종자들이 저장되어 있다. 아뢰야식의 종자를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매트릭스를 운영하는 프로그램들로 비유할 수 있을까. 가상현실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그 뒤편에 존재하면서 언제든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힘.

아뢰야식의 종자는 인연의 작용(종자들끼리의 힘의 작용 또는 외부 힘의 작용)에 의해 말나식과 의식 그리고 전오식(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으로 변하여 나온다(轉變). 이를 유식에서는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의 종자가 현행한다는 것은 잠재에너지로 있던 종자가 드디어 현실화된다는 의미다. <매트릭스>로 보면 컴퓨터의 프로그램이 각자의 가상현실을 현현해내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아뢰야식에 저장된 안식의 종자에 연(緣)하여 그에 맞게 보고, 이식의 종자에 연하여 그에 맞게 듣고, 비식의 종자에 연하여 그에 맞게 냄새 맡고, 설식의 종자에 연하여 그에 맞게 맛보고, 신식의 종자에 연하여 그에 맞게 감촉하고, 의식의 종자에 연하여 그에 맞게 생각과 사유하고, 말나식의 종자에 연하여 ‘나’라고 집착하는 현실을 현현해낸다. 심층의식에 저장된 종자가 그에 맞는 세상을 현실로 나타나게(現) 한 것이다.

(계속)

 

2
댓글

avatar
최근 항목 오래된 항목 인기 항목
EmptyMoon彬
Guest
EmptyMoon彬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앎이 일어난다’는 부분이 인상적이네요!
우리 바깥에 객관적인 사물이 있고, 그것을 단순하게 인식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인식한다는 것이 사실은 내 안에 있는 앎이 작동하는 것이라니…!
내가 무언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