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형(청년공자 용맹정진밴드)

키 172cm에 55kg, 한때 몸(정확히는 몸매)에 지나치게 신경을 썼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이어트라는 걸 했다. 평소 좋아했던 디저트는 일주일에 한 번, 튀긴 음식이나 (우리가 흔히 살찌는 음식이라 하는) 고열량의 음식을 먹으면 죄책감을 느꼈다. 구황작물(주로 고구마나 단호박 등)과 과일, 삶은 달걀 등을 주식으로 먹었고, 약 2년 동안 키 172cm에 52-55kg을 오갔다. 아침은 사과 한 개와 고구마 한 개, 점심도 군고구마 한 개와 무첨가 두유, 삶은 달걀 두 개, 저녁은 군고구마와 삶은 달걀 두 개. 3-4일에 한 번은 한식으로 아침이나 점심을 먹어준다. 외식 시에 식사량은 70-80퍼센트, 음식을 남기면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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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를 통제하면서 느끼는 자기 효능감

이런 식의 자기관리 및 자기통제는 엄청난 만족감을 주었다. 하루 중 많은 시간 배가 고프고 많은 시간 음식 생각을 하며 유튜브로 먹방을 시청하는, 이런 내가 이상하게 느껴지면서도 빠지는 몸무게 그리고 그 통제감(내 생각대로 나를 바꿔 가는 느낌)에 만족감을 느꼈다. 이미 꽤 오래전이어서 그 기분과 행동들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 이런 행동들에 따른 자기 효능감(과제를 끝마치고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출처: 네이버 지식백과)과 그에 따른 만족감은 충분히 기억이 난다.

현대 사회는 스펙터클의 사회가 아니라 감시의 사회이다. 여러 가지 이미지의 허울 속에서 우리들의 신체는 심층적인 공격대상이 된다. (…)우리는 하나의 톱니바퀴와 같은 존재로서, 우리들 스스로 이끌어 가는 권력의 효과들에 의해 포위된 채 판옵티콘 감시장치 속에 있다.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규율, ‘판옵티콘 권력’, 333)

나를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 내 몸을 마음에 들게(사회적 미에 맞춰) 바꿔 가는 느낌, 매일 체중이 줄어들 때의 쾌감……. 나는 나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기록하고 통제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들을 성공적으로 해나갔을 때, 만족감을 느꼈다. 점점 이런 행위들에서 의미를 잃고 다이어트를 그만두었지만, 그 이후에도 내 몸을 통제하고 싶은 욕망은 종종 올라왔다. 이러한 통제 욕망은 주로 타인들과의 비교를 통해 내 몸에 대한 결핍을 느낄 때 올라온다. 그리고 결핍은 “정상(normal)”에서 벗어난 것을 부족하다고 느끼는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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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기록하고 통제했다.

내 몸을 분해하여 통제하고 관리하고 사회의 기준에 맞게 유능해지는 것은 결국 예속의 길이다. 사회적 미의 기준에 예속되어 자본주의의 부속품이 되는 방식이 아닌, 진정 나를 위한 절제와 자기 효능감을 키우는 건 어떤 것일까?

2. 규범화에서 정상이라는 기준과 서열이 생긴다.

규율기관의 모든 지점을 통과하고, 매 순간을 통제하는 상설적인 처벌제도는 결국 비교하고, 구분하고 서열화하고, 동질화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규범화이다.

(위와 같은 책, 규율, ‘효과적인 훈육방법’, 287)

우리가 하는 몸매 관리는 대부분 남과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진다. 키에 따른 정해진 체중이 있는 것만 보아도 “정상”이라는 기준점이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의 뼈와 근육, 살 그리고 체질 등 어느 것 하나, 같은 게 없음에도 그 기준은 ‘체중’이라는 심플한 기준점을 갖는다. 사실 ‘몸매’를 관리하는 것 자체가 비교와 구분, 서열화와 동질화 그리고 배제를 모두 포함하는 행위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렇게 관리된 몸은 (남들에게든 스스로에게든) ‘보여지는 것’ 이상의 어떠한 의미도, 충만함도 없다. 헬스로 다져진 근육, 절식과 폭식을 오가는 식단관리를 통한 마른 몸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 노력을 쏟고 있는가. 실상은 타인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 정도가 전부인데도 말이다. 여기에는 주위 사람들과의 소통이나 연결이 생겨나기 힘들다. (같은 목적(몸매 관리 및 자랑)을 갖고 그것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을 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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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주위 사람들과의 소통이나 연결이 생겨나기 힘들다.

3. 규범화에서 벗어나 교감하는 충만함을 느끼기

평소 지나치게 마른 몸을 지향하는 걸 좋지 않게 생각했음에도 어느샌가 내 안에 그런 몸이 되고 싶어 하는 ‘나’가 있었다. 원했던 모습이 되어 그런 모습을 sns에 올리고 칭찬을 받아도 이전에 막연히 상상했던 것만큼 좋지는 않았다. ‘보여지는 몸’에 온 관심을 쏟는 일은 그것 말고는 다른 것들에 관심을 줄 수 없기에, 겉으로는 점점 내가 원했던 모습이 되어가는데도 무언가 이상하게 느꼈던 것이다. 또 그 이면에는 절식과 폭식을 오가며 ‘보이는 모습’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내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서로 비교하면서 위계질서화하(같은 책, 285)는 중에는 충만함이 있을 수 없음을, 헛헛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해준다.

판옵티콘이라는 자동기계장치 속에서는 내 옆방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나’라는 독방에 갇혀 스스로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결국 ‘나’라는 자의식을 키워갈 뿐이다.

그것은 바로 완전히 개체화되고, 항상 밖의 시선에 노출된 한 사람의 배우가 연기하고 있는 수많은 작은 무대들이자 수많은 감방이다.

(위와 같은 책, 규율, ‘판옵티콘 권력’, 310)

푸코는 우리가 마치 무대 위에 올라간 듯 관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것이 감옥이라는 것을, 무대와 감방은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보여지는 몸’을 벗어나면 몸을 쓰는 얼마나 다양한 활동들이 있는지, 얼마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지, 우리는 사실 경험으로 알고 있다. 요가를 하면서 느껴지는 충만함,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장난치면서 깔깔거리는 유쾌함, 글을 쓰며 마주하는 고통스러움(과 아주 조금의 상쾌함), 산책을 하면서 채워지는 세로토닌을 통한 행복감, 그리고 그 충만하고 유쾌하고 고통스럽고도 상쾌하고 또 행복함을 친구들과 나누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우리의 몸은 느끼고 있다. ‘보여지는 몸’이 줄 수 없던 그 충만함 속에서 우리는 자기 배려로서의 자기 효능감을 키워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빛나는 게 전부였던 ‘자기 효능감’이 아닌 타인에게도 이로울 수 있는 그런 ‘자기 효능감’을 말이다.

‘나’라는 독방에 갇혀 스스로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촘촘한 예속의 그물망에 포획돼 자본주의의 톱니바퀴 중 하나가 되어 돌아가고 있는 나를 멈추고, 교감에서 오는 충만함과 온전함을 비로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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