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2부. 슬기로운 유배생활(1) - 군자는 어떻게 유배지와 만나는가

문리스(남산강학원)

군자의 군자 되기 - 지행합일 vs 지행일치(2)

양명을 만나 석서가 깨달았다는 성인의 학설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양명의 그 깨달음은 용장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거칠게 말해보자면, 양명의 삶은 용장 생활 이전과 이후로 나뉩니다. 그것은 승승장구하는 사대부 관료의 삶에서 멀고 낯선 야만의 땅으로 추방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깨달음의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양명학의 역사에서 ‘용장’은 현장이고,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용장 생활의 깨달음을 중앙 관료로서의 격무와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한가하고 전원적인 변방 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연구에 매진할 시간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 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씀드렸죠. 진부한 표현이지만 일상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시골이 더 바쁩니다. 크고 작은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고 일어납니다, 거기엔 원초적인 생과 사의 문제가 놓여있습니다(먹고 사는 문제 너머 죽고 사는 문제까지 걸려 있는 겁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책을 보는 것이 (생각보다 영) 불가능합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 ‘오랑캐 야만인’들의 땅엔 책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1.바쁨
일상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시골이 더 바쁩니다.

용장은 남쪽 오랑캐땅의 만산(萬山) 속에 있어서 서적을 휴대할 수가 없었다. 매일 석굴에 앉아 전에 읽었던 책을 조용히 기억해내어서 그것을 기록하였다. 마음에 얻은 바가 있으면 이것이 바로 해석되었다. 1년 7개월이 되어 <오경>의 요지는 거의 정리되었다.(<오경억설서>)

해가 있는 동안엔 먹고 살 일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고, 해가 지면 토굴에 들어가 명상을 하거나, 이전에 읽었던 책을 조용히 기억해 냅니다. 기록에 따르면 양명은 토굴에 석관을 만들어 놓고 생활했다고 합니다. 어느 순간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을까요. 여하간 죽음의 잠자리에서 사는 길을 찾아 나서는 모양새였던 셈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양명이 깨달은 것은 심즉리(心卽理), 요컨대 ‘마음이 이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농담삼아 말해보자면, 사실 뭐 깨달을 수 있는 게 마음 뿐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이치(심즉리)라는 이 깨달음은, 양명이 <대학>의 ‘격물(格物)’에 관해 주희와 해석이 갈라지게 되고, 나아가 지행일치가 아닌 지행합일을 주장할 수 있는 양명학적 사유의 바탕이고 근본입니다. 석서와 만나 나누었던 성인의 학설이란 것도 결국 이 부분에 관한 설명일 것입니다. 석서는 양명의 지행합일에 관한 강의를 몰래 들었지만 잘 이해할 수가 없어, 결국 양명을 찾아와 그 내용을 질문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별 차이 없는 것 같지만, 지행합일은 그만큼 ‘독특한’ 양명학의 프랜차이즈 개념이라 할 만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행일치(주자)와 지행합일(양명)의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행일치는 지와 행을 일치되어야 할 두 가지(지와 행)로 봅니다. 반면 지행합일은 지와 행은 오직 ‘지=행’이 있을 뿐이며 이것은 분리 불가능한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더 간단히 말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行; 실천)은 곧바로 우리가 어떤 인식(知; 앎)을 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반드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지행합일을 얘기할 때면 제가 늘 예로 드는 게 담배를 끊지 못하는 말기 폐암 환자인데요. 양명학에서 보면, 그는 담배를 끊어야 하는 걸 알지만 아직 그 실천(행)이 앎과 일치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앎과 행은 분리 불가능한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끊어야 하는 걸 안다는 건 담배를 피지 않는다는 행위와 동전의 앞뒤처럼 분리 불가한 것입니다. 그럼 담배를 피고 있는 폐암환자는?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지행합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 그가 피우는 그 담배가 피는 즉시 자신에게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 앎에 일치하는 흡연을 계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흡연
그는 지금 그가 피우는 그 담배가 피는 즉시 자신에게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 앎에 일치하는 흡연을 계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석서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앎과 삶이 사실 하나라는 양명 주장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지 못합니다. 더구나 주자학의 시대에 더더구나 교육에 관한 책임자였던 석서로서는 당연히 당대의 통설이자 진리였던 주자학적 인식 안에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쩌면 지행합일은 양명조차도 용장이 아니었다면 얻지 못했을 깨달음이었을지 모릅니다. 


큰 깨달음을 얻게 된 귀주성 제학부사 석서는 양명을 만나고 난 뒤 다시 귀양으로 돌아가 이내 성내의 서원(문명서원)을 수리합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예를 갖춰 양명을 초빙합니다. 마침내 양명이 도착했을 때, 석서는 직접 귀양의 학생무리를 이끌고 양명을 찾아와 절을 올리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전환합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된다는 것. 이런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평생의 스승을 만난다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배움을 구하려 찾아온 제자(친구)들을 얻는다는 것. 


이 뿐만이 아닙니다. 석서는 또 귀주 소속 각 현에 있는 공부하는 자제들을 독려해 문명서원으로 모읍니다. 그렇게 일순간에 귀양의 문풍(文風)이 살아납니다. 이제 귀양은 소문을 들은 외지의 학자들까지 짐을 싸서 일부러 방문하는 곳이 됩니다. 군자가 사는 곳이 어찌 누추함이 있겠느냐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잘 읽어야 합니다. 이 모든 장면들은, 양명 역시 용장을 만나 스스로 일신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군자가 있는 곳은 그곳이 어디라도 누추해지지 않는 법이라는 건, 그 군자가 어떤 곳에서도 스스로 군자 되기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군자도 군자 되기를 해야한다는 뜻입니다. 아니 군자 되기를 할 수 있어야 군자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뜻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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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양명이 도착했을 때, 석서는 직접 귀양의 학생무리를 이끌고 양명을 찾아와 절을 올리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전환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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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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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st
EmptyMoon彬

군자가 있는 곳은 어디라도 누추해지지 않는다는 말이 감동적이네요!
귀주라는 낯선 공간에서도 군자 되기를 멈추지 않으려 한 양명의 모습이 조금이나마 상상되고 멋지게 느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