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해 완

멕시코에 도착한 지 이주가 좀 넘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쿠바로 떠나야했겠지만, 8월 초에 쿠바에서 이차감염이 시작된 데다가 지금 카리브해에 태풍까지 몰아치고 있어서 입국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10월에나 건너갈 수 있겠다는 게 쿠바 지인들과 나의 공통의견이다. 덕분에 제프리와 나는 애타는(?) 시간을 보내기는커녕, 각자 할 일 하면서 심심하게 지낸다.

멕시코 집 내부 정원에서 선인장과 함께

사실 좋다. 이 평범한 일상을 둘 다 제일 바라고 있었다. 계획한 적 없는 시간이지만, 계획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올해만큼 뼈를 깎으며 이해한 적도 없다. 올해 초 제프리는 원래 중동에서 일할 계획이었는데 우연히 쿠바 옆 멕시코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나를 자주 볼 수 있겠다고 좋아했지만, 그 후에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유행과 함께 생면부지의 타국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나 같은 경우는 간신히 돌아간 한국에서 주역 점을 쳤는데, 쿠바에서 공부를 계속하면 오른팔이 부러진다는 효사가 나왔다. 그 후로 내 가슴은 심숭생숭 난리가 났지만 (쿠바가 아니면 또 어디를 가나 오 쉣) 멕시코에 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쿠바로 갈 길이 막혔다. 주역 점을 미리 곱씹으면서 오지 않았더라면 멕시코에서 멘붕을 겪을 뻔했다. 어렵게 만난 제프리와의 시간도 차분히 만끽하지 못할 뻔했다.

이 번잡한 상황에서 어디까지가 우연이고 또 필연일까. 알 수 없다. 몇 년 뒤에 누군가에게 이 시기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나는 자연스럽게 ‘우연’과 ‘필연’의 구역정리를 할 것이다. 소소하게 극적 장치를 끼워 넣으며 그럴듯한 서사를 뽑아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통과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두 가지 실가닥이 풀 수 없게 서로 꼬여 있음을 알겠다. 갑작스러운 우연이 인생의 방향을 틀면서 필연에 편승하고, 내 인생의 필연이라며 굳게 붙든 믿음이 우연한 계기로 허무하게 끊어진다. 계획 따위를 세울 자리는 없다. 한손에 우연의 씨실을 다른 손에 필연의 날실을 쥐고 따라가는 시간은 온 지구를 향해, 온 개체 속으로 뻗어있는 것 같아 현기증이 난다.

멕시코로 가는 길 위의 해완.(엄청난 마스크)

우연과 필연, 단백질을 만들다

우연과 필연은 대응하지만 대립하지는 않는 시간의 광대한 속성이다. 두 단어의 아득한 깊이를 처음 느꼈던 것은 십대 때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을 읽으면서였다. 채운쌤이 건네주신 책이었다. 그때는 과학 앞에서 눈 뜬 장님과 다를 바 없어서, 맥락 파악도 못하고 책을 거의 통째로 베껴 쓰다시피 하며 읽었다. 그렇지만 빽빽한 문장 사이로 언뜻 보이는 통찰 때문에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긴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자연의 폭발적인 우연, 역시 상상할 수 없는 집요함으로 오랫동안 세대를 거치며 자기 속성을 지켜온 생명체의 필연.

그리고 이 두 현상이 모순 없이 공존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상한 생명체, ‘호모 사피엔스’가 있다. 자크 모노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몸을 구성하는 단백질 조각에도 새겨져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다.

어떤 기능을 가진 단백질 하나의 개체발생 속에는 모든 생명체 전체의 기원과 혈통이 다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생명체가 나타내고 추구하고 실현시키는 의도의 궁극적인 원천은 단백질의 1차 구조가 전하는 이 메시지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자크 모노, 조현수 역, <우연과 필연>, 114쪽, 궁리, 2010

그때는 짐작을 못했다. 진실의 눈을 가리는 것은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인식의 좁은 폭이라는 것을. 잊고 살았던 단백질이 다시 생각난 것은 의대 1학년 1학기 생화학 시간 때였다. 자크 모노는 <우연과 필연>의 앞부분에 ‘과학도들에게는 너무 기본적인 내용이라 지루할 수도 있다’고 양해를 구했었는데, 정말이었다. 단백질은 이과 공부의 기초 중의 기초였다. 그러나 기초는 중요하다는 뜻이지, 쉽다는 뜻이 아니었다. 단백질의 구조는 여느 고분자들과 비교할 수 없게 복잡했고 다양했다. 게다가 까탈스러운 구조가 기능으로 전환되는 부분, 그것도 생명에 필수적인 기능을 (효소, 호르몬, 항체, 항원, 전달자, 구조물…) 수행하면서 신체를 휘젓고 다니는 부분은 몇 번을 읽어도 그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내용이 이해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모든 내용은 “단백질의 기능은 구조에 의거한다”¹⁾ 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문장을 곱씹을수록 소름이 돋았다. 우리 신체에는 이만 종류의 단백질이 있고, 각자가 정치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 중 한 종류만 사라져도 우리 목숨이 위태로워질 정도다. 그런데 저 문장에 따르면, 어떤 단백질에 이토록 중요한 기능을 부여하는 필연적 인과 관계가 단백질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단백질이 ‘어떻게 기능하는가’는 단백질 내부에, 즉 단백질 자신이 ‘어떤 구조로 접히는가’에 오롯이 달려 있다. 문제는 이 구조를 결정하는 인과 관계마저도 단백질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백질의 구조는 스무 종류의 아미노산이 ‘어떻게 배열되느냐’에 달려 있는데, 이 배열의 결정권은 누구도 쥐고 있지 않다. 여기에도 선험적인 법칙이 없다. 물론 인체 속 단백질의 아미노산 배열은 DNA에 새겨져 대대로 내려온다. 그렇지만 이 강제성은 DNA 외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단백질들이 최초로 탄생했던 기원의 시간에는, 혹은 이것들이 생명의 정보에 끼어들기 전에는 수많은 아미노산 배열들이 무작위로 발생했을 것이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원자들이 헤쳐모여 우연히 형성한 공간적 배치가, 24시간 쉬지 않고 정교하게 움직이는 신체 신진대사의 필연적인 근원이 된다는 것이? 왠지 불가능하다는 말부터 떠오르는 것은 내 인식의 습관 때문이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건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그 명분이 인간의 합리성이든 신적 초월성이든) 필연의 맥락으로, 나머지는 스쳐지나가는 우연의 티끌로 양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인식이 어떻게 꼬여있든 간에, 신체는 양극을 모두 끌어안은 채 살아있다. 호르몬이, 항체가, 헤모글로빈이, 근육섬유가, DNA 합성에 관여하는 모든 효소가 이건 가능한 일이라고 답한다. 단백질은 우연과 필연이 함께 제작한 작품이다. 아찔하다. 이 즈음되면 ‘단백질’ 앞에서 두부와 헬스클럽 음료수밖에 연상하지 못했던 과거의 나에게 명예훼손죄를 청구해야 한다.

99%가 비어있는 공간에서

단백질을 깊게 살펴보려면 원자의 세계를 경유하는 게 좋다. 단백질을 ‘영양소 덩어리’로 보게 만드는 좁은 상상력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단백질은 원자들끼리 결합해서 만들어진 분자, 그리고 그 분자들이 또 겹겹이 쌓여서 완성된 고분자다. 덩치가 아주 큰 편이다. 그러나 속은 텅 비어 있다. 99.99%가 비어있다. 이 법칙은 원자의 세계에서 모든 물질에 똑같이 적용된다.

원자는 온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 물질이다. 원자를 보고 있으면 우리는 모두 자연으로부터 왔으며,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란 하나의 문턱일 뿐, 끊어진 다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탄소가 석탄도 되고 심장도 되는 게 원자의 세계다. 물론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 구성 차이는 존재한다. 생명체의 99%는 탄소, 산소, 질소, 수소로 이루어져있다. 이 원소들은 부피가 가벼운 대신 결합력이 아주 강하며, 타 원소와 결합을 네 개까지 이룰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같은 책,  12쪽)     

원소의 구조물은 튼튼하지만 속이 비어있다. 화학 교과서를 보면 원자는 동그라미로 표시되는데, 이 원의 테두리는 정적인 선분이 아니다. 이것은 전자가 쉼 없이 회전하면서 유지하고 있는 경계다. 원의 중앙에는 전자가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게 잡아주는 중성자와 양성자가 있다. 그렇다면 전자와 중심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그림은 실제 거리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전자의 안쪽 궤도가 지구의 사이즈라면, 양성자와 전자는 지구의 정중앙에 놓인 200미터짜리 축구공이다.² 그 사이의 거리는? 비어있다. 모든 원자의 99.99%가 빈 공간이다. 원자로 만들어진 단백질은 물론이요, 인간, 코끼리, 우주 모두 비어있다는 소리다.

‘비었다’는 말의 의미를 곰곰 생각해본다. 비었다고 해서 그 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 역시 아니다. 눈앞의 컵을 보라. 99.99% 비어있을 게 틀림없지만, 햇살이나 내 손이 컵을 통과할 수는 없다. 빛의 경우에는 열심히 외곽을 돌고 있는 전자가 에너지를 흡수해버리기 때문이고(일시적으로 움직임이 더 빨라진다), 내 손의 경우에는 손의 전자와 컵의 전자가 동시에 빈자리를 차지하면서 회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³ 따라서 빈 공간은 무(無)가 아니다. 전자가 내부(중성자+양성자)와 외부 사이에서 규칙적으로 벌이고 있는 운동, 그 힘의 표현이다. 동시에 물질의 단위인 원자가 불변체가 아님을, 운동이 멈추는 즉시 사라질 ‘일시적 공간’임을 상기시키는 표시다. 이처럼 드넓고도 역동적인 빈 공간에는 잠재성이라는 이름이 가장 어울릴 것 같다.

따라서 빈 공간은 무(無)가 아니다.

원자가 모여서 분자가 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공간의 운동이 더 복잡해진다. 단백질은 탄소, 산소, 질소, 수소를 모두 보유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 4대 원소들은 아미노산이라는 분자를 구성하고, 아미노산들이 일직선으로 연결되다가 그 수가 50개가 넘으면 비로소 단백질이라고 불린다. 아미노산은 예민하다. 자기보다 pH 농도가 높은 환경에서 수소 이온을 토해내는 것을 산성이라고 하고, 반대로 pH 농도가 낮은 환경에서 수소 이온을 받아들이는 것을 염기성이라고 하는데, 아미노산은 보기 드물게 이 양극의 성질을 모두 갖췄다. 또, 아미노산은 다양하다. 인체 내부의 아미노산 종류는 스무 가지여서 물을 싫어하는 그룹, 물을 좋아하는 그룹, 덩치가 커서 유동성 없는 그룹 등등으로 갈린다. 이처럼 개성 강한 힘들이 구성해내는 단백질이라는 ‘텅 빈 공간’이 얼마나 복잡하고 역동적일지 상상해보라.

접어라, 인식의 새로운 차원을

복잡성은 눈으로 확인된다. 단백질의 구조는 접힌다. ‘접힌다’는 표현은 화학에서 거의 단백질 전용으로 쓰인다. DNA는 나선모양으로 예쁘게 꼬여있고, 글리코겐은 그물모양으로 퍼져나간다. 그러나 단백질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모양도 닮지 않았다. 누군가 성의 없이 구겨놓은 실뭉치처럼 생긴 게, 못생겼다. 그런데 실제로 성의 없이 끈을 접어보면 도저히 따라할 수가 없다. 마성의 형태다!

이 형언할 수 없는 모습은 다양한 아미노산들의 에너지 때문에 생겨난다. 일자로 연결된 아미노산들은 얌전히 있지 않는다. 스무 종류의 아미노산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원소들끼리 약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일직선이었던 구조가 규칙적으로 뒤틀리기 시작한다. 나선형의 알파 헬릭스(alfa-helix)나 지그재그인 베타 시트(beta-conformation)가 그렇게 나타난다. 1차 구조가 2차 구조로 접힌 셈이다. 이제 아미노산들이 공통적으로 가지지 않은(‘잔여기’라고 부르는) 상이한 부분들끼리 상호작용을 시작하는데, 성질이 불균질하므로 접히는 모습도 불규칙하다. 이것은 각각의 단백질이 모두 다른 모습을 갖추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그렇게 나오는 기괴한 공모양, 혹은 길쭉한 실모양이 3차 구조다.

 

그런데 말이다. 단백질이 이렇게 한 번씩 접힐 때마다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무작위한 배열에 불과했던 아미노산들이 한 번 접히면 ‘규칙’이 생겨난다. 그 다음 접힐 때는 아예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3차 구조의 표면은 매끄럽지 않아서 홈(결합부위)이 군데군데 파여 있다. 이 홈의 안쪽 표면에는 아미노산들이 분포되어 있는데, 홈 내부의 공간적 배치가 다른 단백질들끼리 중복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각 홈마다 특이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단백질 바깥 세계에는 이 홈들 중 하나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달라붙는 소물질(리간드)이 있을 수 있다. 모양, 크기, 극성 등등의 성질이 맞아떨어지는 까닭이다. 다른 홈은 안 되고 딱 ‘그 홈’에만, 혹은 그와 비슷한 극소수의 홈에만 부착가능하다. 이로써 특정 단백질에 패여 있는 특정 홈이, 특정 물질과 항상 짝을 이루게 된다.(같은 책, 157쪽) 달리 말하면, 단백질은 인식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3차 구조까지 접힌 단백질이 세상을 식별하는 분자로 재탄생한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단백질처럼 종류별로, 그리고 결합부위별로 모두 다른 물질을 인식할 수 있는 광대한 식별력을 갖춘 분자는 없다. 이 식별력은 전적으로 단백질 고유의 구조에서 튀어나왔다. 1차 구조와 3차 구조는 물질적으로 동일하다. 그 사이에 새로운 요소를 더하지도 빼지도 않았다. 그러나 1차가 3차로 접히는 과정에서, 아미노산 사이의 빈 공간 속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채널’이 느닷없이 출현한다. 이게 마법처럼 느끼지 않는 사람은 다음 문장을 소리 내서 반복해보길 바란다. “인식이란 정보를 새로 추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몸에 새겨진 정보를 재배치하여 새로운 차원을 열어젖히는 활동이다.” 어느 철학자의 아포리즘이 아니다. 단백질이 하는 일을 있는 그대로 읊었을 뿐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재배치다. 단순한 자리 바꾸기가 아니다. 정보들의 긴장관계를 통해서 1차원에는 넓이를, 2차원에는 높이를, 3차원에는 소통을 여는 작업이다.

인식의 힘, 이것이 “구조는 곧 기능”이라는 문장 속에 숨은 진짜 의미다. 아미노산의 무작위적 배열, 그리고 그 배열이 몇 차례 접히면서 생기는 구조물은 우연이 던진 주사위놀이와 같다. 그러나 단백질은 그렇게 ‘우연히 접힌’ 자신의 ‘몸’을 통해서 세상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구조적 코드가 맞는 짝을 찾아서 돌아다니고, 그 짝지와 화학적인 쌍방통행을 한다. 같은 배열의 아미노산들이 늘 같은 식으로, 즉 동일한 단백질로 접힌다면, 이는 단백질이 늘 같은 물질을 만나서 같은 상호작용을 한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부터 단백질 패밀리의 필연적인 활동이 개시된다. 리간드를 옮기거나, 리간드를 해체하거나, 리간드로 신호를 보내거나, 리간드의 성질을 바꿔버리거나. 이것들은 전부 다 생명 활동이라고 불린다.

효소, 시간을 ‘살아있게’ 만들다

인식의 힘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자. 단백질은 생명 활동을 유지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애초에 ‘생명’이라는 시간을 출현시킨 게 단백질이다. 이 특별한 단백질의 이름은 효소다. 생명체에서 효소의 위상은 유전자에 맞먹을 만큼 드높다. 사실 이 둘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유전자가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효소는 애초에 합성될 수 없겠지만, 효소가 없으면 유전자는 현실에서 아무것도 못하는 죽은 정보에 불과하다.

효소란 촉매작용을 일으키는 생체단백질이다. 촉매는 화학작용이 더 쉽게 일어나도록 촉진시키는 물질을 칭하는 용어다. 촉매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인다. 식혜를 만들 때 왜 엿기름을 넣을까? 엿기름에 들어있는 효소 아밀레이스가 밥 속의 녹말의 분해속도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촉매는 절대 화학작용에 끼어들지 않는다. 화학작용의 평형관계가 변하는 것도 아니다. 촉매가 변화시키는 것은 단 하나다. 속도다. 화학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활성화 에너지의 수준을 확 낮춰줌으로써,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작용이 일어나도록 돕는다. 비유하자면 썸 타는 남녀의 마음에 불을 질러 슬쩍 커플 성사를 도와주는 것과 비슷하다.

효소는 신체에서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자신의 결합부위에 딱 맞물리는 물질(기질)을 인식한다. 인식을 담당하는 효소의 결합부위는 기질이 화학적으로 변환되기에 딱 알맞은 환경을 제공한다. 덕분에 기질은 순식간에 다른 상태로 변신해버린다. 이러한 효소의 활약상은 도저히 셀 수가 없다. 고기를 먹은 후에 콜라겐을 분해하는 것, DNA를 복제할 때 이중나선을 가르는 것, 미토콘드리아가 에너지를 저장하는 것…… 효소가 없으면 모두 천년만년 걸릴 일들이다.

촉매는 화학작용에서 필수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때’를 기다리는 자에게는 필수적이다. 엿기름 없다고 녹말을 분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냥 놔두면 언젠가는 분해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오래 걸리는 탓에, 그 사이에 밥이 상해서 식혜는 아예 만들지도 못한다는 게 문제다. 마찬가지다. 효소가 없다고 해서 생체 반응이 벌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원소가 전부 자연에서 발견되듯이, 생체 작용 하나하나도 자연에서 다 가능한 일들이다. 단지 너무 오래 걸리고, 또 드물게 일어날 뿐이다. 안정적인 상태에 놓인 물질이 굳이 다른 상태로 변화할 이유가 없다.(같은 책, 193쪽) 이렇게 변화에 호의적이지 않는 환경에서 생명은 아예 시작될 수도 없다. 한 순간도 변하지 않는 때가 없는 것이 생명이므로. 밥 한 끼 먹고 한 달 뒤에나 소화시키는 신체가 살아갈 수 있겠나? 살아갈 의미나 있을까? 생명은 분명 자연에서 왔다. 그러나 자연 내부에 굳이 생명을 탄생시켜야할 불가결한 이유는 없다.

그 우연의 시작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효소다. 효소는 생명을 위한 시간의 태엽을 감는다. 드넓은 대자연 안에 존재하지만 드러나지는 않는 비밀스러운 운동들을 ‘인식한다.’ 인식하는 순간, 변화가 생긴다. 시간 선분들이 갑자기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한다. 생명은 이 수많은 시간들의 중첩이며, 변화가 끊이질 않는 새로운 종류의 시간이다. 수천 개의 효소들이 멈추지 않고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음악과 같다고 해야 할까? 음악은 생명의 시간과 함께 끝나겠지만, DNA 속에 담겨져 그 다음 세대에서 재생될 것이다. 생명이 그 후로 존속하도록 필연이 되어주는 것 또한 효소의 몫인 셈이다.

생명은 이 수많은 시간들의 중첩이며, 변화가 끊이질 않는 새로운 종류의 시간이다. 수천 개의 효소들이 멈추지 않고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음악과 같다고 해야 할까?

단백질은 우연과 필연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우연히 만들어진 구조에서 필연적인 기능을 끌어내는 기똥찬 기계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시간 속에서 형성된 분자는 동시에 시간을 변주해내기 시작한다. 자연에서 생명의 시간을 끌어내면서 그 우연한 시작과 반복되는 필연을 책임진다. 그리고 이 대담한 시간 놀이의 한복판에는 인식작용이 있다. 주어진 몸을 접어라, 그 몸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라. 그러면 모든 게 다시 시작될 것이다. 생명의 기본 조각인 단백질조차 그러할진대, 인간은 어쩔 것인가? 우리는 그저 우연과 필연의 방문을 기다리기만 하는 존재에 불과할까? 내 몸의 효소에게 미안해서라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시간을 움직이는 법

코로나바이러스가 쿠바를 휩쓸고 있던 5월의 어느 날이었다. 낯선 느낌을 엄습했다. 시간이 멈췄다. 하루가 일주일 같다가, 한 달이 하루가 같다가, 내일이 어제가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집안에 갇혀 산지 두 달 째였다. 타국에서 학업에만 의지해서 꾸려오던 생활을 송두리째 빼앗기자 나는 완전한 고립 속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때 비로소 자각했다. 시간은 오로지 관계를 통해서만 흐른다는 것을. 고립상태를 탈출할 방법은 없었고, 그래도 살아야 하니 뭔가를 꾸물꾸물 했던 것 같다. 미미한 노력 속에서 한 가지를 추가로 더 깨달았다. 자기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이 큰 사고를 당한 후에, 어째서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지 말이다. 이들 역시 시간이 멈춰버렸던 게 틀림없다. 그들이 투쟁꾼 혹은 구도자의 길을 택하는 까닭은 과거를 보상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든 세상에 다시 연결되어서 다시 시간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우연과 필연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끝내 대립해서 이해해버리고 마는 마음속에는 무지한 원망이 깔려 있는 건지도 모른다. 대립구도는 원망을 표출하기 좋다. 이 사건이 꼭 필연이어야 했는가? 우연이었다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을 때 즉각적으로 나오는 질문들이다. 하지만 필연과 우연을 구분한다고 해서 탈출구가 생기지는 않는다. 이것들은 시간의 두 가지 성격일 뿐이고, 시간은 어떤 노선으로든 충분히 불행을 안겨줄 수 있다. 불행 속에서 시간에 장막을 덮어버리는 것은 시간의 성격이 아니다. 그것은 무지다. 가려져버린 인식의 창이다. 고립은 발이 묶여서 정신이 이 세상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할지 모를 때 찾아온다. 그러나 모든 길이 막힌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마음의 길은 막혀있지 않다.

시간은 나 자신과 분리되어서 객관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첫 번째로 인식할 점이다. 시간이 우연과 필연을 통해서 나의 길을 엮어낸다면, 나 또한 시간 속에 변화를 불어넣는 ‘거대한 효소’다. 효소가 자연 속 변화를 촉진하면서 생명의 출발을 알렸으니,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변화와 역경으로 가득한 시간을 겪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시간을 원망하려는 자들은 효소를 원망하라. 나는 원망하기보다는 베끼려고 한다. ‘몸을 접으면’ 새로 열린다는 인식의 창을 달고 ‘숨은 시간’을 찾아보겠다. 지금은 정말 이상한 시대지만, 이 속에서 내 시간도 같이 흐르고 있다. 그것만은 다행이다.

시간이 우연과 필연을 통해서 나의 길을 엮어낸다면, 나 또한 시간 속에 변화를 불어넣는 ‘거대한 효소’다.

1)Albert l.Lehninger, , W. H. Freeman, 2008, 116쪽                          2)https://education.jlab.org/qa/how-much-of-an-atom-is-empty-space.html 3)https://phys.org/news/2017-02-atoms-space-solid.html                                                     4)Albert l.Lehninger, , W. H. Freeman, 2008, 120~125쪽

 

댓글

ava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