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심층의식 속 종자를 재현하는 세상

어렸을 때 우리 집 벽지는 특이했던 기억이 있다. 단순한 무늬가 반복되는 얼루룩덜루룩한 벽지였는데 그 속에서 세상 만물의 형상이 툭툭 튀어나오곤 했다. 어느 날엔 말이, 어떤 날엔 사람이, 또 어떤 날엔 새가 보였다. 한번 본 형상은 내 눈엔 더 쉽게 보였는데, 이상한 것은 다른 사람들 눈엔 그것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어린 나는 벽지 속 형상에 말을 걸기도 하고 듣기도하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 말을 들었다고 했는데 어린 나는 실제로 그 속에서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었는데, 제제가 이웃집 아저씨에게 나무와 얘기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이웃집 아저씨는 제제에게 “그걸 생각이라고 하는 거란다”하고 가르쳐 준다. 책의 다른 내용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장면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늘 기억에 있다. 이유는, 그 책을 읽으며, 어릴 적 벽지 속 형상들에서 또는 나무에서 또는 구름에서 또는 비에서 또는 꽃에서 들렸던 수많은 소리들이 사실은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물의 그 재잘거림이 생각이었다니. 나와 세상과의 깊고도 은밀한 사귐은 그 모든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아는 그 순간 끝이 났었다. 사물 속에서 보이던 수많은 형상과 수많은 소리는 어린 아이의 순수한 상상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었다고 치부했다.

그런데 유식을 공부하면서, 어릴 적 벽지에서 사물의 형상을 봤던 그 경험이 사물에서 수많은 재잘거림을 들었던 그 경험이 바로 심층의식이 세상을 드러내는 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단 한번이라도 그림이나 사진으로 ‘말(馬)’을 본 적이 없었다면 벽지에서 ‘말’의 형상을 볼 수 있었을까? 새를 본 적 없었다면 새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벽지 속 세상은 내가 경험한 것을 재현한 것이었다. 나와 벽지(대상)가 만났을 때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있던 것이 안식(眼識)을 통해 사물의 형상을 현현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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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벽지(대상)가 만났을 때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있던 것이 안식(眼識)을 통해 사물의 형상을 현현시켰던 것이다.

유식은 고유한 자성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없다고 한다. 우리 눈에 ‘빨간 장미’로 보인다고 해서 누가 봐도 ‘빨갛고’ 누가 봐도 ‘장미’ 모양으로 보이는 건 아니라는 것. 빨강이면서 또 장미 모양을 한 것은 그렇게 보일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자들(존재)에게만 그렇게 보이고, ‘빨간 장미’를 아는 자들에게만 ‘빨간 장미’로 인식된다는 것. 그들의 심층의식 속에 저장된 ‘빨간 장미’라는 종자에 연(緣)하여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푸른 하늘, 빨간 장미, 커피 향, 부드러운 털, 산, 바다 등과 같은 것들로 이루어진 이 세상은 아뢰야식이라는 심층의식 속에 저장된 종자에 연(緣)하여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여 나타난 세상이다. ‘말(馬)’에 대한 기억이 심층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얼룩덜룩한 벽지를 봤을 때 ‘말’ 형상을 드러내는 것처럼. 내 심층의식 속에 빨간 장미를 볼 수 있는 안식이 없다면? 그 향을 냄새 맡을 수 있는 비식이 없다면? 그 감촉을 감각할 수 있는 신식이 없다면? 눈앞에 (누군가에게는 보이는) 빨간 장미가 있어도 나는 빨간 장미가 없는 세상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러니 황하의 모래알 수 보다 더 많은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의 영역 중에서, 세상을 이 형상, 이 소리, 이 냄새, 이 맛, 이 촉감으로 잡아 유지하고 있는(執持) 것은 내 심층의식인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에 연(緣)하기 때문이다.

돌고 도는 식의 순환

심층의식인 아뢰야식에 무엇이 저장되어 있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아니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매트릭스』(앞 연재 참조)에서 주인공 레오가 경험하는 현실(사실은 가상현실)은 컴퓨터가 프로그래밍 한 세상이다. 레오는 프로그래밍 한 대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한다. 그러니 레오에게 아뢰야식은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라고 할 수 있다. 레오는 컴퓨터가 그려낸 세상을 자신이 사는 세상으로, 컴퓨터가 그려낸 몸을 자신의 몸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레오의 경험은 세상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레오는 세상의 형상, 소리, 냄새, 맛, 질감에 어떤 영향을 주거나 그것으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신이 명령한 대로 모든 것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세상은 매순간 중앙처리장치로부터 일 방향으로 펼쳐진다.

그런데 유식에서 말하는 아뢰야식은 일방향이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쌍방향이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는 어디서 왔는가? 시작도 없는(無始) 아득한 옛날부터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다. 어떻게 저장되는가? 내가 반복하여 경험하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현현시킨 세상을 내가 인식하고 내가 인식했기 때문에 다시 그 세상을 만드는, 세상과 아뢰야식이 쌍방으로 영향을 주며 돌고 도는 구조가 성립된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에 연(緣)하여 세상이 나타나고(種子生現行), 나타난 세상을 전오식, 의식, 말나식을 통해 인식하면 이 인식한 것은 모두 아뢰야식에 저장된다(現行熏種子). 시작도 없는 아득한 시간 동안 내 오감과 의식 그리고 자아의식이 경험한 것들이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지금 경험하는 내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전(前) 내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한 것들이 다음 순간 내가 경험하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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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도 없는 아득한 시간 동안 내 오감과 의식 그리고 자아의식이 경험한 것들이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지금 경험하는 내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며 레오는 억울하겠다는 생각을 했다.(하긴 매트릭스에서 깨기 전엔 그것이 가상현실인줄도 몰랐으니 억울하다니 뭐니 할 것도 없겠다.) 로봇에 의해 본체가 배양되며 환영(幻影)인 줄도 모르고 가상현실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데, 그 가상현실마저 자신의 의지나 경험과는 전혀 상관없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복불복의 인생을 사는 것. 자신의 현실이 자신의 경험이나 앎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인생. 그 속에서의 레오의 삶은 무엇일까? 생생한 현실을 경험하지만 그 경험이 아무런 힘도 의미도 가지지 않는 현실을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사실 레오를 보면서 우리도 지금 『매트릭스』 속 깨어나지 않은 레오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세상은 나와 상관없이 저~어기 따로 존재하며 돌아가고 있고, 나는 그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상관없이 살아간다. 저기 보이는 하늘이, 우거진 숲이, 그 숲속의 동물이, 지금 만나는 친구가 오늘을 사는 내 모습과 전혀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사는 우리. 오늘 내가 경험한 것과 내가 알게 된 것이 내일 우리가 사는 세상에 아무런 힘도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우리.

생생(生生) 또는 무한반복

세상은 다양한 식을 가진 존재의 수만큼 다양하다. 『금강경』의 ‘황하의 모래알 수 보다 많은 세상’은 말 그대로 많고 많은 세상이다. 유식을 공부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이 다양함이었다. 내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던 내 귀에 들리든 들리지 않던 세상은 형상과 소리로 가득 차 있고, 냄새와 맛과 부딪힘(觸)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것들은 내가 보든 보지 않던, 듣든 듣지 않던, 냄새 맡든 맡지 않던, 맛보든 맛보지 않던, 부딪히든 부딪히지 않던 나와 끊임 없이 연결되어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는 세상을 현행시키고, 그 현행시킨 세상을 전오식, 의식, 말나식이 인식하여 다시 아뢰야식에 종자로 저장하고, 이 종자에 연(緣)하여 다시 다음 순간의 세상을 현행시키는 구조는 자칫 똑같은 세상을 반복하며 돌고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레오와는 다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레오보다 더 불쌍한 무한반복의 세상. 하지만 오늘은 분명 어제와 다르고, 매순간은 조금 전의 순간과 다르다. 변하지 않고 고정된 듯이 보이지만 세상은 매순간 변하고 있다. 이는 종자에 연(緣)하여 현행된 세상이 보이든 보이지 않던, 들리든 들리지 않던 다른 형상, 다른 소리와 끊임 없이 관계하며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뢰야식에서 현실로의 현행(現行)과 현실에서 아뢰야식으로의 저장(熏種子)의 식의 순환 구조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내가 경험하는 것들은 가상현실 속에 사는 레오의 것처럼 무의미하지 않다. 인식하지는 못하는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형상과 소리, 냄새, 맛, 부딪힘과 끊임 없이 작용하며 내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내 현실은 레오의 현실처럼 초월적인 어떤 것에 의해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매순간의 경험이 다음 경험의 원인이 되고, 그 경험에서의 앎이 다음의 앎을 불러오며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은 아뢰야식의 저장되었던 종자에 연(緣)하여 드러났지만 현실로 드러난 순간 다른 세상과 끊임 없이 관계하며 새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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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고 고정된 듯이 보이지만 세상은 매순간 변하고 있다.

문제는 이 새로움을 내가 얼마나 자각(自覺)할 수 있느냐이다. 이 새로움에 내 마음이 얼마나 열려있느냐에 따라, 매순간 새로움으로 업데이트되는 생생(生生)한 삶을 살 수 있느냐 아니면 돌고 돌며 똑같은 것을 무한반복 하는 삶을 사느냐가 결정된다. 그러니 이즈음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지금 어떤 삶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나는 지금 세상에 가득 찬 다른 형상, 다른 소리들을 어떻게 자각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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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이승현
2 months ago

새로움은 늘 내 곁에 있지만 스스로 느끼지 못 하면 무한반복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무한반복을 벗어나려면 새로움에 마음이 열려야 된다.
무한반복을 벗어나고 싶지만 마음을 연다는 건 어렵네요…ㅠ

우윤옥
우윤옥
1 month ago

대단한 가르침이네요. 어제의 나에게 집착하고 살아 온 내가 참 부끄럽습니다. 오늘부터는 이 가르침을 새기면서 살아 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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