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복

어떤 노인이 부역살이로 괴로워하다가 갑자기 발광하였는데, 입과 코에서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다고 하면서 두 손으로 긁어대는데 여러 해가 지나도록 낫지를 않고 맥은 모두 홍대(洪大)하여 팽팽하였다. 대인(戴人)이 진단해보고 말하기를 간은 모려(謀慮)를 주관하고 담은 결단(決斷)을 주관합니다. 그런데 부역을 하라는 독촉은 심하고 그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간은 여러 가지 궁리를 하게 되나 담은 결단을 못 내려 억눌린 마음이 펴지질 못하고 성낸 것이 풀리지 않아 심화(心火)가 얽히고 쌓여서 양명경(陽明經)을 타 누르게 되었다. 그러나 위()는 본래 토()에 속하고 간()은 목()에 속하며 담()은 상화(相火)에 속하여 이 상화가 목기운을 따라 위()에 들어가기 때문에 갑자기 발광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뜨거운 방에 누워서 땀을 세 번 푹 내게 하였다. 그 다음 조위승기탕(調胃承氣湯)으로 설사를 20여번 크게 시켜 피같은 물과 어혈이 섞여서 몇 됫박 나오더니 다음날에는 괜찮아졌다. 그 후에 통성산(通聖散)으로 조리시켰다. (내경편, ‘’ 292)

『동의보감』은 선조 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와중에 쓰였다. 선조가 허준에게 의서편찬을 명했던 취지 가운데 하나는 백성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나지만 백성들이 몰라서 못 쓰고 죽어가고 있으니 백성들이 알기 쉽게 편집하고 우리나라의 명칭을 한글로 쓰라는 것. 허준은 선조의 명을 이행했다. 구하기 쉬운 한 가지 약재만을 모아 ‘단방(單方)’이라는 항목으로 각 문(門)의 말미에 배치한 것도 백성을 위해서였다.

이 뿐 아니다. 전쟁 통에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연명하고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 의학서들의 처방뿐 아니라 민간에서 내려오는 요법들도 수용해서 백성들이 알기 쉽게 했다. 피난 갈 때 아기가 울면 솜에 감초 달인 물을 적셔 입에 물리라는 처방까지 있는 걸 보면 전란이라는 상황에서 쓰여진 의서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아기가 울면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길에 버리고 가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생각해낸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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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리 백성을 위하는 왕이라 하더라도 전쟁 시에 부역(賦役)을 면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죽더라도 전장에서 죽기를 요구한다. 노인도 예외가 아닌 걸 보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긴급했는지 알 수 있다.

노인은 지금 부역하라는 독촉을 받고 있다. 가려 해도 몸이 말을 안 들으니 노인으로선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혹 병중에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나가면 강제로 끌려가게 될테니 어떻게든 안 나가도 될 구실을 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일을 꾀하거나 방법을 강구하는 것을 ‘모려(謨慮)한다’고 한다. 모려할 때 쓰는 우리 신체의 기관은 간(肝)이다. 간은 오행상 목(木)에 배속되며 계절로는 봄, 봄에 언 땅을 뚫고 나오는 강한 힘의 기세로 어떤 일을 도모하려 한다. 마치 전장에 나가기 전 천세와 지세,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작전을 짜는 장군처럼. 그래서 간을 ‘장군지관(將軍之官)’이라고도 한다. 시작하기 전에 충분히 살펴보고 생각해보는 힘이 간에서 나온다. 간이 튼튼할수록 올바른 판단력으로 모려를 할 것이다. 감정으로 볼 때 간의 목기운은 ‘분노’이다. 분노는 봄에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힘을 닮았기 때문이다.

모려는 결단으로 이어진다. 모려를 통해 시작할 만한 근거를 마련했다면 이제 결단해야 한다. 결단해야 시작으로 이어진다. 이 결단을 담당하는 장부는 담(膽)이다. 담은 간의 한 켠에 붙어 있으면서 간과 함께 목에 배속되고 간의 모려를 결단한다. 담에 배속된 감정은 용기이다. 결단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담이 튼튼하면 사사로운 이익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고 의로운 판단을 내려 결단한다. 담을 ‘중정지관(中正之官)’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모려와 결단은 목(木)의 힘인 동시에 상화(相火)의 힘이기도 하다.

우리 몸에는 뜨거운 불도 있다. 이를 상화(相火)라 한다. 다른 말로 무근지화(無根之火)’라고 이르기도 한다. 뿌리가 없는 불이라는 뜻이다. 군화는 물에다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 뜨겁지 않다. 상화는 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순수한 불이어서 항상적으로 흐르지 않고 그때그때 확 타올랐다 꺼진다. 군화가 중심을 잃고 항상적 흐름을 획득했다면 상화는 중심에서 발화되며 화끈하고 일시적이다. 군화는 심장에서 비롯되었고 상화는 간, , 신장, 삼초등에서 발화된다. (양생과 치유의 인문의학 동의보감, 안도균, 작은 길, 172)

우리 몸에는 두 가지의 불이 있다. 군화(君火)와 상화(相火)다. 군화는 심장이 주관하는 화(火)이다. 심장은 혈(火)을 온 몸에 보내야 하는데 화의 원래 성질로는 사지 말단까지 보낼 수 없다. 화는 자연 상태에서는 위로 타올라 흩어지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혈이 몸의 구석구석까지 가려면 흘러야 한다. 흐르려면 물과 만나야 한다. 흐를 수 있는 것은 물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서 물의 장부는 신장이다. 신장의 물이 위로 올라가 심장의 혈과 섞여 사지 말단 까지 흘러가는 것이다. 이처럼 물과 만난 화, 즉 심장의 혈액을 ‘군화’라 한다. 군화는 물에 뿌리를 두었다. 그래서 따뜻하긴 하지만 뜨거운 불이라고는 할 수 없다.

반면에 상화는 물에 뿌리를 두지 않는 무근지화(無根之火)이다. 그래서 뜨거운 불이라 할 수 있다. 상화는 순간적으로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일시적으로 실천할 때 쓰이는 강한 에너지다. 바로 간이나 담에서 행해지는 모려나 결단이 이에 해당한다. 상화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막강한 열기를 품고 있다. 그러나 상화를 지나치게 사용하면 화기가 위로 뜬다. 물과 섞이지 않은 화는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고 불의 본래 성질대로 위로 타오른다. 심하면 정신적인 질환이 생길 수 있다.

지금 노인은 기력도 약한데 간/담의 힘, 혹은 상화의 힘을 지나치게 쓰고 있다.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도 뾰쪽한 수가 없다. 모려를 자꾸 해보지만 결단은 못 내리고 또 모려를 반복하면서 결단 못 내리는 답답함을 반복해서 겪다보니 간담은 억눌림을 받아 목의 성질인 분노가 위로 치민다. 그 화병이 오죽할까?

의사는 노인이 입과 코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다며 못견뎌서 긁어대는 것을 보고 그 답답함과 분노가 위로 치밀어 코, 입까지 올라온 것으로 여겼다. 12경맥 중에서 코와 입을 돌아 흐르는 경맥은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이다. 오장육부 중에서 위는 토(土)에 배속된다. 따라서 목기운이 토를 누르는 것으로 보았다. 오행의 생극으로 볼 때 목은 토를 누른다(목극토). 이때 간담의 목기운인 분노는 상화의 기운이기도 한데 목을 타고 족양명위경으로 들어가 코와 입까지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상화가 망동할 정도면 몸의 수분을 졸여서 혈액이나 진액이 뭉치게 되어 덩어리가 생긴다. 그것을 ‘어혈(瘀血)’ 혹은 ‘담음(痰飮)’이라 한다. 또 대변이 굳을 수도 있다. 설사시켰을 때 몇 됫박이나 나왔다 하니 상화가 이만 저만 치성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전쟁이 힘 없는 노인을 이처럼 병으로 몰아갔다. 지금은 전쟁시는 아니다. 하지만 노인처럼결단을 못 내리면서 헛되이 이루어질 수 없는 모려만을 되풀이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공부하겠다고 늘 모려는 하지만 결단을 못 내리고 생각만 하는 경우, 어떻게 집을 혹은 회사를 나가 독립할까 늘 궁리하면서도 결코 실천은 못하는 경우, 많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이치를 알았으니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시기를. 용기를 내어 한 번 올바른 결단을 내리면 간, 담이 그만큼 좋아진다. 그러면 또 그 좋아진 간담의 기운으로 올바른 모려와 결단을 할 수 있고. 선순환으로 돌아서게 된다. 만약 노인처럼 심해져서 몸에 생리적인 증상이 나타난다면 그 뭉친 것을 빼내는 것도 필요하다. 조위승기탕은 열을 씻어주고 마른 것을 축여주며 단단한 것을 연하게 해주는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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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호정
2 months ago

상화가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일시적으로 실천할 때 쓰이는 ‘강한’ 에너지였군요! 그런 에너지를 다스리지 못하니 병이 날 수밖에 없겠군용. 한편으로는 그런 힘을 계속해서 가동시키고 싶어하는 제 자신이 보입니다..ㅎ;;
동의보감이 말하는 원리 정말 신기하네요*_*
내 안의 힘과 기운을 조율하는 것에 시선을 돌리고 싶게 만드는!

이승현
이승현
2 months ago

결정하지 못 할때, 상화가 망동한다. 항상 시간이 알아서 해주겠지란 태도로 갔는데, 뭔가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글도 감사합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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