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바다에 이는 파도

유식에서는 우리의 식이 여덟 개의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고 얘기한다. 감각기관을 통해 바깥 대상을 인식하는 다섯 개의 식(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인 전오식)과 추리, 판단, 감정, 의지 작용 등의 기능을 담당하는 제6의식,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헤아리며 ‘나’라는 생각을 항상 유지하는 말나식 그리고 근본식인 아뢰야식. 아뢰야식이 근본식인 것은 전오식, 제6의식, 말나식(이하, 7전식(7轉識)이라 한다)이 아뢰야식에서 변하여 현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뢰야식과 7전식의 관계를 알려면 바다를 상상해보면 된다. 고요한 바다. 바람 한 점 일렁이지 않아 파도하나 없는 상태의 바다. 모든 것을 품고 끊임없이 흐르고 있지만 고요한 바다의 모습. 그것을 7전식이 현현되지 않은 아뢰야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문득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면 이 바람에 연(緣)하여 파도가 일어나는데, 이 파도는 원래는 없던 것이었지만 바람에 연하여 바다에서 일어나 나타난 것이다. 비유하자면, 이 파도가 바로 7전식이 된다. 파도와 바다가 다른 것처럼 7전식은 분명 아뢰야식과 다르지만, 파도는 바다에서 나온 것처럼 7전식은 아뢰야식을 근본으로 하여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아뢰야식이라는 근본식이 변하여 7전식이 현현된다. 그래서 7전식은 아뢰야식과 분명 다른 식이지만, 그 현현되는 바는 아뢰야식이 품고 있는 종자(種子)를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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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뢰야식과 7전식의 관계를 알려면 바다를 상상해보면 된다.

7전식(전오식, 제6의식, 말나식)은 우리 현실에 있어서 가장 표면에서 작용하는 식들이다. 전오식은 대상을 만났을 때 그것을 감각하여 형상화하고, 제6의식은 전오식이 감각한 것을 분별, 판단하거나 추리하며, 말나식은 그 모든 작용에 ‘나’라는 고유한 마음을 유지하게 한다. 대상을 만났을 때, 그것이 ‘무엇’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모두 7전식에서 이루어진다. 똑같은 상황과 똑같은 대상을 보고도 각기 다르게 보고,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반응하는 것은 보고 듣고 해석하는 7전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불교에서는 ‘유정(有情)’이라고 한다)의 기질, 성격, 정신활동의 다양성은 각 유정들의 7전식의 다양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7전식을 현실로 현현시키는 것이 바로 심층의식인 아뢰야식이다. 파도가 바다에서 나타나듯. 그러니 아뢰야식은 우리 생명과 성격의 근저(根底)에서 매 순간 작용하여 7전식의 흐름을 형성하며(『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 참조), 우리 정신활동의 본원이 되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이 아뢰야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경험을 저장하는 식, 아뢰야식

아뢰야식을 설명하려면 참 어렵다. 이럴 땐 아뢰야식이란 말 자체를 해석해보는 수밖에 없다. 아뢰야식은 ‘아뢰야’하는 ‘식’이다. “‘아뢰야(阿賴耶)’란 여러 가지 물건을 ‘저장하다. 축적하다. 보존하다’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아라야’를 중국인들이 발음 나는 대로 옮긴 것이다.”(『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 참조) 이에 의하면 아뢰야식은 무언가를 저장하고 보존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저장하고 보존하는가? 우리가 일상에서 몸으로(身), 입으로(口), 의도(意)로 지은 모든 업(業)뿐만 아니라, 말과 생각(名言)을 저장하고 보존한다.

그러면 식은 무엇인가? 식이란 ‘알다’, ‘분별하다’는 뜻이다. 보조국사로도 알려진 고려 시대 지눌대사는 “마음이 항상 고요한 것은 자성의 본체요, 마음이 항상 아는 것은 자성의 작용이며, 그 앎이 능히 말하고 분별하는 것 등은 인연을 따르는 작용이다.”(『명상의 철학적 기초』 참조)고 했다. 이에 의하면 우리가 흔히 ‘마음’,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는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내 마음은 어디 있는가? 뇌에? 심장에? 그런데 뇌나 심장을 해부해도 마음이란 것은 찾을 수가 없다. 마음은 몸의 어느 한 부위 또는 몸 전체의 신경망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찾는 그 작용, 찾아서 알려고 하는 그 작용. 그것이 바로 마음이라는 것. 그러니 식을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안식(眼識)은 ‘보는 것을 통해 앎이 일어나는 마음’이고, 이식(耳識)은 ‘듣는 것을 통해 앎이 일어나는 마음’이며, 아뢰야식은 내가 한 모든 경험을 저장하고 그것을 아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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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眼識)은 ‘보는 것을 통해 앎이 일어나는 마음’이고, 이식(耳識)은 ‘듣는 것을 통해 앎이 일어나는 마음’이며, 아뢰야식은 내가 한 모든 경험을 저장하고 그것을 아는 마음이다.

어떻게 아는가? 안식이야 ‘보는 것을 통해 아는 마음’이라지만, 아뢰야식은 어떻게 ‘경험하여 저장한 것’을 아는가? 결과적으로 말하면 7전식으로 현현하여 아는 것이다. 아뢰야식은 7전식(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마음)을 통해 무시(無始)이래 경험으로 훈습(종자로 저장)한 세상, 경험으로 훈습한 몸, 경험으로 훈습한 행위와 생각(아뢰야식의 相分)을 현현시키고, 아는 마음 그 자체로 자신을 안다(아뢰야식의 見分). 사실 어려운 표현이다. 마음이 마음을 아는 얘긴데, 마음자체로는 마음을 알 수 없다. 예를 들어보면, 보는 마음(안식)은 그 자체로는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반드시 보는 것(주, 견분)과 보여 지는 것(객, 상분)으로 나누어져야 보는 마음(안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처럼 아뢰야식도 세상과 몸, 행위와 생각을 통해야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에 의하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되는 모든 것(세상과 몸)과 모든 행위와 생각은 바로 아뢰야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저기 보이는 산도, 하늘도, 바다도, 건물도, 저렇게 보이는 저 사람도, 내 몸도, 내 생각, 내 행동도 모두 아뢰야식이 7전식을 통해 스스로를 아는 것이다.

어렵지만 여기까지는 이해가 된다. 우리 인격의 근저엔 모든 경험을 종자형태의 앎으로 저장, 보존하면서(現行熏種子) 대상을 만나면 7전식으로 그 앎을 현현시키는(種子生現行) 근본식이 있다고 이해하면 된다. 이 근본식은 경험한 것을 저장하고, 그 저장된 것으로 다시 세상을 현현하고, 현현한 것을 다시 경험으로 저장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상속한다. 우리 생명과 인격 근저에 있으면서 우리를 지금 살고 있는 ‘그것’으로 살게 하는 것, 그것을 아뢰야식이라고 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유식은 아뢰야식을 ‘윤회(輪廻)의 주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복잡해진다. 윤회의 주체라니. 윤회가 무엇인가? 그야말로 돌고 도는 삶 아닌가. 드라마와 영화, 소설의 단골 소재가 윤회이다. 과거의 어느 생에서 우리가 만나 돌고 도는 삶을 거쳐 현생에서 다시 만난다는 소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끈다. 이번 생에 못 이룬 사랑을 다음 생으로 기약하는 스토리도 많이 봤다. 어쨌든 윤회는 누구나 들어봤지만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아니,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야 하나?) 흥미로운 주제 중 하나이다. 유식은 그 윤회의 주체가 바로 아뢰야식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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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은 그 윤회의 주체가 바로 아뢰야식이라고 한다.

윤회(輪廻), 업의 상속

윤회라는 관념은 기원전 10세기경 인도에서 생겨났다. “윤회의 관념은 불교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인도의 보편적 사유였다. 그들은 인생이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죽음은 또 다른 생으로의 시작이며, 생은 또한 죽음으로의 준비기간이다.”(『인도철학과 불교』 권오민 지음, 민족사, p40) 인도인들은 인간은 생과 사를 끊임없이 오고가며 사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 반복 속에 더없는 괴로움을 겪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이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의 개념이었다.

불교는 인도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윤회 관념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불교의 윤회 관념과 불교이전 브라만교의 윤회관념은 조금 다르다. 불교이전 인도에서의 윤회란 정신의 본질은 상속되고, 사람이 옷을 바꾸어 입듯 육체만 변화되는 것이었다. ‘본질’, ‘상속’이란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외형은 바뀌더라도 그 속에 변하지 않는 어떤 마음이 생(生)을 거듭하며 지속되어 유지되는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의 흥미를 끄는 것이 이 부분이다. a라는 육체로 b를 사랑하는데, 그 사랑하는 마음이 본질로 상속되어 육체가 c와 d로 바뀌더라도 작동하는 것. <은행나무 침대>라는 영화는 인간에서 인간으로의 마음 상속이 아니라 인간에서 나무로의 상속까지 얘기한다. 그만큼 ‘변하지 않는 본질’과 그것의 ‘상속’이라는 개념은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인 우리에게 매력적인 소재이다.

인도의 브라만교는 영원불변하는 자아를 ‘아트만’이라 하여, 이 아트만이라는 본질이 영원히 몸을 바꾸어 상속되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아는 윤회 관념이기도 하다. 이러한 윤회에 의하면 내가 죽더라도 ‘나’라는 본질은 상속되어 다음 생에 전달된다. 그러니 다음 생의 나는 육체만 다를 뿐 이번생의 나와 같은 나이다. 죽지만 죽지 않는 나, 불멸의 나이다. 불교에서도 윤회를 얘기한다. 그런데 불교의 윤회는 조금 다르다. 불변하는 본질의 상속이 아니다. 아트만이라는 자아의 윤회가 아니다. 생을 거듭하며 무언가 상속하기 때문에 윤회라는 말을 쓰긴 하는데, 인도의 윤회처럼 ‘나’의 상속이 아니다. 그럼 무엇이 상속되는 것일까? 바로 업(業)이다. 업(業)이 상속되는 것. 바로 이 부분에서 아뢰야식이 등장한다. 아뢰야식이 업을 상속하는 주체라는 것. 이생에서 저 생으로 업을 상속하며 생을 만들어 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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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에서 저 생으로 업을 상속하며 생을 만들어 간다는 것.

전생은 있을까?

아뢰야식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다 보니 윤회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윤회를 얘기하지 않고 아뢰야식을 설명하는 것은, 갈 수 있는 수많은 길은 보지도 않고 알려진 하나의 길로만 돌진하는 자동차처럼, 우리 삶의 많은 가능성을 묻어버리는 것이다. 윤회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어렵지만 윤회가 없다고 증명하지도 못하는 이상 모든 것을 열어놓고 공부하는 수밖에.

한때 흥미를 끌던 책이 있었다. 최면을 통해 사후의 세계 또는 전생을 경험하는 것과 관련된 책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선 신경정신과 의사인 김영우 박사가 쓴 『전생 여행』이란 책이 출판된 적이 있었다. 그 책을 읽고 김영우 박사에게 전화하여 최면퇴행을 예약했다. 그만큼 윤회는 흥미로운 주제였다. 이 삶이 아니 다른 삶이 있다니. 그 삶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떻게 살았을까? 그 삶이 지금과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그때 인연 있었던 사람들 중에 현 삶에서도 만난 사람이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재미있었다.

1년여의 기다림(예약해놓고 1년여 동안 잊고 있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끝에 드디어 최면 퇴행을 한 날을 기억한다. 편안한 침대에 누워 마음을 가라앉히고 박사가 유도하는 말을 따라 숨을 쉬고 의식을 다운시켰다. 전생을 체험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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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세 번에 걸친 최면퇴행으로 어머니 태속에서의 기억까지는 들어갔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든 흥미를 잃어버렸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전생을 안다는 것이 무슨 소용 있나하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고, 어머니 태속의 기억만으로도 최면퇴행으로 알고 싶은 모든 것을 알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전생이란 것이 원래 없어서 일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두려움이었을 수도 있다. 무엇이 튀어 나올지도 모르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고 생각해보라. 내 삶은 이 삶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다. 다른 삶까지 연장해서 그것을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마음이었을 거다. 어쨌든 어머니 태속의 기억은 흥미로웠다. 엄마는 임신 3~4개월까지도 내가 배속에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 나중에 알고는 나를 지우려했다는 것(확인해보니 사실이었다). 그리고 눈물이 나도록 행복하게 나를 감싸던 어떤 느낌. 박사님에게 그 느낌에 대해 말하니 영혼의 느낌일거라고 했다. 영혼?? 영혼이라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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