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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해 완

쿠바로 가는 길이 더 멀어졌다. 코로나 2차 유행의 여파로 10월에도 국경은 닫힐 예정이다. 학교는 무기한 뻬스끼사에 돌입했고, 나는 멕시코에서 책 읽고 글 쓰며 얌전히 시간을 보낸다. 생존여부를 묻는 친구들의 국제 연락도 간간히 온다. 가족과의 불화로 가출을 감행한 말레이시아 친구, 샴푸 한 통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는 쿠바 친구, 공부는 때려치우고 사업을 하겠다고 설문조사를 돌리는 자메이카 친구, 실내에서 버섯 키우는데 재미 들린 뉴욕 친구. (이 엄중한 시국에 별 짓들을 다 한다.) 이들이 내게 살아있기는 하냐고 문자를 한다. 말투는 가볍지만 거기에 담긴 마음은 무겁다. 아, 정말 살아있기만 해도 다행인 때다!

멕시코에서 집콕(?)중인 해완

고통의 뿌리

한국을 떠난 시간은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익히는 시간이었다. 그 동안 나를 가장 많이 공부시켜준 것도, 겉으로 드러난 차이를 뛰어넘어 인간이라면 공유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해준 것도 이들이었다. 내 이웃이었던 뉴요커와 아바네로는 극과 극으로 다르긴 했지만 표현력만큼은 대단했다. 집도 절도 없는 이방인인데다가 스피킹 실력도 형편없었던 나는 이웃들 사이에서 무조건 말 들어주는 손쉬운 대화상대로 찍혔다.

팬데믹은 수많은 세계인들에게 고통을 안기고 있다. 하지만 팬데믹 전의 시간이 고통스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내가 들었던 수많은 인생이야기들은 모두 ‘고통’이라는 공통주제를 맴돌았다. 이 고통은 존재와 자기 인식 사이의 간극에 의해 특이하게 증폭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럴 때면 이야기의 앞뒤가 안 맞거나, 자기합리화와 인지부조화의 방어벽이 등장했다. 바꿀 수 없는 환경에는 불 같이 분노하고, 정작 바꿀 수 있는 환경은 체념하며, 실현 불가능한 욕망들을 포기 못하는 것. 이 언행불일치의 틈새, ‘균열’은 마치 각자가 뽐내는 개성과도 같았다. 이 균열은 코로나19와 함께 굶주림이 쿠바를 덮치는 순간에도 발생했다. 고통은 사람마다 다르게 일어났다. 누구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몸을 떨었고, 누구는 국경봉쇄는 또 다른 특별시기라면서 발작을 일으켰다. 또 누구는 파티를 못해서 슬프다며 울었다!

이 균열에 정말 고통이 뿌리내리고 있다면, 이것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 걸까? 언어로 명료하게 설명해내지 못하니 이성은 아니다. 사람들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고통을 체험하고 혼란을 해석하므로, 본능이나 외부 환경 같은 단일 변수로 돌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체질인가? 체질은 개개인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내부 환경이므로 가능성이 있지만, 신체 내부에서 ‘자기 불화를 창발해내는 공간’을 물리적으로 찾아낼 수는 없다. 신체처럼 존재에 밀착하면서도 비가시적인 차원이어야 한다. 그러자 답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마음이다. 혹은, 무의식의 영역이다.

DNA를 소개합니다

2%만이 뚜렷한 기능을 드러낼 뿐, 98%는 미지의 영역으로 어둠 속에 남겨진 세계. 이렇게 미스터리한 공간이 무의식 말고 또 있다. DNA다. 둘 사이에 구체적으로 밝혀진 관계가 없음에도, 나는 DNA를 공부할 때마다 무의식이 생각났다. 닮았다. 아름다울 정도로 규칙적이고 빽빽한 구조를 자랑하지만, 정보가 지극히 방대하여 그 깊이와 의의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는 것 말이다. 다음의 예시를 보라. 염색체 한 개를 구성하는 DNA를 일자로 쭉 펴보면 그 길이가 1m다. 그러나 46개의 염색체를 수용하는 핵의 지름은 10마이크로미터(0.01mm)밖에 안 된다. 압축률이 무려 만 분의 일이다.

물론 ‘DNA = 무의식’라는 가정은 거칠고, 근거도 없다. 이를 증명하는 게 포인트도 아니다. 하지만 DNA라는 내밀한 분자의 이야기는 분명 내게 풍요로운 상상력을 제공했다. 가닿을 수 없는 존재의 심연 앞에서, 이 세계를 ‘다 모르는’ 채로도, 어떻게 고통을 극복해내는 태도를 갖출 수 있을 것인가? 이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다.

 

DNA가 어떤 친구인지 먼저 소개하겠다. 모든 물질이 그렇듯이 DNA는 원자들이 모여서 만든 분자다.그 중에도 ‘단량체’라고 불리는 분자가 반복적으로 연결되면서 구성되는 고분자다. DNA의 단량체는 뉴클레오티드라는 분자다. 뉴클레오티드는 디옥시리보스라고 불리는 오각형 설탕, 인산기, 질소염기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총 다섯 종류의 질소염기가 부착 가능하다. 아데닌, 티민, 구아닌, 시토신, 우라실. A, T, G, C, U라고 간단히 표기된다.

질소염기의 화학적 성질은 참 묘하다. 세포 내부의 환경은 물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런데 질소염기의 고리부분은 물 분자와 친하지 않는 성질(소수성疏水性)을 띠고 있고, 그래서 물을 피해 자기들끼리 뭉치려고 한다. 그래서 뉴클레오티드 사슬이 나선형 모양으로 휘는 것이다. 설탕과 인산기는 바깥쪽으로 배치되고, 질소염기는 안쪽으로 파고들면서 물을 멀리한다. 그렇지만 질소염기가 통째로 소수성인 건 아니다. 질소염기의 가장자리에는 물 분자와 친한 성질, 즉 친수성(親水性)을 띠는 부분이 조그맣게 남아 있다. 친수성은 플러스 극이나 마이너스 극을 띨 수 있고, 서로 다른 극과 상호작용을 한다. 기가 막힌 것은 질소염기가 친수성을 통해서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 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끼리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구조적인 이유로 A는 T(RNA 경우 U)와, C는 G와 항상 짝을 짓는다. 첫 번째 사슬에 A-T-T-G-C-A-G라는 질소염기 배열이 놓여 있다면, 그 반대편 사슬에는 필히 T-A-A-C-G-T-C의 질소염기가 배치된다. 이 짝짓기 본능 때문에 DNA는 항상 이중나선이다.

 

이 짝짓기 본능 때문에 DNA는 항상 이중나선이다.

한마디로 DNA의 이중나선은 질소염기를 외부 환경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려고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내부로 물 한 방울 들어갈 수 없는 ‘완벽 방수’인 셈이다. 왜 이렇게까지 철통방어를 해야 한단 말인가? 이유가 있다. 질소염기는 DNA의 꽃이기 때문이다. 질소염기의 배열정보는 곧 생체 정보다. DNA에는 무수한 생체 정보가 저장되어 있는데, 각각의 정보는 특정한 뉴클레오티드 배열로, 즉 질소염기 배열로 표기된다. 이 배열 덩어리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바로 유전자(gene)다.

단백질과 DNA, 존재의 두 차원

유전자! 이만큼 유명세를 누린 과학 개념이 또 있을까. 그만큼 말도 많고 오해도 많다. 우리는 은연중에 유전자를 ‘바꿀 수 없는 존재의 형질’로 이해한다. 태어나는 순간 존재방식을 결정하는 불가역적인 힘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유전자에 과도한 권능을 부여했다간 신체를 ‘DNA에게 조종당하는 로봇’ 정도로 격하시킬 염려가 있다.

사실 유전자는 단백질을 만드는 정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과정을 간단하게 묘사해보겠다. 우선 유전자의 염기배열이 ‘질소염기 짝짓기’ 성질을 이용해서 RNA에 옮겨진다. (전사transcription) RNA는 DNA의 형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닮은 분자다. 차이점이라면 설탕 종류가 디옥시리보스가 아닌 리보스이고, 질소염기 T 대신 U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DNA 유전자의 배열이 A-A-T-G-T-C라면, 그에 대응해서 합성되는 RNA의 배열은 U-U-A-C-A-G가 된다. 이런 RNA 가운데 메신저RNA라는 친구가 이 배열을 아미노산을 식별하는 정보로 활용한다. (번역translation) 연속적으로 배치된 염기 세 개는 특정 종류의 아미노산에 대응된다. U-A-A는 아미노산 류신과 매치되고, C-A-G는 글루타민을 찾는 식이다. 염기배열이 아미노산배열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렇게 스무 종류의 아미노산들이 순서대로 연결된다면 어떻게 될까? 지난 번 글에 썼던 것처럼, ‘접혀버린다.’ 단백질이 된다.

 

(해완이 사랑하는 단백질 사진)

쉽게 말해서 DNA는 인체 내 10만 종류의 단백질을 ‘어떻게 요리하는가’가 적힌 두꺼운 레시피북이다. 유기체의 모든 세포가 똑같은 책을 공유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속한 단백질을 합성할 때마다 이를 참고한다. 이것은 세포들이 깊숙한 곳에 보관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과도 같다. 자궁 속 수정체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건네 준 최초의 기억. DNA가 손상되면 세포는 더 이상 단백질을 만드는 법을 기억하지 못하고, 끝내 죽고 만다.

그러나 레시피북이 요리사를 조종한다고 믿는다면, 심지어 요리사를 대신해서 직접 요리까지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가? 정보를 택하는 것은 세포다. 그리고 그 선택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세포의 주변 환경이다. 250종류에 육박하는 인체 세포는 자신에게 필요한 단백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이 앎에는 유전 정보 뿐만 아니라 단백질이 언제, 어디서, 어떤 이웃 세포 옆에서 의해 합성되느냐라는 구체적인 ‘시공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DNA 혼자서 단백질을 합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단 한 개의 단백질을 합성하려고 해도 아주 많은 외부 단백질(효소)들이 DNA에 개입해야 한다. 이들이 없다면 DNA는 영원히 죽은 정보로만 남아있게 된다. 최초의 세포인 수정체가 최초의 단백질을 합성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외부가 필수 효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어떤 DNA도 홀로 생명을 창발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단백질과 DNA의 관계는 어느 쪽도 우위를 점하지 않는다. 이는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환원될 수도, 분리될 수도 없는 존재의 두 차원 말이다. 무의식 속 정보에 의미가 부여되려면 반드시 의식의 차원을 통과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DNA는 단백질 없이는 자기표현을 할 수 없다. 호르몬, 항체, 항원, 헤모글로빈, 효소 같은 단백질들의 강렬한 존재감을 한 번 떠올려보라. 단백질의 역동성도 의식 상태에 쉽게 대입된다. 기존의 아미노산 배열에 새 아미노산이 우연히 끼어들면 전체 구조(단백질)가 완전히 바뀐다는 것, 그렇게 구조가 새롭게 접히는 순간 필연적으로 다른 인식의 창이 열린다는 것. 이는 인생의 새 국면마다 변신을 거듭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닮았다. 게다가 단백질은 수동적으로 조립되기만 하지 않는다. 세상(신체)을 인식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 역시 우리를 닮았다.

 

기존의 아미노산 배열에 새 아미노산이 우연히 끼어들면 전체 구조(단백질)가 완전히 바뀐다는 것, 그렇게 구조가 새롭게 접히는 순간 필연적으로 다른 인식의 창이 열린다는 것. 이는 인생의 새 국면마다 변신을 거듭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닮았다.

그러나 의식이 제대로 활동하려면 저변의 무의식이 안정되어야 한다. 그곳에 평화가 깃들어야 한다. 감정의 파도를 갈무리하지 못하거나 충동에 휘둘리는 사람은 늘 어딘가 불안해보이지 않는가? 단백질 역시 DNA라는 근원이 무너지면 존속할 수 없다. 외부 자극(단백질)이 없다면 최소한의 활동조차 개시하지 않는 정적인 세계가 DNA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발하는 순간 생명활동은 파탄난다. 세포는 더 이상 단백질을 기억하지 못하고 세상과 불통상태에 놓인다. 문제가 생긴 DNA 복구시도는 거의 실패로 끝난다. 이 세계가 너무 깊은 심연을 끌어안은 탓이다. 단백질 정보를 탑재한 유전자는 DNA에서 겨우 2%에 불과하다. 나머지 98%는 알 수 없는 침묵 속에 잠겨있다. 단백질의 존재감 따위, 단숨에 초월할 만한 규모다.

심연은 보수적이고 혁명적이다

이 침묵의 정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아마도 영영 모를 것이다. 한때 분자생물학자들은 쓸모없는 황무지와 같다며 이를 쓰레기 유전자(junk gene)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생물은 무엇일까? DNA를 유전자로만 꽉꽉 채워서, 오직 ‘단백질 레시피북’으로만 활용하는 건실한 생물체는 누구일까? 박테리아 되시겠다. 과학자들이 박테리아 유전자를 ‘복덩이 유전자’라고 부를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미지의 영역이 넓을수록 개체의 복잡성도 증가한다. 소위 ‘고등동물’이라 불리는 생물체들은 인간처럼 모두 드넓은 침묵의 공간을 속에 품고 있다.

이 공간이 왜 침묵을 지켜야하는지는 명확하다. 생명활동에 혼선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단백질 합성은 치밀한 배제의 메커니즘을 필요로 한다. 세포는 98%의 비-단백질 합성 영역을 제외하는 것은 물론이고, 2%를 차지하는 유전자도 극히 선별적으로 골라낸다. 이 조절에 실패하는 순간 엉뚱한 단백질이 합성되고, 세포는 치명타를 입기 때문이다. 죽으면 차라리 다행이다. 어설프게 살아남아서 세포 분열을 계속하면 오류의 사이즈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 돌연변이가 생리 메커니즘과 충돌하지 않는다면 ‘진화’에 일조하겠으나, 반대라면 ‘유전병’에 일조하는 꼴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성을 유지해내는 과정이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 신체라는 동일한 한계를 짊어지고 계속 살아갈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생명체의 역량이다. 생명은 순간순간 자기 안에서 외부 환경과 내부 환경을 종합해내는데, 이는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을 순식간에 가늠해내는 능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필수생명정보를 저장한 DNA가 자기표현에 극도로 신중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표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변치 않는다고 해서 정지된 것은 아니다. 잔잔해 보이는 바닷물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그 아래 피 튀기는 생존 현장이 멈추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DNA의 세계에도 재구성(recombination)이라는 숨은 역동성이 있다. DNA의 일부분이 빠져나와 다른 DNA로 옮겨가는 현상을 뜻한다. DNA는 이 메커니즘을 손상된 부분을 보수 공사하는데 활용한다. 하지만 다른 염색체에 느닷없이 끼어들면서 정보를 교란시키는 트랜스포손 같은 위험한 녀석도 존재한다. 바이러스가 기원인 트랜스포손은 놀랍게도 우리 게놈의 45%나 차지하고 있다.

이런 역동성이 실제로 폭발하는 순간이 있다. 항체를 만들 때다. 항체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같은 불청객의 ‘얼굴(항원)’을 빠르게 스캔하기 위해 특별히 주문제작된 단백질이다. 100개의 항원이 있다면 100종류의 항체가 생긴다. 하지만 그전까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던 새 단백질을 이처럼 풍요롭게 창조해내는 비법은 뭘까? 세포가 앞으로 만나게 될 항원을 ‘미리 기억할’ 방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대답은 역시, 재구성이다. DNA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단백질이 기록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예비 항체를 위해서 수천 개의 염기서열 조각들이 준비되어 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이 조각들을 따로따로 떼어낸 후 한 군데에서 조합해보면, 가능한 경우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재구성은 이처럼 제한된 자원으로도 변화무쌍한 외부와 발맞출 수 있도록 유연성을 증폭시킨다. 항체 합성법은 한 염색체 안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트랜스포손의 움직임과 닮았다.

항체를 만드는 후천면역계는 오직 포유류에만 발달해 있다. (박테리아에는 없다!) 후천면역계는 계속 발전한다는 의미에서 ‘배움의 면역계’라고도 불린다. 이 놀라운 면역계와 포유류 DNA의 광대한 침묵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면, 침묵이 내포하는 것은 ‘배움의 능력’일지도 모른다. 자기 존재를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게 결국 배움의 본질 아닌가. 생존을 타협하지 않는 파격적 변신. DNA의 표면 아래에 창조력과 파괴력이 꿈틀거리고 있다. 단백질이 필연과 우연의 양극을 끌어안는다면, DNA는 보수와 혁명의 양단을 품는다.

복제의 반대는 세대다

이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특징이 하나 있다. 지속성이다. 세포의 죽음은 DNA의 끝이 아니다. 세포의 시간이 끝나더라도 DNA라는 기억은 소멸되지 않고 계속 이어져야한다. 이 의지는 ‘복제’라는 메커니즘으로 실현되고, ‘세대’라는 불연속적 존재 방식으로 표현된다. 세포의 생애주기에서 단백질 합성은 밥 먹듯이 벌어지지만, DNA 복제는 딱 한 번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이다. 엄마세포가 죽음으로써 두 딸세포가 탄생하는 순간 말이다.

엄마세포가 죽음으로써 두 딸세포가 탄생하는 순간

이것은 DNA의 보수와 혁명이라는 양면이 동시에 만개하는 찬란한 순간이기도 하다. DNA 복제 메커니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치의 오류도 없는 정밀함이다. 모든 염기서열을 완벽하게, 있는 그대로, 어떤 병 없이 그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딸세포는 본체만 갈아치운 엄마세포의 아바타인가? 그렇지 않다. DNA의 정보는 그대로 복제되지만 세대는 복제되지 않는다. 전(前)세대에서 후(後)세대로 넘어갈 때, 그 찰나의 순간에 딸세포가 엄마세포의 역할을 이어받을 것인지 아니면 DNA의 다른 부분을 활성화시키면서 변신을 꾀할 것인지의 여부가 결정된다. 이것이 차이화(differentiation)다. 차이화가 없다면 생명은 애초에 발생할 수조차 없다. 수정체는 영원히 수정체로만 남을 것이다. 차이화 덕분에 외배엽 세포가 뉴런세포도 되고 피부세포도 되며, 중배엽 세포가 근육도 되고 뼈도 되는 것이다. 복제는 DNA의 변함없는 생존을 보장해주고, 세대는 DNA의 창조력을 시험해볼 기회를 부여한다. 이 둘이 합쳐질 때 ‘지속’이 된다.

(DNA 복제 과정 중 간혹 보이는 세포분열 준비중인 엄마세포들)
DNA의 정보는 그대로 복제되지만 세대는 복제되지 않는다. 전(前)세대에서 후(後)세대로 넘어갈 때, 그 찰나의 순간에 딸세포가 엄마세포의 역할을 이어받을 것인지 아니면 DNA의 다른 부분을 활성화시키면서 변신을 꾀할 것인지의 여부가 결정된다. 이것이 차이화(differentiation)다.

 

차이화가 생명에 반드시 이로운 것은 아니다. 멀쩡했던 세포가 암세포로 변하는 것도 차이화 때문이다. 병적 환경에 심하게 노출된 세포는 DNA 손상을 입는다. 이 손상을 자체적으로 회복하지 못하면 다음 세대가 손상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회복의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 이상, 손상된 DNA는 세포의 회복력을 떨어뜨림으로써 손상 정도를 번번이 악화시킨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악순환의 고리는 더 맹렬해진다. 결과는? 암세포라는 돌연변이의 탄생이다.

중학교 교사로 삼십년 간 근무하신 이모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교내 문제아 때문에 학부모 상담을 신청해도 소용없는 경우가 허다하단다. 부모가 아이와 똑같은 문제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짜증 많은 부모와 사는 아이는 역시 짜증이 많고, 고집불통의 부모와 자란 아이는 타인에게 귀를 기울일 줄 모른다. 이들은 동일한 고통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게다가 이 부모가 어떤 경로로 고통을 껴안게 되었는지 추적해보면 또 조부모 세대에 그 원인이 있다. 그러나 고통이 지속되는 까닭은 이것이 부모에서 자식으로 ‘복제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부모 세대와 똑같은 자식 세대가 어디 있는가? 세대와 세대는 너무나 극명하게 차이난다. 즉, 이 고통은 세대가 갱신될 때마다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치유와 재생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 누적된 결과일 뿐이다.

과거에는 이런 일상적 예시와 유전학의 관련성이 잘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칼로 무 자르듯이 나뉘지 않는다는 게 점점 확실해지고 있다. 후성유전학(epigenetic)에 의하면 게놈은 환경과 역동적으로 교류한다. 환경의 압력은 DNA 염기서열을 직접 바꾸진 못해도 조절 메커니즘에 변화를 준다. (조절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미 언급했다.) 이 변화는 그 환경에 노출된 적 없는 후세대에도 전달된다. 가령, “생쥐가 특정 냄새를 맡을 때마다 전기 쇼크를 짝지어 경험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생쥐의 후각 신경세포의 수가 크게 늘어난다.” 이 생쥐는 나중에 “동일한 냄새에 충격 반응을 보이는 자손을 낳는다.” (아이 아이젠 외, <우리는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가>, 124쪽)

결론은 이것이다. DNA를 복제함으로써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혈연이다. 그러나 차이화를 통해 세대를 창발하는 것은 환경이다. 혈연이 아닌 주변의 인연이며, 그들을 감싼 특수한 시공간이다. 혹시 아는가? 짜증을 물려받은 아이는 마음공부를 시작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을 스스로 뿌리 뽑을지 모른다. 고집스러웠던 아이는 참스승을 만나면서 아집을 내려놓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자라서 또 다른 아이를 낳을 때, 이들만이 부모가 되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이들의 인생을 스치면서 흔적을 남긴 자 모두가 ‘부모’가 된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복제의 반대는 세대라고. 세대는 복제를 통해서 존속되지만 전 세대의 복제품은 아니다. 복제가 거듭되면 될수록, 세대는 최초의 복제자로부터 점점 더 멀리 벗어난다. 찰나와 같은 개체의 시간에서는 이런 DNA의 역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장대한 진화의 시간 속에서 DNA는 환경이 떠안기는 숱한 변화를 갈무리하면서 종(種)을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다. 우리들이 매일 행하는 언사와 몸짓, 마음씀씀이는 이 여정의 길바닥에 찍힌 발자국이다. 타인의 DNA 속에, 그들의 무의식 어딘가에 남게 될 흔적들이다.

삶의 반대는 재생이다

복제의 반대가 세대라면, 삶의 반대는 재생이다. 온갖 변화 속에서도 악착같이 항상성을 유지해내는 게 삶이라면, 불연속적으로 망가져버린 삶의 토대에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재생이다. 이 사이클 속에서 결국 인간은 팬데믹을 통과할 것이다.

코로나19 전까지 나는 삶의 반대가 죽음이라고 여겼다.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를 ‘숨 쉴 때마다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직시하라’는 까뮈의 젊은 기백 이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팬데믹 속에서는 나 홀로 죽음 앞에 의연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다른 이들의 공포와 절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치료제도 없는 상황에서 목숨 걸고 환자를 치료하라는 게 무슨 말장난인가? 그러나 “흑색의 반대는 백색이고 밤의 반대는 낮이며 삶의 반대는 탄생”(클로드 B.르방송, <달라이라마 평전>, 239쪽)이라는 고원 국가의 격언을 만났을 때,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이었다. 반박할 수 없는 역설이고 눈 뜨고 보지 못했던 진실이다. 세포분열이 일어날 때 누구도 엄마세포가 ‘죽었다’며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이를 새로운 탄생의 시작이자 엄마세포가 남긴 ‘차이화’의 힘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곧 재생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생사 역시 이렇게 이해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세포가 죽어도 지속되는 DNA의 기억처럼 ‘나’라는 존재가 타인과 연결됨으로써만 지속될 수 있다면, 개체의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니다. 살아남는 게 전부도 아니다.

팬데믹이 끝난다고 해서 사람들의 고통도 모두 끝나지는 않는다. 고통은 각자의 마음 속 불화에서 비롯되며, 이 불화는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오랫동안 ‘물려받은’ 뿌리 깊은 유산이다. 그런데 이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결국 주변 관계다. 특별시기의 굶주림을 상기하며 불안해하는 자에게 이웃이 음식을 건네주고, 고립된 노인에게 의대생이 뻬스끼사를 위해 찾아가며, 너무 심심해서 파티를 원하는 청년에게 누군가 건전한 말동무가 된다고 생각해보라. 그때 그들의 균열이 잠시 봉합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마음속 번뇌가 ‘무조건 반복되는 절대적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아니, 깨달음까지 가지 못해도 좋다. 최소한 코로나19와 그로 인한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망상에 다 함께 빠지지 않을 수는 있다. 이런 소박한 치유와 재생을 거듭하다보면, 언젠가 팬데믹도 진정 끝날 것이다.

지금은 그 끝이 멀게만 보인다. 멕시코에서는 매일 5000명의 새 코로나 환자가 발생하고, 500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고 있다. 예과생 딱지밖에 못 뗀 나는 이 상황에서 기가 막힐 정도로 무용한 인간이다. 이처럼 막혀버린 길 위에서 열심히 내 마음을 재건하고 있다. 이 또한 언젠가는 끝나리라고 믿는다. 재생을 믿는다!

삶의 반대는 재생이다. 재생을 믿는다!

참고 서적

– James D. Watson 외, , Pearson, 2014

– 힐러리 로즈, 스티븐 로즈, 김명진 역, 김동광 역, <급진과학으로 본 유전자, 세포, 뇌>, 바다출판사,     2015

– 아이 아이젠, 융드룽 콘촉, 김아림 역, <우리는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가>, 영림카디널, 2018

– 클로드 르방송, 박웅희 역, <달라이라마 평전>, 바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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