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전생기억에 대한 단상

어쩌면 최면퇴행을 통해 전생이 궁금했던 것은 나의 본질에 대한 궁금함이었을 수 있다. 부평초처럼 떠돌며 오락가락하는 내가 아닌 고유한 본질을 가지고 생과 생을 이어가는 나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물론 그 내가 근사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을 게다. 그런데 태아인 자식을 어미가 없애려 한다는 스토리는(앞 연재 참조) 그 전생이 뭐든 벌써 김이 팍 새는 상황이지 않은가. 그러니 전생 따윈 잊고 그냥 이 생이나 잘살아 보자는 마음이 들었을 수도.

그 당시, 전생퇴행을 하지 않고서도 전생을 기억한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지구가 아닌 이름도 알 수 없는 행성에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기억한다는 전생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공주, 왕자, 왕, 장군 등 근사한 모습이었다. 도대체 역사책에서 본 그 많은 노예는 다 어디 갔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 하지만 올해 『춘추좌전』을 읽으며 빵 터진 부분이 있었는데, 몇 천 년 전엔 실제로 나라들이 엄청 많았다는 거다. 제국이 형성되면서 그 많던 나라들이 하나둘로 통합되고 지금과 같은 국가가 형성된 것은 인간의 긴 역사에 비해 얼마 되지 않은 과거이다. 나라가 많으니 왕은 얼마나 많았겠는가. 또 왕은 얼마나 많은 자식을 낳았겠는가. 그 많은 왕, 공주, 왕자들의 얽히고설킨 스토리들. 그러니 공주랑 왕자 기억이 많은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렇다 해도 유독 자신의 멋진 삶에 대한 기억이 많은 이유는 뭘까? 전생이 정말 있을까라는 것은 제쳐두고라도 자신을 더 좋게 기억하려는 인간의 심리가 재미있는 부분이다. 『불교는 왜 진실인가』(로버트 라이트 지음)에서는 이를 진화적 이유에서 찾는데, 인간은 진화적으로 “자기를 실제보다 더 능력 있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여”(p119)기도록 진화했다는 것이다. 로버트 라이트는 이를 ‘우리 자신에 관한 환영’이라고 하는데, 진화의 과정에서 자신이 능력 있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외부 사람에게 여겨지면 자신의 이웃보다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았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자신을 부풀리게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포장하는 것은 중요한 일일 수밖에 없다. “자아가 가진 주요한 진화적 기능은 자기 이미지를 관리하고 홍보하는 일이”(p120)므로 최면퇴행이든 전생기억이든 어떤 것을 통해서든 자신을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는 기억을 찾는 것은 그 사람의 생존 차원에서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현생에서 그럴싸한 기억이 없다면 전생, 전 전생, 아니, 윤회의 모든 기억을 통틀어서라도 왕이었던 기억을 찾는 것은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보니 왕이든 왕자든 포장된 자신에 대한 환영을 생을 넘어서까지 찾아 관리하고 홍보하려는 우리 자아의 노력이 가상하다는 생각조차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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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된 자신에 대한 환영을 생을 넘어서까지 찾아 관리하고 홍보하려는 우리 자아의 노력이 가상하다는 생각조차 든다.

아뢰야식은 영혼일까?

최면퇴행(앞 연재 참조) 시 눈물이 나도록 행복하게 감싸던 느낌이 있었고, 그것을 영혼의 느낌이라고 했을 때, 난 영혼을 어떤 개념으로 받아들였을까?

1990년에 <사랑과 영혼>이란 영화가 개봉된 적이 있다. 패트릭 스웨이지와 데미 무어가 주연인 영화였는데, 불의의 사고로 죽은 샘(패트릭 스웨이지)의 영혼이 살아생전 자신이 사랑했던 몰리(데미 무어) 옆에 머물며 그녀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구한다는 얘기이다. 샘이 영매인 오다 메이(우피 골드버그)에게 빙의하여 몰리와 함께 도예 그릇을 빚는 장면은, ‘Oh~ my love, My darling’이라는 애절한 가사의 영화 OST와 함께 한동안 영화홍보 장면엔 빠지지 않고 나왔었다. 그때 샘의 영혼은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육체에 깃들어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한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 실체”(네이버 어학사전)를 영혼이라고 한다. 샘의 비물질적 실체인 영혼은 죽음과 함께 육체에서 분리된 것이다.

이 영화는 영혼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잘 보여준다. 육체에 깃들어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하는 비물질적 실체. 비물질적 실체인 영혼이 살아있는 자들을 도와주기 위해 애쓰는 장면에서, 최면퇴행 시 내 영혼(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느낌)도 그렇게 태아인 나와 교감했나 보다 생각했다. 이 세상엔 내가 볼 수 있는 형태의 몸만 있는 것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여러 형태의 몸들이 보이는 몸들과 상호작용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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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영혼이라 하면 개별 주체의 본질이 죽어서까지 유지되는 것 그리고 생을 거쳐 이어지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유식은 아뢰야식을 윤회의 주체라고 한다. 그런데 윤회의 주체로서의 아뢰야식이라면, 아뢰야식을 영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까? 모든 경험을 종자로 저장하는 어떤 것, 우리 생명과 성격의 근저에서 매 순간 작용하며 7전식을 현현시켜 현실을 나타나게 하는 어떤 것, 윤회의 주체인 어떤 것이라고 한다면 영혼이라는 개념과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하지만 아뢰야식을 그냥 영혼이라고 하기엔 찜찜한 구석이 남아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영혼이란 말에는 ‘개별 주체’, ‘실체’, ‘변하지 않는 본질’을 가진 어떤 것이라는 의미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영혼>의 샘과 같은 개별 주체로서의 영혼이 죽어서도 생을 넘어서도 작용한다는 개념.

무엇이 윤회하는가?

그런데 아뢰야식은 개별적 실체로서의 영혼과는 다르다. 영혼이란 말이 ‘개별 주체’, ‘실체’, ‘변하지 않는 본질’과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는 한 아뢰야식은 영혼이 아니다. 실체는 어떤 것을 ‘그것’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변하지 않는 성질이 있다는 개념이다. 아뢰야식을 실체 개념으로 보면 생이 바뀌어가도 변하지 않는 본질로서의 내가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아뢰야식은 7전식으로 경험한 모든 것, 즉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면서 일어난 앎을 매순간 종자 형태로 저장한 후(現行熏種子), 인(因)과 연(緣)의 작용에 의해 다음 순간의 현실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이다. 아뢰야식은 현재 내가 무엇을 경험하느냐에 따라 늘 변한다. 그러니 개별적 실체로서의 영혼 개념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윤회하는 걸까? 윤회는 동일한 실체의 반복이다. 아뢰야식은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지 않나. 그런데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라니. 아뢰야식의 어떤 성질 때문에 윤회의 주체로 언급된 것일까? 경험한 것을 종자로 저장한 후 이 종자를 다시 현실로 드러낸다는 개념 그대로라면 아뢰야식은 매순간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마음이어야 하지 않은가. 매순간 새로운 삶을 창조한다면 아뢰야식이 생을 이어 상속되더라도 윤회가 아니다. 윤회는 동일한 것의 반복이므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식은 종자가 윤회한다고 한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는 현실의 행위가 훈습(薰習)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훈습이란 “반복해서 한 행위의 결과가 점차로 쌓이는 것을 말한다.” 절이나 성당에 오랫동안 머물면 향 내음이 자기도 모르는 새 옷에 베이듯이,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不可知) “인격의 근저에 새로운 경험이 쌓이는 것에 의하여 인격이 새롭게”『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 p99)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훈습된 것을 종자라 하는데, 아뢰야식엔 수많은 생을 살며 반복한 행위의 습이 저장되어 있다. 이 행위의 습이 종자로 작용하여 특정한 마음을 반복하게 하고, 이 특정한 마음의 반복이 윤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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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뢰야식엔 수많은 생을 살며 반복한 행위의 습이 저장되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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