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종자는 경향성이다

종자는 행동이나 생각이 훈습(薰習)(앞 연재 참조)되어 저장된 것으로 일종의 잠재된 경향성(傾向性) 또는 에너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아뢰야식은 수많은 경향성이 저장되어 있는 식이다. 경향성은 행동이나 생각이 어떤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경향성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좋은 예가 하나 생각나는데, 얼마 전에 한 욕실 공사이다. 욕실 공사와 아뢰야식의 종자라니.

어쨌든 사연은 이랬다. 공간만 차지하고 별 쓸모가 없는 욕조를 들어내고 그 곳에 샤워기를 넣으려니 욕실 전체를 바꿔야 하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바닥부터 벽면까지 그야말로 전면공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바닥 공사를 하는 아저씨의 행동이 관심을 끌었는데, 타일을 모양에 맞춰 깔고 시멘트를 바르면 되는 간단한 작업인 줄 알았는데, 각도기(전문용어를 모르겠다)까지 사용하면서 자못 진지하게 타일 하나하나를 까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왜 그렇게 진지하냐고?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웃기다. 자기 집 공사를 해주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진지하게 열심히 일하냐고 묻는 어처구니없음) 근데 아저씨 말씀이 욕실 바닥 공사가 의외로 까다롭단다. 왜냐하면, 타일을 그냥 막 깔면 되는 것이 아니라, 물이 하수구로 흘러가도록 각도를 잘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각도가 너무 경사지면 사람이 미끄러질 수 있고, 각도가 없으면 물이 빠지기 어렵단다. 그 말을 듣고 세상 쉬운 일이 없구나 하는 생각만 했는데, 유식의 아뢰야식을 공부하면서 그 바닥 공사가 생각났다. 욕실 바닥은 평평하지 않다. 어떤 방향으로 경사져있다. 이 약간의 경사 때문에 매일 샤워를 하며 욕실에 새로운 물을 부어도 그 물은 늘 가는 방향으로만 흐른다. 어떤 물을 부어도 모두 하수구로만 흐른다. 약간의 경사가 하나의 변치 않는 흐름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하수구로 흐른 물은 하수구와 연결된 물길을 따라 흐르며 때로는 거칠게 휘몰아치고 때로는 잔잔하게 흐르면서 강으로 바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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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 바닥은 평평하지 않다. 어떤 방향으로 경사져있다.

우리 아뢰야식의 종자가 ‘굳이 표현하자면’ 욕실의 바닥의 경사와 같다. 종자는 경향성이라고 했다. 이 종자에 의해 우리의 행동이나 생각은 어떤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마치 물이 하수구로만 흐르듯 행동이나 생각의 방향이 정해진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아뢰야식에는 두 종류의 종자가 있는데, 하나는 명언종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업종자이다. 명언(名言)은 생각이나 관념 그리고 이것을 표현하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이나 언어는 분별에 의해 일어난다. 분별하지 않은 것을 언어화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명언종자는 ‘분별의 경향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업(業) 종자는 분별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선 또는 불선(악)한 행위의 경향성인데, 이를 ‘선악의 경향성’이라고 한다.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정화스님, p151 참조) 그러니까 아뢰야식에는 무언가를 분별하고, 그 분별을 바탕으로 선악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경향성이 종자 형태로 갈무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종자가 만든 ‘나’의 반복

몸으로, 입으로, 뜻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의 바탕에는 분별이 있다. 그렇다면 아뢰야식에 저장된 ‘분별의 경향성’이 현현시키는 최초의 즉 근원적인 분별은 무엇일까? 바로 ‘나‘라는 생각이다. ‘나’는 모든 분별들 중 가장 기본 되는 기준점이다. ‘나’라는 생각 없이 다른 생각들 또는 행위들을 할 수 있을까? 의식적이진 않을지라도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위에는 ‘나’라는 분별이 바탕으로 깔려있다.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명언종자는 ‘나’라는 분별을 만들고, 이 분별의 마음을 바탕으로 다른 모든 분별들이 이루어진다(彼彼分別生). 종자는 훈습된 것이라고 했다. 무시(無始)이래 ‘나’라는 분별종자가 아뢰야식에 훈습된 후 우리에겐 모든 것을 ‘나’와 ‘타’로 분별하여 보는 경향성이 생겼다. 이 경향성이 ‘나’라는 윤회를 반복하게 하는 원인이다.

아뢰야식은 7전식으로 경험한 모든 것을 매순간 종자 형태로 저장한 후, 인(因)과 연(緣)의 작용에 의해 다음 순간의 현실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이다. 찰나 전의 아뢰야식을 7전식으로 현현시킨 후(사실 ‘後’라는 말이 적절한가 모르겠다. ‘同時’라고 하기도 그렇고. 선후 관계보다는 아뢰야식에 의존(依存)해서 7전식이 현현되는 것에 초점이 있다) 7전식의 경험을 종자로 저장한다. 그러니 찰나 전의 아뢰야식과 찰나 후의 아뢰야식은 엄연히 다른 아뢰야식이다. 그런데 아뢰야식에 ‘나’라는 분별 경향성이 종자로 저장되어 있다면? 아뢰야식이 현현하는 모든 것들에 ‘나’라는 분별이 함께 일어나지 않을까. 그리고 이 분별은 다음 찰나의 아뢰야식에 종자로 또 저장된다. 그러니 전 찰나 후 찰나로 폭류처럼 흐르며(恒轉如瀑流) 매순간 달라지는 아뢰야식의 흐름 속에서도 ‘나’의 윤회가 가능한 것이다. 업(業)이 상속되는 와중에 ‘나’라는 분별이 계속되니 결국 ‘나’의 윤회가 되는 것이다. 최초의 분별인 ‘나’, 그 ‘나’를 중심으로 모든 마음작용이 일어난다는 착각의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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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분별인 ‘나’, 그 ‘나’를 중심으로 모든 마음작용이 일어난다는 착각의 반복.

욕실 바닥에 경사가 생기면 어떤 새로운 물을 부어도 그 물은 모두 하나의 방향으로만 흐르듯, 아뢰야식에 분별의 경향성이 생기면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해도 그 경험들을 모두 ‘나’ 중심으로 받아들인다. 전체적으로 서로 의존하며 하나로 흐르는 삶이 ‘나’를 중심으로 왜곡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참 다행인 것은 욕실 바닥의 경사는 한번 굳어지면 욕실을 갈아엎기 전에는 절대 바꿀 수 없지만, 아뢰야식의 종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유식은 수행을 통해 그 종자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얘기한다(便證得轉依). 물론 욕실 바닥을 갈아엎는 것보다 더 많은 과정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런데 그게 어딘가. 인간의 자유(불교에서는 ‘해탈’이라고 한다)에 이르는 고귀한 길에 대해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물다”는 스피노자의 말은 ‘어렵고’, ‘드물다’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길이 ‘있다’에 초점이 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앞으로 천천히 하기로 하자.(^^)

영혼, 잘못된 분별로 개체화된 의식

그런데 아직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왜 영혼에 이리 집착하고 있는가 하고 이즈음 지겨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뢰야식에 대한 자료를 찾다보면 영혼 얘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아뢰야식은 샨스크리트어인데, 이 말이 동아시아로 들어와 번역되는 과정에서 생긴 의문이었을 게다. 동아시아에선 영과 혼의 개념이 있었으니 이것과 아뢰야식이 비슷한 개념이 아닌가? 하는. 그러니 ‘영혼과 아뢰야식은 같은 것이 아니다’는 정도만으로는 안 된다. 아뢰야식을 얘기할 때 왜 영혼을 언급하는지 그 고리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아뢰야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지 않은가.

영혼은 육체에 깃들어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한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 실체’라고 했다. ‘비물질’은 물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정신 또는 마음이다. ‘실체’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영혼을 변하지 않는 마음이 육체에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변하지 않는 마음이라니 종자와 참 닮았다. 종자는 아뢰야식에 저장된 경향성이고, 이 경향성은 한번 저장되면 전의(轉依)되기 전까지는 바뀌지 않는다고 했다. 종자는 7전식으로 현현되면 구체적인 마음작용(心所)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종자는 변하지 않고 반복하는 마음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 찰나에 ‘분노’라는 마음작용이 일어나면 이 마음작용은 인과 연에 의해 후 찰나에 ‘분노’라는 마음작용을 다시 일으킨다. ‘분노’의 상속. ‘분노’의 반복. 이즈음 해서 아뢰야식을 얘기할 때 왜 영혼을 얘기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혼은 ‘나’라는 분별에 의해 형성된 개체화된 마음에 붙인 이름이다.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며 연기적으로 흘러간다. ‘분노’조차 연기적 흐름의 하나이다. 그런데 그 연기적 흐름 속에서 ‘나’라는 마음을 실체화한 후 모든 마음작용을 그것을 중심으로 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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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며 연기적으로 흘러간다. ‘분노’조차 연기적 흐름의 하나이다. 그런데 그 연기적 흐름 속에서 ‘나’라는 마음을 실체화한 후 모든 마음작용을 그것을 중심으로 보는 것.

다음 생(生)은 어떻게 결정될까?

이것이 영혼의 의미라면 우리는 세세생생 윤회하는 것이 맞다. 전 찰나와 후 찰나로 ‘나’라는 분별을 상속하며, 다른 세상 다른 경험 속에서도, 같은 나 같은 마음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정화스님은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에서 윤회를 ‘아(我)와 법(法)에 의한 잘못된 기억과 상속’이라고 했다. 잘못된 기억과 상속이니 깨달은 부처에겐 윤회가 없다. ‘나’라는 분별이 없는데 어떻게 ‘나’의 윤회가 있겠는가. 하지만 중생의 입장에선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부처와 중생은 따로 없다지만, 그래도 깨닫기 전엔 중생이다. 그러니 윤회 얘기가 나왔으니 다음 생은 어떻게 결정되는지가 궁금하다.

불교에는 ‘육도윤회(六道輪廻)’라는 말이 있다. 살아생전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에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간도, 천상도의 여섯 개의 세계 중 하나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여섯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며 끊임없이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것을 ‘육도윤회’라고 한다. 육도윤회에서 주로 언급되는 종자는 업종자이다. 명언종자는 분별의 종자이므로 모든 것을 분별하기만 한다. 그런데 업종자는 그 분별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관계되는 종자이다. 선한 행위를 하느냐 악(불선)한 행위를 하느냐. 아뢰야식에 선한 업종자가 많으면 선한 행위를 할 경향성이 높고, 아뢰야식에 악한 업종자가 많으면 악한 행위를 할 경향성이 높다. 다음 생에 육도(六道) 중 어떤 세상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선악의 경향성’인 업종자가 어떠하냐에 따라 달라진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간단하다. 선한 행위를 많이 하면 그에 맞는 세상에 태어나고, 악한 행위를 많이 하면 또 그에 맞는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육도 중 가장 낮은 그러니까 불선한 행위를 많이 할 때 태어나는 곳(?)이 지옥이다. 그리고 선한 행위를 많이 할 때 태어나는 곳은 천상이다. 같은 세계에 태어났다는 것은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업의 형태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같은 인간계에 있는 것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종자 중 공통된 업(共業)이 많기 때문이다.

육도윤회의 원리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수많은 종자를 공유하기 때문에 같은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공(共)종자라고 하는데, 아뢰야식에 같은 종자가 많으니 같은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저 하늘이 보이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최소한 같은 하늘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같은 종자를 공유하고 있다. 저 땅도 보이는가? 그렇다면 같은 땅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같은 종자를 공유하고 있다. 코로나가 세계를 흔들고 있는 소식을 듣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소식을 듣고 알 정도로 같은 종자를 공유하고 있다. 이 세계를 이 모양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할 수 있는 것은 그 모양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할 수 있는 종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共)종자가 하나도 없다면, 각자 다른 세상, 그야말로 유아독존인 세상을 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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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를 이 모양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할 수 있는 것은 그 모양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할 수 있는 종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식의 공종자 개념은 아주 매력적이다. 공종자 덕분에 우리는 같은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공종자 덕분에 한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이 그 한사람의 생각, 행동에 그치지 않고 세상 전체로 연결되는 생각이나 행동이 될 수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2천500여년을 거쳐 지금 여기로 전해지는 것도 수많은 제자들의 마음, 경전 등의 노력덕분이기도 하지만 부처님 아뢰야식의 공종자를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덕분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도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오늘 하루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는가하는 문제는 나 한사람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나의 깨달음은 나만의 깨달음이 아닐 수도 있다.

다시 윤회

여기서 ‘태어난다(生)’는 의미를 잘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태어난다’라고 하면 어머니 몸을 빌어서 태어나는 것만을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무시(無始)이래란 말이 있다. 무시란 ‘시작이 없는’이란 뜻이다. 이것을 두고 아득한 옛날, 몇몇 억겁 전일지도 모르는 아득한 시간을 의미한다고도 하지만, 사실 무시는 전 찰나와 인과로 연결되지 않는 매 찰나를 의미한다. 매 찰나는 전 찰나와 중중첩첩 의존하여 일어나는 찰나이다. 하지만 의존해서 일어난다고 해서 바로 전의 인(因)이 시간적 상속에 의해 바로 후의 과(果)를 만든다는 것은 아니다. 바로 전의 마음과 바로 후의 마음이 연결되어 인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공(時空)이 연결되어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분별의 경향성 때문에 생기는 착각이다. 그러니 무시는 전 찰나와 후 찰나를 시간적으로 연결하여 보지 않는, 즉 생하고 생하는 매 순간을 의미한다. 전 찰나의 인(因)이 후 찰나의 과(果)로 이어지지 않는(인과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매순간의 생생함. 그 생생한 마음으로 살 때를 무시(無始)라 한다. 모든 시작(始)은 끝(終)을 포함하는 말(시간의 상속)인데 매 찰나는 오직 생하고 생함만이 있으니 시작이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부처님이 살고 있는 세상, 깨달은 자의 세상은 늘 무시이지 않을까싶다. 매순간이 전 순간과 중중첩첩 연기로 이어지지만 인에서 과로는 상속되지 않는 시간들의 세상. 매순간이 그 전의 인을 상속하여 얻은 과가 아닌 그저 생(生)하고 생(生)하는 세상.

어쨌든 이런 태어남을 생각해보면 윤회는 바로 매순간의 마음에서 결정된다. 무시이래 하나의 마음이 생겼다. (이 하나의 마음은 무명(無明)에 의해 생성된 마음이다. 무명은 밝게 알지 못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이 아뢰야식에 종자로 저장되고, 그 종자가 전의되지 않은 채 하나의 경향성으로 작용하여 그 경향성에 맞는 세상을 현현시켰다. 그리고 그것의 반복. 그것이 윤회라고 했다. 우리는 태어나고 죽음과 같은 생과 사의 영역에서도 윤회를 하지만(일기윤회(一期輪迴)) 매순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도 윤회한다(찰나윤회). 생사의 윤회와 매순간의 윤회.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같다. 같은 마음의 반복이 크게는 생사의 윤회를, 작게는 매순간의 윤회를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바로 전과 같은 마음의 반복은 바로 후에 같은 삶을 살도록 하고, 어제와 같은 마음의 반복은 어제와 같은 오늘의 삶을 살도록 하고, 이번 생의 마음의 반복은 다음 생에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살도록 한다. 그러니 지금의 마음은 어쩌면 바로 전생, 또는 그 전전생, 또는 그 전전전생부터 시작(始)한 마음의 반복일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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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마음은 어쩌면 바로 전생, 또는 그 전전생, 또는 그 전전전생부터 시작(始)한 마음의 반복일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윤회는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도록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살아진다는 말을 멋있게 생각한 적도 있는데, 윤회의 원리를 공부해보니 살아지는 것은 습대로 산다는 말이다. 매 순간 생생(生生)하지 않고 전 찰나의 마음으로 살아지도록 하는 것. 이 깊고도 끈질긴 마음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다. 유식은 그 마음에서의 묶임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 그 길을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있는데, 그 시작을 위해선 식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번 연재에선 근본식인 아뢰야식을 윤회와 연관해서 이야기했지만, 다음 연재에서는 말나식 즉 나에 대한 환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뢰야식과 윤회’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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