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영(남산강학원 동고동락)

맹자 B : 마음 읽어주는 세심한 맹자

“제가 호흘에게 듣건대, 왕이 마루 위에 앉아 있는데 그 아래 소를 끌고 가는 자가 있었다지요. 왕 이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고 물으니 ‘흔종을 하러 간다’고 대답하였고, 왕은 ‘풀어주어라! 소가 부 들부들 떨며 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꼴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라고 하셨답니다. 그러자 ‘흔종의 예 를 폐지할까요?’라고 되물으니 왕께선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양으로 바꿔 쓰도록 하라!’고 하였 다는데, 알진 못하겠습니다만 이런 일이 있었던가요?” 

선왕이 말했다. 

“그런 적이 있습니다.” 

맹자가 말했다. 

“이런 ‘마음’이라면 왕도를 시행하기에 충분합니다. 백성은 ‘왕이 소가 아까워서 양으로 바꾸라고 했 다’고들 한다지만, 저는 왕의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 때문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양혜왕」 (상); 『맹자, 마음의 정치학 1』, 배병삼 옮기고 풀어 씀, 사계절, 114쪽

여기 또 한 명의 맹자가 있다. 그가 제선왕을 만났다. 하루는 제선왕이 마루에 앉아 있는데 흔종(釁鐘) 의식을 위해 소가 끌려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흔종’은 새로 주조한 종의 틈새에 동물의 피를 묻히는 의식이다. 불쌍하다고 흔종 의식을 없앨 수는 없다. 양으로 바꾸라 명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양은 불쌍하지 않은가? 백성들은 왕이 쩨쩨하다, 소가 아까워서 작은 동물인 양으로 바꾸라 했다며 수군거린다. 이 말을 들은 제선왕. 어? 그게 아닌데? 그렇지만 자신도 왜 그리했는지 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제선왕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이 마음을 맹자가 이해하고 설명해준다. 맹자는 제선왕에게서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읽었다. 그건 죽으러 가는 소를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든 생명의 위기 앞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 그렇다면 양은? 그것은 양이 불쌍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죽으러 끌려가는 소는 보았고 양은 아직 눈앞에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지 않았다는 건 아직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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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제선왕에게서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읽었다. 그건 죽으러 가는 소를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맹자는 이 마음을 알고 있다. 그는 여러 나라를 오가며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도했다. 그때 일어났던 마음과 같다. 500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은 날로 참혹해졌다. 기아로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 헤어진 가족들의 슬픔, 남은 가족들의 고통. 이들을 바라보는 맹자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맹자는 마음을 근거로 ‘인의로 다스리는 정치(仁政)=왕도(王道)’를 제안한다. 제선왕을 만나고 있는 이때의 맹자는 양혜왕을 만날 때의 맹자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마음으로 설득하며 끝까지 섬세하게 상대를 이끌어 가겠다는 또 한 명의 맹자다. 부캐 맹자?^^ 제선왕은 이제 소를 봤을 때 일어난 마음을 사람에게로 확장시키기만 하면 된다. 왕도(王道)는 ‘이 마음’이어야 가능하다.

‘측은지심’은 인(仁)의 단서요, ‘부끄럽고 미워할 줄 아는 마음(수오지심, 羞惡之心)’은 의(義)의 단서다. B.C 4세기, 아무도 ‘마음’이라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때다. 맹자는 이 마음을 발견해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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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선왕은 이제 소를 봤을 때 일어난 마음을 사람에게로 확장시키기만 하면 된다. 왕도(王道)는 ‘이 마음’이어야 가능하다.

저 같은 속물도 가능할까요?

인의의 단서가 마음이라면 ‘마음대로’ 살면 될 것 같은데 왜 어려울까? 맹자가 제선왕에게 왕도를 기대했던 첫 번째 이유는 제나라가 갖고 있던 국력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제선왕의 솔직함이다.

왕도를 권하는 맹자에게 ‘제게 흠이 있으니 힘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재물을 좋아합니다…또 여색을 밝힙니다…’라고 고백하는 제선왕. 맹자는 왕도를 슬쩍 피해가려는 제선왕의 속셈을 알아차린다. 괜찮다고, 욕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걸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고 맹자는 제선왕을 설득한다. 맹자는 제선왕의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하고 일견 부추기면서, 살살 달래가듯이 왕도로 유인한다. 힘자랑 좋습니다. 재물 좋아하십시오. 여색 밝히시지요.

만일 왕께서도 한 번 성을 내시어 천하 백성을 편안케 한다면, 백성은 왕께서 용기를 좋아하지 않을 까 외려 걱정할 것입니다. 

「양혜왕」 (하), 같은 책, 171쪽

상대를 이기려 두 눈을 부릅뜨고 힘자랑하는 것은 한낱 필부들이 하는 ‘작은’ 용기에 지나지 않는다. 용기를 크게 내 봐라. 옛날 주나라 창업의 기틀을 마련한 성군이 있었다. 문왕이다. 그는 오랑캐들이 백성들을 괴롭히자 불끈 화를 냈다. 그렇게 한번 용기를 떨쳐 군사를 일으키자 오랑캐들이 벌벌 떨며 물러났다. 문왕의 ‘큰’ 용기는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용기란 이렇게 쓰는 것. 재물이나 여색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나에게 가두면 클 수가 없다.

‘덕’에 끌리다

현자인 다음에라야 이런 것을 즐길 수 있지 현자가 아니면 이런 것을 소유하더라도 즐길 수 없습니 다…(중략)…주나라 문왕께서 백성의 힘으로 누대를 짓고 호수를 만들었는데, 외려 백성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누대를 영대라 이름 짓고 호수를 영소라 이름 짓고서 그곳 순록, 사슴과 물고기, 자라들 을 보면서 다 함께 즐겼다는 말입니다. 

옛사람들은 여민해락, 곧 백성과 더불어 즐길 줄 아셨기에 자신도 즐길 수 있었다는 뜻이지요.

「양혜왕」 (상), 같은 책, 72~73쪽

이(利)가 ‘위민(爲民)’이라면 인의는 ‘여민(與民)’이다. 함께할 여(與), 백성 민(民). 여민은 ‘백성과 함께하는’ 삶을 말한다. 현대적 의미로는 더불어 사는 삶, 공생(共生)이다.

위민과 여민의 차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 하나. 주(周)나라 문왕은 사방 70리의 정원을 차지했는데도 백성들이 넓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이유는 백성들과 더불어 즐겼기 때문이다. 반면, 양혜왕의 정원은 40리밖에 안 됐는데 백성들이 넓다고 불평했다. 사람들의 출입과 사냥을 금하고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주문왕과 양혜왕은 ‘관계를 보는 틀’이 달랐다. 왕-신하는 계약관계다. 계약으로 맺어졌을 때에만 둘의 관계가 성립한다. 왕-백성은 계약관계가 아니다. 백성은 왕을 위해서 복무할 의무나 책임이 없다. 오히려 농사지은 소출로 세금을 내서 왕과 신하를 ‘먹여 살리는’ 존재다(feat. 배병삼, 『맹자, 마음의 정치학』). 백성은 살 곳과 왕을 스스로 선택하는 능동적인 존재였다.

이런 관계는 뭘로 이루어질까? 계약이 아닌 무엇이 이 둘을 이어줄까? 주문왕이 백성들과 정원을 함께하니, 백성들이 자기 일처럼 와서 일했다. 한 달 예정이었던 공사를 하루 만에 완성하고, 호수와 누대에 이름도 지어주고, 왕이 사냥하고 풍악을 즐기는 모습을 기뻐하며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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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왕이 백성들과 정원을 함께하니, 백성들이 자기 일처럼 와서 일했다.

억지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저절로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이건 그냥 끌려서다. 뭐에? 덕(德)에! 패도가 힘으로 다스리는 정치라면 왕도는 ‘덕의 힘’에 이끌리는 정치다. 양혜왕이 아무리 ‘위하여’ 시혜를 베풀어도 꼼짝 않던 백성들이 ‘덕’에는 저절로 이끌려 온다. 더불어 즐길 줄 아는 자가 현자다.

나이 들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변해야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의 허영, 거짓, 가식 등이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들이 정말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남들 눈에 맞추기 위한 것이라면, ‘허영’이다. 실제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면, ‘거짓’이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나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가식’이다. 전에는 적당히 그러면서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또 잘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칠 때도 많았는데 이젠 그런 모습이 눈에 띄고 보기 싫어진다.

이제부터 해야 되는 일이자 잘 나이 드는 방법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말과 행동이 나와 일치되도록 하기 위한 수련이자 공부에 있다. 주문왕의 정원에 사람들이 넘친 것은 정원을 개방하고 함께해서만은 아니다. 마음, 행동과 분리되지 않은 주문왕 그 사람이 바로 덕이었기 때문이다.

수십 대의 수레와 수백 명의 수행원이 맹자 뒤를 따랐다. 어떤 상황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똘끼 가득한 고집불통의 아이콘 맹자 A 그리고 타자의 마음을 섬세하고 진지하게 관찰하고 통찰하는, 마음 읽어주는 세심한 남자 맹자 B. 내게는 일견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두 명의 맹자가 번갈아, 혹은 따로, 때론 겹쳐서 보인다. 제자들은 그 덕(德)의 매력에 저도 모르게 이끌린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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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그 덕(德)의 매력에 저도 모르게 이끌린 것이 아니었을까?

고전을 통해 만나는 작가들의 철학과 삶,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들이 보여주는 덕은 이런 게 아닐까? 어떻게 저렇게 말하지, 어떻게 저렇게 생각하지, 어떻게 저렇게 쓰지, 어떻게 저렇게 살지? 앎과 삶이 일치하는 모습이 덕이다. 이끌리는 대로 사는 게 나의 노후대책이다. 나는 이렇게, 두 얼굴의 맹자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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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팽
이달팽
28 days ago

앎과 삶이 일치하는 모습이 덕이다. 이끌리는 대로 사는 게 나의 노후대책이다. !!
ㅠㅠ 샘 마지막 문장 너무 멋있어요ㅠㅠㅠ
‘덕’은 마냥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요렇게 풀릴 수 있는 것도 신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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