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약자가 살아가는 법 - 3)

근영(남산강학원)

# 데카당스, 쇠락한 생명력

데카당스는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예사조다. 그들은 전통적 가치와 도덕을 부정했다. 대신 그들이 빠져든 것은 관능적인 아름다움. 그것도 죽음을 상기시키는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그들의 작품에는 비도덕적인 것을 넘어 악마적인 세계가 넘쳐났고, 극단적으로 미를 탐닉하는 향락과 자기파괴적 인물들이 중심을 차지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어로 ‘쇠락, 퇴폐’를 뜻하는 ‘데카당스’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데카당스가 추구하던 퇴폐적인 미의 바탕에는 세기말 감성이 자리했다. 그들이 보기에 이 세계는 쇠락한 상태였다. 그들은 모든 것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고, 그 죽음에 매혹되었다. 데카당스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죽음 속에서 꽃을 피웠다. 죽음을 불러오는 사악하고 파괴적인 것들에 대한 예찬. 몰락의 미학화.

데카당스는 이처럼 끝을 향해 추락해가는 세계를 살았다. 그런 그들에게 삶이란 그다지 가치 있는 것일 수 없었다. 내일이면 끝날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뭐 그리 진지하게 삶의 의미 따위를 고민한단 말인가. 남은 생, 그냥 즐기면 그뿐. 데카당스는 그렇게 향락에 빠져들었다. 덧없는 세상, 내일은 없다(!), 는 듯 오늘을 불태우며 즐기는 삶. 한 마디로, ‘인생 별거 없어, 즐겨!’인 것이다.

데카당스는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것은 쇠락의 기운이 유럽을 감싸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이거야말로 앞뒤가 맞지 않는 현상이었다. 당시가 어떤 시대던가. 산업혁명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문명, 그 덕분에 맞이한 물질적 풍요. 진보의 꿈에 부풀어 하루하루를 지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웬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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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당스의 기이한 유행에는 필시 어떤 이유가 있을 터였다. 니체는 데카당스를 읽기 시작한다. 그것은 근대라는 시대의 민낯을 드러내 줄 하나의 징후였다. 물론 니체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데카당스에 주목했다. 하지만 니체는 그들과는 조금 다른 시선에서 문제를 바라봤다. 대부분이 거시적이고 사회학적인 현상으로 이를 분석하려 했다면, 니체는 데카당스라고 불리는 그 ‘사람들’에 눈을 맞추었다.

니체는 사회가 실제로 몰락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사회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 그러니 근본적인 것은 바로 그 사람들, 데카당스들일 터였다. 하여 니체는 묻는다. 한 세계를 쇠락한 것으로 보는 그 시선, 데카당스들의 그 눈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라고.

우리도 니체를 따라 한 번 생각해 보자. 어떤 경우에 세상이 어두침침하고 부정적으로 보일까. 기분이 좋을 때, 아니면 좋지 않을 때?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은 때다. 괴로운 일에 시달리고 있으면 세상이 온통 갑갑한 일들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내 마음이 느끼는 무게만큼이 세상의 무거움으로 다가오는 법. 우리는 그렇게 딱 우리 자신만큼 세상을 만난다.

데카당스도 마찬가지다. 이 세계가 망해가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지금 그들의 상태가 몹시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고통받고 있다. 아주 작은 일조차 그들에게는 깊은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을 스스로 해결할 힘도 없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세상이 버겁고, 해서 고통스럽고, 그럼에도 그것을 넘어설 기력이 없는 것. 한 마디로 생명력 바닥 상태. 데카당스, 소진된 생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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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여기에 있다. 세상이 버겁고, 해서 고통스럽고, 그럼에도 그것을 넘어설 기력이 없는 것. 한 마디로 생명력 바닥 상태. 데카당스, 소진된 생명력!

이처럼 생명력이 바닥을 치는 상태에서 만나는 세상. 그 세상 또한 자신들만큼이나 쇠락한 것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소진된 생명의 눈은 모든 것들 속에서 쇠락의 기운을 읽어내는 것이다. 하여 데카당스의 세기말적 시대 감성은 사회 그 자체보다는, 그들 자신의 상태를 훨씬 더 많이 표현하고 있다.

데카당스는 이 모든 것을 거꾸로 이야기한다. 만약 자신들의 생명력이 약화되어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 망조가 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니체는 단호히 말한다. 세상에 망조가 들었다는 것은 결코 원인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징후이자 결과. 뿌리는 데카당스의 병약함이다.

데카당스는 자신의 이 뿌리를 보지 못한다. 아니, 보려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병약한 생명력을 세상을 떠넘기며 합리화할 뿐이다. 삶의 가치를 생산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에게는 가치를 생산할 힘이 있다. 다만 이 세상이 썩어빠졌고, 해서 곧 몰락할 것이기에, 굳이 가치를 생산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하지만 이는 니체씨의 찰떡같은 비유대로, “그러한 자들은 식탁에 앉으며 아무것도, 왕성한 식욕조차 갖고 오지 않는다! 그러면서 “모든 것은 덧없다!”라고 비방하는 것이다.”

데카당스, 그들은 스스로 삶을 만들어갈 기력이 없을 뿐이다! 생명력의 소진, 자기 창조적인 힘의 퇴화. 죽어가는 건 세상이 아니라, 너다! 하지만 데카당스는 이 모든 것을 뒤집는다. 자신에게 가치 창조의 힘이 없으면서도 모든 가치를 보잘것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약자=데카당스다.

“나는 이제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소박하게 말하는 대신에 도덕의 거짓말은 데카당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삶은 무가치하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35, 박찬국 역, 아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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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당스는 이 모든 것을 뒤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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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민
소민
10 days ago

“하여 데카당스의 세기말적 시대 감성은 사회 그 자체보다는, 그들 자신의 상태를 훨씬 더 많이 표현하고 있다.” 성준이 요즘 스피노자를 공부하고 있는데 그분이 설명하는 신체의 설명과 비슷한 것 같아요..! 오오! 100년이 지나도 데카당의 모습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남탓, 상황탓하는 건 비슷한 것 같아요ㅜㅜ

이승현
이승현
7 days ago

약자이기때문에 세상이 망조가 들었다고 본다…음…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지?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제가 약자라고 생각했는데 최소한 식탁에 식욕은 들고 오네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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