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계(界)로 이루어진 세상

불교에서는 이 세상은 여러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세계’란 무엇일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세계’라 할 때 ‘세계’는 지구 위의 여러 나라들을 의미한다. ‘세계여행’, ‘세계일주’라고 할 때 그 세계. 그런데 불교에서 세계는 ‘계(界)’로 이루어진 세상(世)이다. 즉 경계(界)로 구분하여 나누어진 영역을 세계라고 한다. 지구 위의 여러 나라들도 경계로 구분하여 나누어져 있으니 그 점에서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는 훨씬 포괄적인 표현이다. ‘나(我)’가 ‘타(他)’와 경계로 나누어지면, ‘나’도 하나의 세계, ‘타’도 하나의 세계가 된다. ‘형상(色)’이 ‘소리(聲)’와 구분하여 나누어지면 ‘형상’도 하나의 세계 ‘소리’도 하나의 세계가 된다. 이와 똑같이 ‘소리’가 냄새(香)‘와 구분하여 나누어지면 ’소리‘도 하나의 세계 ‘냄새’도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냄새의 세계라니. 좀 이상하다. 하지만 불교의 계(界) 개념에 따르면 냄새는 소리나 형상과 분별하여 경계 지을 수 있으므로 하나의 세계가 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형상’은 형상 그 자체만으로는 세계가 아니다. 그건 그저 형상(色)이라고 할 뿐 세계라고는 하지 않는다. ‘세계(世界)’가 되려면, 형상(色)과 형상을 보는 눈(眼) 그리고 그것을 아는 마음인 식(眼識)이 함께 해야 한다. 즉 형상을 보고 분별할 수 있어야 비로소 형상이라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계(界)’는 다른 부류와 구별되는 유유상종하는 부류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구별은 분별의식, 즉 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계(界)는 외부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의 분별의식에 의해 구별된다.”(『중도, 그 핵심과 사상체계 붓다의 철학』 참조)

중생들의 분별의식에 의해 구별된 계(界). 이 대목에서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 다른 것과 구별되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꽃이 꽃을 보는 눈과 그것을 아는 마음에 의해 하나의 세계가 된 것. ‘형상’은 형상만으론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아는 마음’을 일으키는 순간, 비로소 ‘형상이라는 하나의 세계(色界)’가 된다. 그런데 이 하나의 세계(형상의 세계)가 생길 때, 하나만이 아니라 세 개의 세계가 동시에 탄생한다. 생각해보라. 유유상종으로 경계 지어지고 분별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세계라 했으니, ‘형상(色)’이 하나의 세계이면, 그 형상을 ‘보는 것(眼)’도 하나의 세계, 그리고 그것을 ‘아는 마음(眼識)’도 하나의 세계이지 않은가. 불교를 공부하면서 이 계(界)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참 어려웠다. 그런데 이해하고 보니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란 참 단순하고도 명쾌했다. 경계 지어 구분되어진 것과 그것을 아는 마음이 작용하면 모두 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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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삼라만상, 18계(界)

이렇게 하면 우주 삼라만상은 기본적으로 열여덟 세계로 나눌 수 있다. 보이는가? 그러면 ‘형상’을 ‘보며’ ‘아는’ 세계인 형상의 세계(色界), 형상을 보는 세계(眼界), 형상을 아는 세계(眼識界)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형상’과 ‘봄’ 그리고 ‘아는 마음’은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으니, 셋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지만 셋이라고 할 수 있다. ‘안식의 세계’에는 ‘안식’뿐만 아니라 ‘형상’과 ‘봄’이 포함되어 있고, ‘형상의 세계’에는 ‘형상’뿐만 아니라 ‘봄’과 ‘안식’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들리는가? 그러면 ‘소리’를 ‘듣고’, ‘아는’ 세계인 소리의 세계(聲界), 소리를 듣는 세계(耳界), 소리를 아는 세계(耳識界)에 있다. 냄새를 맡을 수 있는가? 그러면 ‘냄새’를 ‘맡고’, ‘아는’ 세계인 냄새의 세계(香界), 냄새를 맡는 세계(鼻界), 냄새를 아는 세계(鼻識界)에 있는 것이다. 맛이 느껴지는가? 그러면 ‘맛’을 ‘맛보며’, ‘아는’ 세계인 맛의 세계(味界), 맛을 보는 세계(舌界), 맛을 아는 세계(舌識界)에 있는 것이다. 감촉이 느껴지는가? 그러면 ‘감촉’을 ‘느끼며’, ‘아는’ 세계인 감촉의 세계(觸界), 감촉을 느끼는 세계(身界), 감촉을 아는 세계(身識界)에 있는 것이다. 생각하는가? 그러면 ‘대상’을 ‘분별’하여 ‘아는’ 세계인 의식의 대상인 세계(法界), 분별하는 세계(意界), 분별함을 아는 세계(意識界)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의 세계 개념은 단순하면서도 어리둥절하다. 부처님은 이 열여덟 개의 세계 말고는 다른 세계가 없다고 한다. 기존에 우리가 알던 세계의 개념과는 참 다르지만 이보다 더 명쾌할 순 없다. 우주엔 형상(色)이나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 분별의 대상(法) 말고 무엇이 더 있을 수 있나? 모든 것이 이 범위에 포함된다. 지구, 태양계, 은하계, 은하 중심 등등 아무리 멀리멀리 우주 끝까지 거리를 넓혀 살펴봐도 보인다는 건 모두 형상의 세계이다. 깊은 바다, 땅 속 등등 아무리 깊이깊이 살펴봐도 들리는 건 모두 소리의 세계에 속한다. 다만 각 중생의 보고 듣는 능력이 어느 범위냐에 따라 동물, 곤충, 인간 또는 다른 생명들이 보는 형상이나 소리가 다를 뿐.

친구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카페에 앉아있는 걸 상상해보자. 친구의 모습, 카페의 멋진 인테리어, 창밖의 구름 등등이 얼마나 멋지든 보이는 것인 이상 ‘형상의 세계’에 속한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커피 향은 그 향이 어떻든 ‘냄새의 세계’, 친구의 목소리는 ‘소리의 세계’, 혀끝에 닿는 커피 맛은 ‘맛의 세계’, 뜨거운 촉감은 ‘감촉의 세계’, 친구와의 대화 중 떠올리는 수많은 생각은 ‘대상의 세계’인 것이다. 하나의 시공간에 열여덟 세계가 중첩되어 ‘세상’을 만들고 있다. 이런 식으로 컵, 새소리, 구름, 커피 향, 지나가는 개, 차 소리, 햇살, 부처님, 은하계… 무엇이든 떠올려보라. 이 열여덟 세계에서 벗어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열여덟 세계(18界)는 전 우주 삼라만상이 속한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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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有根身), 세상을 만들다

유식은 우리의 마음을 여덟 개의 식(識)으로 나눈다고 했다. 제8식인 아뢰야식, 제7식인 말나식, 제6 의식 그리고 전오식(前五識)(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이다. 근본식인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나머지 식들을 현현시키는데, 말나식은 ‘나’와 ‘타’라는 근원적 분별의 마음을 생성하고, 전오식과 제6 의식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과 그 세상에 대한 해석을 만들어낸다. 아뢰야식은 가장 심층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심층의식’이라고 하는 반면, 전오식과 제6 의식은 우리 마음의 가장 표층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표층의식’이라고 한다. 심층과 표층 사이엔 ‘나’라는 기준으로 세상을 만들고 해석하는 말나식이 있다.

그런데 전오식과 제6 의식, 즉 표층의식은 어떻게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과 그 세상에 대한 해석을 만들어내는 걸까? 그걸 알려면 일단, 유식에서 우리 몸을 보는 시각부터 알아야 한다. 유식은 우리의 몸을 ‘오근신(五根身)’이라고 한다. 오근(五根)은 다섯 개의 뿌리(根)라는 뜻이고, 신(身)은 몸이다. 그러니까 다섯 개의 뿌리를 가진 몸이란 뜻이데, 이 다섯 개의 뿌리는 무엇일까? 바로 보고자 하는 마음의 욕망(眼根), 듣고자 하는 마음의 욕망(耳根), 냄새 맡고자 하는 마음의 욕망(鼻根), 맛보고자 하는 마음의 욕망(舌根), 접촉하고자 하는 마음의 욕망(身根)이다. 이 욕망들이 마치 나무의 뿌리처럼 깊이 새겨져있는 곳이 몸이라는 것. 몸을 미추(美醜)나 대소(大小) 등의 외형적인 모습이나, 건강이나 병 등의 생리적인 측면이 아닌 무언가를 보고 들으며 알려고 하는 욕망의 측면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참 신선하다. 어떻게 생기든 어떤 생리작용을 하던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는 것으로 외부 대상을 알고자하는 욕망이 있는 것이 몸이라는 것 아닌가. 여기서 잠깐! 그럼 알고자하는 욕망이 없는 몸은? 리얼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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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욕망들이 마치 나무의 뿌리처럼 깊이 새겨져있는 곳이 몸이라는 것.

‘알고자 하는 욕망’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 유식으로 해석하자면, 무엇을 알고자하느냐에 따라 그에 맞는 세상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몸이 ‘보는 것(眼)’으로 ‘알고자(眼識)’하면 ‘볼 수 있는 세상(色界)’을 만들고, 몸이 ‘듣는 것(耳)’으로 ‘알고자(耳識)’하면 ‘들을 수 있는 세상(聲界)’을 만든다. 앞 연재에서 ‘유식무경’을 얘기하며, 세상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고유한 모양을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식에 의해 현현된 것이라고 했다. 내 앞의 컵은 누가 보든 저 모양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통해 알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생명 중에서도 나처럼 가시광선을 통해 보고자하는 마음에 연(緣)해야 저렇게 보인다는 것. 그러니 저 컵은 내 몸의 ‘보는 것’으로 ‘알고자’하는 욕망이 현현시킨 것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다섯 개의 뿌리를 가진 몸은 볼 수 있는 세계(色界), 들을 수 있는 세계(聲界), 냄새 맡을 수 있는 세계(香界), 맛 볼 수 있는 세계(味界), 감촉할 수 있는 세계(觸界)인 이 세상을 창조하는 기본적 통로이다. 즉 이 세상은 철저히 우리 몸이 감각할 수 있는 세계로만 구성되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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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민
소민
7 days ago

보고 “싶어하고”, 듣고 “싶어하고”, 냄새를 맡고 “싶어하는” 등등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것이 몸이라는 것이군요! 간단 명료하네요^^

처음에 쓱 읽다가 ‘알고자 하는 욕망’이 어디에서 나오는거지?라는 의문이 들어 다시 살펴보니 원래 우리의 몸 자체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싶어한다는 것,
즉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신기하고도 재밌어요~ 

그런데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까요?
현숙샘 말대로 ‘좀비’일까요?ㅎㅎ
아니면 어떤 것을 욕망하는지 모르는 채 살고 있는 걸까요?
앞으로의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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