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사방이 막힌 방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 묻다. -2)

김석영 (남산강학원 청년스폐셜)

이게 진짜일 리 없어~

나에겐 헤어지고도 오랫동안 잊지 못했던 연인이 있었다. 20대 초반에 2년 반 정도 만났던 사람인데, 내가 그를 잊는 데에는 우리가 만났던 시간의 두 배가 걸렸다. 작열하던 연애의 후폭풍은 상당히 길었다. 우리는 후덥한 여름날 바닷가 근처에서 헤어졌다. 상대가 이별을 말해오면 미련 없이 떠나주는 게 사랑이라는 신념 아닌 신념을 갖고 있던 나는 그가 이별을 말해온 당일에는 쿨 하게 그를 택시 태워 보냈다. 그리고 이틀 뒤 응답 없는 그의 핸드폰에 십 수 통의 부재중 전화를 남겼다. 제발 전화 한 번만 받아달라는 문자도 함께. 그는 지금은 그럴 수 없다며 문자로 나를 달랬다.

나는 그 시기, 살면서 처음이자 아직까지 마지막으로, 밥 먹을 맘이 나지 않아 끼니를 거르고 멍하니 학교 순환 버스를 타고 몇 바퀴씩 돌곤 했다. 힘이 없어 버스에서 내리기가 힘들었다. 6개월쯤 뒤 겨울에는 혼자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엉엉 울다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냐고 묻는 주인아저씨에게 그렇다고, 6개월 전에 헤어졌다고 말해 그를 당황케 했다. 여기까진 그저 웃기게 봐줄 수 있다. 3~4년 차(?) 되면서 부터는 차츰 친구들에게 그의 이름을 언급하기도 안부를 묻기도 민망해져갔다. 하지만 내 안의 그는 희미해지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이 이별을 정말로 믿을 수 없었다. 당시에는 그도 나를 그리워할 거라고,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내게 운명으로 엮인, 나와 꼭 맞는 반쪽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있는가? 운명의 짝이 헤어지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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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수상하다

그와의 이별을 기점으로 1~2년 사이, 내겐 참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퇴사를 하고, 상경을 하고, 다른 일에 도전하고, 접었고, 마음껏 방황했다. 그러다 뜬금없이 지금 내가 발 걸치고 있는 이곳 공부공동체를 만났다.

여기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들을 참 많이 보았다. 수녀원 다녀온 이야기, 사기당한 이야기, 사업 망한 이야기 등등. 뭐라 묶을 수도 없고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평생 들어보지 못했을 이야기들을 들었다.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평생 서로 보지 못했을 것 같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글쓰기 공부를 하고 있다. 이곳 글쓰기엔 특징이 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어떤 일이든 결국에는 아주 재미난 이야기로 만들어버린다는 거다. 이게 내 마음을 흔들었다.

여길 계속 왔다 갔다 어슬렁거리며 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그가 계속 생각나긴 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 의심이 올라왔다. 이제껏 나는 상처받은 영혼이며, 완벽한 반쪽을 잃은 슬픔은 평생 쥐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한데 이 ‘슬픔’이라는 감정이 어딘가 수상해졌다. 어쩌면 바꿔볼 수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섬주섬 주워 읽은 어떤 철학서도, 또 이곳에서 공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중 누구도 “슬퍼해라! 슬퍼하며 살아라!” 라고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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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한 짐작이 가능했다. 내 생각의 어딘가가 꼬여있어서 내가 슬픔의 감정을 반복하는구나. 그를 잊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종종 ‘잊는다는 건 또 뭔지? 아예 까먹는 게 가능하진 않을 텐데’라는 의문을 품어왔는데, 의문이 풀렸다. 그를 떠올리면 미소가 나는 것도, 벅차오르는 것도, 고마운 것도 아니고 슬프다는 거, 이것이 ‘못 잊는다’ 였다! 만약 그가 일말의 틈도 없는 내 반쪽, 내가 놓쳐서는 안 됐을 나의 유일한 운명이었다면 나는 평생 슬프게 사는 게 맞을 것이다. 존재의 반쪽을 잃어버리다니. 이 얼마나 큰 결핍인가! 얼마나 안타까운가! 하지만 어째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은 저 파란만장한 스토리들도 하나의 웃음과 삶의 관점을 전환시킬 사건으로 가져가는데, 나의 이별만 이렇게 비참할 수가 있나? 그럴 리가. 그렇다면 정답은 하나다. 그는 내 운명의 반쪽이 아니라는 것……?

너는 왜 내 운명?

잠깐. 방향을 잡고 가자. ‘운명 따위 없어~ 운명의 짝도 없어~’라고 말하기는 싫다. 그럼 그와의 만남을 아무것도 아닌, 부질없는 것으로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다만 그와의 만남과 이별을 어떻게 가져갈지가 문제다.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는 일로 만들 수 있는지, 그 만남과 이별을 통해 내 어떤 시선을 전환시킬 수 있는지.

우선 운명의 반쪽이란 말을 좀 들여다보자. 그는 왜 내게 운명의 반쪽처럼 느껴졌는가? 그는 온전한 내 모습을 다 알아주고 품어주는 사람 같았다. 온전한 내 모습이라는 게 뭘까? 나는 뭐가 참 좋았다 싫었다 감정기복이 심했다. 그 사람에게도 그랬다. 좋아할 땐 푹 빠져있고, 싫어할 땐 맘을 딱 닫아버리고. 나는 그걸 상대에게 진실한 것, 간사하지 않은 것이라 느꼈다. 얼굴만 봐도 꿈뻑 죽다가도 삐지면 침묵하고, 화나면 폰을 끄고. 그런 나에게 언제나 그는 돌아가면 그 자리에 있고, 돌아서면 뒤에 있고, 필요할 땐 옆에 있었다. 사람 맘이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지? 나는 흠뻑 사랑받는 것 같았다. 그러다 사랑이 끝나면? 이렇게 그에게 구걸하는 마음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구차함만이 아니다. 이정도야 눈 딱 감고 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뻔뻔하게도, 우습게도, 놀랍게도, 민망하게도, 그렇게 상대에게 요동치는 감정을 다 쏘는 내게도 답답함이라는 게 있었다. 나는 마음이 뜨거우면 그걸 다 표현하고, 사랑이 식으면 또 그걸 다 표현해왔다. 내 행동은 당연히 내 다음 행보를 보여준다. 이 말은 즉슨 나는 내 요동치는 감정을 가지고 이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할지 말지를 매 순간 가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상대가 내 운명의 상대라 느껴질 때는 우리가 평생을, 아니 다음 생까지 갈 거라 느끼며 내 온 에너지를 다 쏟고 그게 아닌 것 같으면, 서로 에너지 낭비하지 말자며 최대 절전모드로 들어갔다. 마치 철문을 쾅 내리듯 마음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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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감정을 따라 인생의 행로가 오락가락하니 환장할 노릇이다. 내 마음이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 것이 나는 답답했다. 나에겐 이 마음을 어떻게 좀 다르게 써보려는, 전제를 검토해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좋으면 취하고 싫으면 버리고, 좋으면 달려가고 싫으면 도망가고, 그게 다였다. 그리고 그는 이런 나를 제자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 오락 가락이 이 사람에겐 괜찮은 줄만 알았다. 그래서 내가 나를 바꿀 필요가 없는 상대. 우리는 이런 걸 ‘운명의 반쪽’이라 부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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