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알고자 하는 욕망이 다르다는 것

몸을 ‘미추’나 ‘대소’의 외형적인 측면이나 ‘건강’이나 ‘질병’의 생리적 측면으로 보지 않고 ‘알고자 하는 욕망의 뿌리(根)’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본다는 불교적 시각은 신선하다. 이 ‘알고자 하는 욕망의 뿌리’는 실제 몸에서는 눈(眼), 귀(耳), 코(鼻), 혀(舌), 감각의 몸(身)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식은 보는 것으로 알고자하는 욕망, 즉 보는 것으로 ‘분별하여’ 알고자 하는 마음이 아뢰야식에 종자로 있기 때문에, 눈이 생긴 것이라고 한다. 눈은 ‘봄’으로써 분별하여 알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 이를 잘 생각해보면 재밌는 결론에 도달한다. 알고자 하는 욕망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몸의 형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하, ‘前五識’이라 한다.)을 가진 생명체라 할지라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듣고자 하느냐에 따라 몸의 형태가 다를 수 있다는 것.

전오식을 통해 세상을 알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몸(有根身)과 전오식으로 인식한 것을 ‘생각’하고 ‘추리’하여(제6 의식) 종합 해석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전오식과 제6 의식이 세상을 구성하는 방식이 비슷한 존재들이 같은 ‘인간’이라는 모습으로 현현한 것. 그런데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포유류도 우리와 같이 눈, 귀, 코, 혀, 감각의 몸(眼,耳,鼻,舌,身)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그들 나름의 생각과 추리(意)로 세계를 종합 해석한다. 그들도 전오식과 제6 의식을 사용하여 세상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같다. 그런데 그들과 우리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개는 생각하고 추리하는 능력은 인간보다 떨어지지만 냄새 맡는 기능은 더 뛰어나다. 반면, 새는 인간보다 소리를 듣는 기능이 더 뛰어나다. 이 말은 개는 냄새로 외부 세상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크다는 것이고, 새는 소리로 외부 세상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알고자 하는 욕망이 다르다는 것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분별의 종자가 다르다는 것이다. 분별의 종자가 다르면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현현한 세상이 다르다. 개는 코를 박고 냄새로 분별하는 자신들의 세상을 현현하고, 새는 소리로 분별하는 자신들의 세상을 현현하고, 인간은 머리를 들고 천지의 원리를 사유하며 저들과는 다른 세상을 현현한다. 사람도 개도 새도 모두 보는 것과 듣는 것 그리고 냄새 맡는 것 등으로 세상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이 점에서는 같은 업(共業)을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알고자 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각각 다르게 생겼다. 이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알고자 하는지에 따라 다음 우리의 모습이 결정된다는 의미기도 하다. 내가 지금 알고자 하는 마음의 형태가 나의 미래의 모습이 된다는 것. 알고자 하는 욕망이 무엇이냐에 따라 존재의 모습이 다르게 현현될 수 있다는 유식의 통찰은 놀랍고도 재밌다. 이 통찰은 나는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알고 싶어 하고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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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자 하는 욕망이 무엇이냐에 따라 존재의 모습이 다르게 현현될 수 있다는 유식의 통찰은 놀랍고도 재밌다.

식의 현현은 세계의 탄생

전오식(前五識)은 앞(前)에서 알고자 하는 다섯 개의 식(五識)이다. 심층의식인 아뢰야식이 변하여(轉) 만들어진 식인데, 최전방(앞에서)에서 외부 대상을 분별하여 아는 마음이기 때문에 전(前)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들에 의해 형상(色)의 세계, 소리(聲)의 세계, 냄새(香)의 세계, 맛(味)의 세계, 감촉(觸)의 세계가 현현된다.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뢰야식에서 전변한 식(識)이 거기에 맞는 세계를 현현시키는 것이다.

여덟 개의 식(전오식, 제6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에 각각 이름이 있기도 하지만 안식(眼識)부터 아뢰야식까지 차례대로 1식, 2식, 3식, 4식, 5식, 6식, 7식, 8식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가장 거친 식에서 미세한 식 순으로 순서를 매긴 것이다. 안식이 ‘1식’이라는 것은 안식이 가장 거친 식이기 때문이다. 가장 거칠다는 의미는 뭘까? 식(自證分)은 자신이 현현한 세계(相分)를 자신이 인식하는(見分) 것으로 자신의 세계를 안다. (“오직 식만 있고, 세상은 없다!?” 연재 참조) 예컨대 안식(自證分)은 자신이 현현한 형상의 세계(相分)를 눈(見分)을 통해(사실 눈 또한 안식이 형상으로 현현시킨 것이다) 안다. 자기가 현현한 세계를 알기 위해 자기를 주(主)와 객(客)으로 분화시키는 식. 거친 식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아는 이런 인식이 다른 식보다 쉽게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닐까. 소리나 냄새, 맛, 감촉은 그것들을 인식하려면 좀 더 섬세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디를 보든 형상으로 가득 차 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형상은 언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최근에 『달라이라마, 죽음을 말하다』를 읽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지에 대해 다룬 책이다. 이 책에 의하면, 죽을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식은 안식이라고 한다. “첫째 단계: 흙의 요소들이 물의 요소들로 해체되고 퇴화한다. (…) 몸의 생기와 윤기가 급작스럽게 감소 되고, 점점 거칠어진다. 시야가 어두침침해지고 자신의 의지로 눈을 감거나 뜰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달라이라마, 죽음을 말하다』 p152) 가장 먼저 눈이 보이지 않게 되고, 그다음 귀가 들리지 않게 되고, 그다음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고, 그다음 혀가 말려들어 간다. 죽을 때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순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가장 거친 형상(色)의 세계가 먼저 허물어지고, 그다음 형상보다는 덜 거친 소리(聲)의 세계가 허물어지고, 냄새의 세계가 무너지고, 맛의 세계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전오식이 현현시킨 세계가 하나씩 사라지는 과정이 우리가 겪는 죽음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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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은 죽음의 과정이 반대로 진행된다. 가장 미세한 식(근본식, 8식)인 아뢰야식에서 처음으로 ‘나’를 사량하는 마음인 7식이 현현되면, 생각하고 사유하는 6식, 감촉의 5식, 맛의 4식, 냄새의 3식, 소리의 2식, 형상의 1식 순으로 거기에 맞는 세계가 현현된다. ‘나’라는 분별을 시작으로, 생각과 사유, 감촉, 맛, 냄새, 소리, 형상의 세계가 차례대로 현현되는 것이 탄생인 것이다. 이에 의하면 갓난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눈을 뜨는 사건은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 형상(色)을 현현시키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눈을 뜸으로써 자신이 살게 될 세상에 화룡점정(畵龍點睛)하는 갓난아이. 인간은 눈을 뜨는 것으로 자신의 세계를 완성한 후, 죽음의 순간 눈을 감는 것으로 그 세계들을 무너뜨린다. 이 모든 과정에 식이 함께 한다. 식이 현현됨과 함께 세계는 탄생하고, 식이 사라짐과 함께 세계는 허물어진다.

세계, 의미를 입다

전오식과 함께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의 세계가 현현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것들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전오식으로만 구성된다면 형상은 있으나 의미를 모르고, 소리가 있으나 고요하다. 세상은 무엇인지 모르는 형상과 소리만이 적막하게 일어났다 사라졌다 할 뿐이다. 전오식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세계를 현현시켰지만, 그 세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는 제6 의식(第6 意識)에 의해 해석된다. 우리 앞에 꽃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눈이 형상을 보고, 귀가 움직임을 듣고, 코가 냄새를 맡고, 혀가 맛보고, 몸의 감각으로 감촉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꽃인지 어떻게 알까? 앞에 있는 것이 ‘꽃’인지 알려면, 형상과 냄새, 맛, 촉감을 종합하여 ‘꽃’이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전오식이 인식한 것을 ‘어떤 모양’, ‘어떤 소리’, ‘어떤 냄새’, ‘어떤 맛’, ‘어떤 감촉’으로 받아들여(受) ‘어떤 것(法)’이라고 생각(想)할 수 있는 것은 제6 의식이다. 전오식이 현현한 적막한 세계는 제6 의식에 의해 수많은 의미가 부여된다. 무엇인지 모르는 형상과 소리 등만이 일어났다 사라질 뿐인 세상은 수많은 의미와 함께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전오식과 제6 의식을 합하여 ‘표층의식’(앞 연재 참조)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우리 의식의 표층에서 늘 작용하면서 사물과 사건을 인식하여 분별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유식에서는 전오식과 제6 의식의 이런 기능을 요별경식(了別境識)이라고 한다. 대상의 경계를 분별하여 아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제6 의식은 전오식과 함께 작용하며 대상을 분별하기도(受와 想이 함께 작용) 하지만, 때로는 대상과 전혀 상관없이 분별 작용(想만의 작용)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꽃의 예처럼, 어떤 대상을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접촉하는 등 다섯 감각이 하나 또는 여럿이 함께 작용하여 이미지나 생각을 떠올리며 대상을 분별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대상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이미지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도 한다. 앞의 경우를 전오식과 함께 일어나는 의식이라고 하여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고 하고, 뒤의 경우를 전오식과 함께 일어나지 않는 의식이라고 하여 불구의식(不俱意識)이라고 한다. 명상 중에 발생하는 삼매나, 잠잘 때의 꿈, 상상이나 환상, 몽상과 같이 본 적도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떠올리는 것은 불구의식의 활동이다. 제6 의식은 우리가 생각하고 사유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것이라고 봐도 별 무리가 없다. 전오식이 만든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의 세계에 그것이 ‘무엇(法)’이라는 이미지(象)를 입히며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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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실재하는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며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전오식과 제6 의식인 표층의식이 현현한 것이다. 표층의식은 아뢰야식의 종자가 전변한 것이니 세상은 아뢰야식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지 모르는 ‘움직임’만이 있는 세상에서,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이라는 세계를 현현시키고, 그 위에 ‘무엇’이라는 이미지와 의미를 입히며 존재하고 있는 세상.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다.

우리는 세상이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유식에 의하면, 이 세상은 우리의 식이 현현한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식으로 세상을 현현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세상은 나의 안식이 현현한 세상이다. 내가 지금 듣는 세상은 나의 이식이 현현한 세상이다. 내가 지금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의미 부여한 것 또한 나의 제6 의식이 현현한 세상이다. 세상은 실재하는가? 아니다. 세상은 식과 함께 변하고, 식은 세상과 함께 변할 뿐이다. 그러나 아뢰야식의 종자로 저장되어 있는 ‘분별의 앎’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늘, 언제나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실재한다. 존재의 앎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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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뢰야식의 종자로 저장되어 있는 ‘분별의 앎’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늘, 언제나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실재한다. 존재의 앎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 아뢰야식부터 전오식까지 여덟 개의 식이 어떻게 세상을 현현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다음 연재부터는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 속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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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이승현
2 months ago

정복 샘의 생생동의보감을 편집하고 엠비큐 들어온 김에 글이나 봐야지…
싶어서 샘 글을 클릭했습니다. 사실 유식 글 처음보고 뒤로가기를 누르면서 다신
볼 생각 없었거든요. 근데 이상하게 오늘은 또 도전해보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들어왔는데…존재의 앎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니…

늘 무슨소린지도 모르겠는 고전들과 늘 같은 일의 반복인 일상, 늘 같은 일터, 무슨 얘긴지 집중하지 못 하겠는 회의와 친구들의 글들. 항상 집중하지 못 하는 저를 자책했는데, 존재의 앎이 바뀌면 이런 것들이 새롭게 보일까요?

어렵겠지만 정주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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