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약자가 살아가는 법 - 3)

근영(남산강학원)

# 삶의 무정부주의

물론 데카당스에게도 부정과 파괴에 대한 그들만의 명분은 있다. 그것은 모두 자유를 위해서라는. 그들은 항변한다. 전통이든 도덕이든, 이렇게 해야만 한다, 저렇게 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삶에 어떤 형식을 요구하는 것은 억압이다. 무언가를 금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삶을 속박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유를 원한다면, 그런 형식이나 금기 따위는 던져 버려야 한다.

자유를 향한 몸부림, 모든 형식과 금지에 대한 거부. 그럴싸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역시 사이비 자유! 한 번만, 찬찬히, 생각해보자. 삶의 어떤 형식을 요구받는다면, 그 삶은 곧 억압당하는 것일까. 금지는 그 자체로 자유를 가로막는 족쇄인 걸까. ‘어떤’ 형식, ‘어떤’ 금지인지에 상관없이?

우리가 존재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자. 제한 없는 삶은 없다. 삶이란 어떤 면에서든 제한이 있는 법이고, 특정한 형식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왜냐고? 우리는 유한하니까! 우리 몸을 보라. 몸에는 그 형상을 이루는 경계가 있다. 그런 제한이 몸을 유지시키며 우리를 외부와 구별되는 존재로 만든다.

일상의 삶 또한 언제나 특정 조건들 위에 서 있다. 낮이라는 테두리, 밤이라는 테두리, 혹은 집이라는 경계, 학교라는 경계, 혹은 식사를 하는 시간, 운동을 하는 시간 등등. 우리는 한정된 시공간을 통해 살아가며, 하나의 형식을 갖고 존재한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게 되어 있다. 아니, 그렇게만 살아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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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범위를 좁혀 볼까. 각자 자신의 삶을 보자. 거기에서도 경계와 형식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저마다 가진 삶의 패턴, 우리가 흔히 ‘습관’이라 부르는 그것. 바로 이 일정한 형식이 우리의 하루하루가 굴러가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삶은 어떤 제한을 통해, 제한 덕분에, 일정한 형식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런 형식이야말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다. 그러니 아무런 형식과 금지도 없길 바란다는 것, 요컨대 “삶의 무정부주의” 같은 말은 그야말로 완전한 환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환상에 종종 빠져든다. 왜일까? 그 이유는 습관이라는 놈이 가진 재미난 성질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자신에게 습관화된 것들은 더없이 쉬운 일로 다가온다. 아니, 지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바로 이 때문에! 나에게는 너무도 익숙해 걸리는 것이 없다는 그 이유 때문에! 습관이 된 형식들과 제한들은 족쇄로 여겨지지 않는다. 반면, 어떤 것이 무턱대고 족쇄처럼 다가온다면? 그것은 그 형식이 아직 습관화되지 않은 패턴이라는 소리다.

그러니까 습관의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항상 족쇄를 차고 있다. 단지 각자의 그 족쇄를 족쇄로 느끼느냐, 그렇지않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리고 이 차이는 자신에게 익숙한 정도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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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데카당스가 내세우는 무정부주의적 자유 뒤에 어떤 마음이 숨어 있는지. 어떤 형식이든, 제한이든 거부한다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러니까 그들은 ‘모든’ 형식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들이 거부하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어떤’ 형식이다. 자신에게 족쇄처럼 느껴지는 것들,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패턴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 한 마디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형식들인 거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내 맘대로 살고 싶다는 식으로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단지 내가 해왔던 방식대로 계속하고 싶다는 얘기일 뿐이므로. 거기서 내세우는 자유란 자기 패턴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없이 자기 패턴을 고수하겠다는 아집일 뿐이므로.

데카당스, 삶의 무정부주의는 이와 같은 아집의 발로다. 그들의 삶은 자신에게 고착되어 있다. 달리 느낄 줄도, 달리 볼 줄도, 달리 생각할 줄도 모르는 삶. 이런 것을 어떻게 자유라고 말할 수 있으랴. 그럼에도 데카당스는 이러한 무능력을 합리화하며 말하는 것이다. 모든 형식과 금지는 억압이라고.

데카당스가 내세우는 부정과 파괴는 바로 이 맥락 위에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패턴을 떠나는 게 싫다. 삶의 새로운 패턴으로 이행해가는 것은 수고스럽고 귀찮다. 하여 그들은 단지 부정과 파괴만을 반복한다. 한편으로는 감각적 쾌락을 위해 기존에 있던 금지의 장벽을 파괴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삶의 형식을 요구하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쳐내기. 그 어느 쪽에도 창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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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이것이 실상이다. 데카당스에게는 삶의 새로운 양식을 창조할 힘이 없다. 요컨대, 생명력이 소진되고 퇴화된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랴. 부정하고 파괴하는 일 말고는. 삶의 무정부주의, 그것은 저항정신도, 생명의 충만함도 아닌, 병약함의 증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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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민
소민
9 months ago

너무나 익숙해진 습관은 ‘족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곧 족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은 익숙한 패턴만을 극대화하길 원한다는 것이었네요!

습관을 예로 들어 이야기해주시니 확(!) 와닿았어요ㅎ
이제껏 제가 생각한 자유와 족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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