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사랑하라, 흐르게 함으로써 -1)

김석영 (남산강학원 청년스폐셜)

성숙하고 합리적인 개인들의 연애

내게는 늘 마음 한편에 멋진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 ‘멋짐’에는 그러한 희망 사항을 품은 수많은 사람 각각이 다양한 그림을 그려 넣을 텐데 내가 그린 그림은 이랬다. 인격적으로 성숙한 두 사람이 서로를 존경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그런 연애.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로 둘 사이에 서로의 인격을 존재하는 룰이 있고, 서로 그것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 둘째로 서로는 서로에게 언제나 성장할 수 있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주는 관계라는 것.

러시아의 문학가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건인가>의 주인공들의 연애는 내가 그리는 멋진 연애의 조건에 부합한다. 그 소설 속의 주인공 커플은 연애하며 한집에 산다. 하지만 각자의 방에서 산다. 서로 용무가 있을 땐 예의를 갖춰 옷을 차려입고 서로를 찾아간다. 똑똑똑 노크도 잊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방 사이에 응접실도 갖고 있는데 친구를 초대하고 싶으면 둘 모두가 동의가 된 상태여야 한다는 건 물론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늘 함께 고민하고 실행해나간다. 이런 연애를 한다는 건 내 삶이 항상 높은 이상, 옳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과 내가 뼛속까지 성숙하고 정갈하고 단정한 그런 멋진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일일 것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어야 그런 연애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애 같은 연애에 애가 탄다

하지만 소설 속 그들처럼 연인 사이에 선을, 절도와 격식을 지키는 건 쉬운 게 아니다. ‘love is blind’란 말이 있다. 사랑에 빠지면 연인의 단점이 안 보인다는, 혹은 사랑에 빠지면 연인밖에 안 보인다는 뜻으로 주로 쓰이는 문장이지만 나는 이것을 ‘사랑이라는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히면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라는 뜻으로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전에 고향인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비행기에서 의지와는 상관없이 앞줄에 앉은 두 남녀의 대화(?)를 들어야 했던 적이 있다. 대화라고 칭하기 어려울 정도로 듣기 민망한 싸움과 ‘꽁냥질’의 반복이었는데, 큰 소리를 낸 것은 아니지만 간간이 욕설까지 섞어가며 서로 윽박지르고 짜증을 내고 비난하다가 연유 없이(그들에겐 있었겠지만) 분위기가 전환되며 갑자기 서로 혀짧은 소리를 내고, 안기고, 뽀뽀를 해대는 것이었다! 내 눈엔 두 모습 다 그다지 보기 좋지 않았는데 그 둘을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추잡하다, 고 느껴졌다. ‘아, 성욕이란 것은 정말로 무서운 것이구나……. 저 사람들은 지금 자기가 뭐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 정말 ‘love is blind’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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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연인과의 관계에서 인정하기 싫은, 받아들이기 힘든 내 모습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런 걸 느끼면 멈칫, 한다. 가끔 삐지는 것이나 넘겨짚는 것 등 평소에도 고쳐야 할 내 성격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부분을 보는 것은 그나마 괜찮다.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내가 유치해진다고 느껴질 때다. <무엇을 할 건인가>에 나오는 커플처럼 성숙한 태도로 서로를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기는커녕 나의 연애에는 유치하고 뻔한 말장난, 칭얼거림, 감정적 의존과 호소 등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그걸 잘 못 느끼다가 자각을 할 때면 그럴 때면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며, 내가 이러려고 연애하는 게 아닌데……. 하고 자괴감이 든다. 흐트러짐 없이, 빈틈없이 생활하며 나날이 서로를 성장시키는 그런 연애를 하고 싶었는데, ‘이게 뭐 하는 거지?’ 싶은 것이다. 나날이 나아지며 발전적인 삶을 살며, 어떻게 하면 스스로 구원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데 말이다. 유치한 우리의 연애는 오히려 서로를 퇴화시키는 게 아닐까? 아,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연애만 하면 나는 또 이러고 있다!…….

말랑함과 딱딱함 조절하기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다!’와 ‘하지만 나는 또 이러고 있다!’의 반복만큼 지치는 반복이 있을까. 이런 순간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다르게 할까’를 고민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먼저 다른 작업을 한 번 하는 것이 낫다. ‘상황이 정말 그러한가’(몽테뉴)를 살펴보는 것이다.

연애든 직업이든 친구든 떠올릴 때,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하나의 서사나 작용으로만 이야기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 보았을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회사 욕을 하지만 사실은 회사가 없으면 어디서 무슨 재미로 살아갈까 싶기도 하고, 이 친구는 이런 면이 너무 싫은데 이상하게 얘가 있어 힘이 나는 것도 같다, 는 경우들.

이럴 때 우리는 주로 부정적인 감정을 크게 느끼고 쉽게 그 상황을 ‘극혐!’해버리곤 하는데, 싫은 감정에 소스라치며 무작정 이것들을 바꾸거나 버리려 하기보다는 여기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더 면밀히 볼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나도 모르게 반복하는 것은 그것의 어떤 면은 싫지만, 어떤 면은 좋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대체 뭘 그렇게 좋아하는 건지 들여다보자는 거다. 그럼 그걸 좀 다르게 써먹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단지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관찰하기 귀찮아 그냥 막 버려버리려 하는 바로 그 영역에, 삶에서 절대 함부로 버려선 안 될 무언가가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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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물어볼 수 있다. 서로 유치해지는 연애가 정말 우리의 퇴보일까? 그렇다면 왜 연인 사이는 이렇게 되기가 쉬울까? 그럼 연애는 무조건 개나 줘버려야 할까? 나는 요즘 어렴풋이 생각한다. 유치한 연애, 거기에서 우리가 말랑말랑해지는 그 순간에 내가 전부터 상상해왔던 ‘성숙한 인격의 두 인간이 맺는 관계’에서는 불가능한 어떤 작동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그리고 그 작동이 내게 아주 중요한 것 같다고.

그냥 이렇게 애처럼 살고 싶어, 라는 게 아니다. 연애가 이렇게만 흘러가면, 사람이 그렇게 생각 없이만 살면 당연히 답답해진다. 하지만 무작정 ‘유치함, 척결하자!’고 나설 게 아니라 과해지지 않도록 조절하며 살자는 거다. 물론 이건 반대로 생각하면 이런 면(쉽게 말해 유치함)이 삶에서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조절하자는 이야기도 된다. 이런 노력도 필요하다는 걸 간과하지 말자.

‘내가 이렇게 유치하다니, 자괴감이 든다’며 ‘어떻게 정신 차릴까?’를 생각할 때 나는 가장 무거워지고, 경직된다. 갑자기 기쁨들을 억누르게 되고, 그냥 웃고 그냥 즐거운 것, 지금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 등에 영 소질이 없어지는 것이다. 반면 내가 유치해지는 때에, 연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친구나 다른 모든 인간관계를 통틀어서도 마찬가지인데, 내 가장 부드러운 모습이 나오고, 많이 웃는다. 그러니 ‘달라져야 해, 성숙해져야 해’가 아니라 여기에 어떤 중요한 작동이 숨어있는지를 살피고 ‘이 말랑말랑함을 십분 활용해서’ 삶을 더 맛깔나게 만드는 법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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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랑말랑함을 십분 활용해서’ 삶을 더 맛깔나게 만드는 법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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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민
소민
5 months ago

정말 연애를 할때면 자의식 끝판왕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 비행기 안의 커플들의 이야기. 되게 남일같지 않은데 흥미진진해ㅎㅎㅎ 옆에서 같이 듣고 있는 듯^^ 연애,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렇게 찬찬히 글로 쓰면서 ‘상황이 정말 그러한’지 살펴보는 석영~ 석영의 말랑말랑한 연애를 응원합니다 🙂

재훈
재훈
5 months ago

다음글도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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